【김종진 金宗鎭(1901 ~ 1931)】 "신민부(新民府) 군사위원장 김좌진의 막하에 합류
1901년 (음)12월 26일 충남 홍성군(洪城郡) 구항면(龜項面) 내현리(內峴里)에서 출생하였다. 참봉을 지낸 부친 영규(泳圭)와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재당숙 학규(學圭)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양모는 은진송씨이다. 백야 김좌진(金左鎭)의 6촌 동생이다. 호는 시야(是也)이고, 이명은 심웅(沈雄)이다.
8세 때에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913년 봄 결혼하였다.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홍성군내에서 시위대의 선봉에 섰다가 붙잡혔다. 옥중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6월말 미성년이란 이유로 석방되었다. 귀가하자마자 상경을 결심하고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 중학속성과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시내 각 학교에 연락망을 구축하고 비밀출판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자, 1920년 4월 중국으로 건너가 펑텐(奉天)과 베이징(北京)에서 활동하였다.
중국으로 이주한 후 이회영(李會榮)과 신규식(申圭植)의 소개로 1921년 4월 윈난성(雲南省)의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교도대 2년 과정을 마치고 윈난강무당(雲南講武堂)에 16기생으로 입학하여 1925년 4월 졸업하였다. 이후 난징(南京)과 한커우(漢口)·상하이(上海) 등지를 거쳐 텐진(天津)에서 이회영을 만나 사상 토론과 독립군기지 건설을 구상하였다.
1927년 10월 북만주의 무단장(牧丹江)으로 가 신민부(新民府) 군사위원장 김좌진의 막하에 합류하였다. 또한 독립전쟁을 위해 둔전병 양성 계획을 세우고 신민부 영향 하에 있는 북간도 각 지방을 8개월 동안 순회하였다. 만주 순방을 통해 교민들의 생활실태와 일제에 대한 항전대책, 대공산당 행동통일과 독립운동단체 통일방안 등을 내용으로 하는 「만주를 근거로 한 한국민족해방운동의 기본계획안」을 작성하였다. 이 독립군기지 건설계획안을 바탕으로 1929년 7월 하이린(海林)에 있는 한 소학교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강령을 통해 무지배 사회의 구현, 상호부조적 자유합작, 능력에 맞는 생산과 수요에 응하는 소비질서 확립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강령 아래 신민부 개편안을 제출해 7월 21일 신민부를 재만동포들의 자주자치적 협동조직체를 표방하는 한족총연합회로 전환하였다. 한족총연합회는 각 지역 농무협회(農務協會)를 조직하고, 20여 개의 협회를 자유연합하는 방식을 취해 기존의 권위적 중앙집행기관을 탈피하고자 하였다. 한족총연합회에서 농무와 조직선전을 담당하며 위원장 김좌진, 부위원장 권화산(權華山), 교육분야 이을규(李乙奎), 군사분야 이붕해(李鵬海) 등과 함께 조직을 운영하였다.
한족총연합회는 동포들의 토지교섭은 물론 교육사업에 치중하여 새로 3개 학교를 신설한 것을 비롯해 50여 개의 소학교를 운영하였다. 나아가 중등학교를 설립해 조직과 간부를 훈련시키고자 북만중학(北滿中學)기성회를 조직하여 교지 확보를 위한 교섭을 진행하였다. 이와 함께 한족총연합회는 1929년 10월부터 산시(山市)역 본부 근처에 정미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정미소 설립은 중국인 지주와 상인으로부터 한인 교포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농촌자치조직을 통해 공동판매와 공동구매, 경제적 상호금의 설치 계획 등도 시도하였다. 이외에도 이들은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큰 반향이 일자, 조사원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1930년 1월 이달(李達)과 이강훈(李康勳)에게 소형폭탄과 권총을 주어 잠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족총연합회의 변화와 발전에 대해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결국 1930년 1월 24일 위원장 김좌진을 암살하였다. 이어 중국 관헌을 이용해 이을규와 함께 체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즈음 베이징에서 국내에서 활동 중이던 아나키스트 신현상(申鉉商)이 그 해 4월 충남 예산(禮山)의 친일계 호서은행에서 막대한 운동자금을 탈취해 왔으니,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대표회의에 참석하라는 전달을 받았다. 이에 이을규와 함께 만주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중국 각지에서 모여 열린 대표회의에서 이회영은 다시금 만주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총력을 기울일 것을 당부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중국 경찰을 앞세워 숙소를 급습해 동지들이 체포되고 운동자금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세웠던 계획, 특히 만주에서의 운동계획 또한 허사가 되었다. 게다가 동지 이을규도 1930년 9월 텐진에서 기선을 탔다가 배 안에서 일제 관헌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이회영과 백정기(白貞基) 등은 논의를 거듭한 끝에 텐진 시내 욱가(旭街)에 있는 중일 합작은행인 정실은호(正實銀號)를 습격하여 자금을 획득하기로 하였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1930년 9월 경 정화암(鄭華岩)·백정기·김지강(金芝江)·이규숙(李奎淑) 등 15명이 만주를 향해 떠났다. 원군을 맞이한 한족총연합회는 내부를 정돈하고 다시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하였다. 한족총연합회는 모든 것을 교민들의 자치로 결정하기로 하고, 1년에 한 번씩 각 지역 대표자 총회를 열어 모든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일제와 공산주의 세력과의 싸움을 위해 각 지방 단위의 자위대를 편성해 지역 경비를 맡게 하였다.
이러한 한족총연합회의 재건 움직임에 공산주의 세력은 자신들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 한족총연합회 주요 간부 암살에 나섰다. 그 희생자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결성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한족총연합회 간부 차장인 이준근(李俊根)과 김야운(金野雲)이었다. 두 사람은 7월 초순 스터우허쯔(石頭河子)에 있는 김좌진의 동생 김동진(金東鎭)의 집에서 저격당해 살해되었다. 이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1931년 7월 11일 하이린역 근처에 있는 조영원(趙永元)의 집에 찾아갔다가 어디론가 납치되었다. 1931년 9월 11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박내춘(朴來春)·이백호(李白湖)·이익화(李益和) 등에게 살해되었다고 보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