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대에 올라②
백운대에 이르는 길과 문화유산
글: 조장빈
조선 후기 백운대를 오르는 길은, 서쪽으로 북한산성 서문이나 창의문을 지나 문수암을 거쳐 중흥사에서 주능선을 타고 백운봉 암문에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지금의 수유동 구천계곡 조계사터를 경유하여하거나 우이동 소고별서(嘯臯別墅)에서 소귀천계곡으로 대동문에서 백운대에 이르는 길이 주된 유산로였다.
백운봉 암문에서는 산성을 따라 축성된 길을 따라 오르다 지금의 오리바위 위치의 결단암(決斷岩, 또는 開服磴)에서 백운대로 이어진 넓은 침니(Chimney) 또는 철책이 설치된 계단식 밴드(Band)를 따라 오르다 슬랩(Siab)으로 올랐을 것으로 여겨지며, 1927년 10월에 밴드길을 따라 돌며 철책이 설치되었다. 암문 서쪽 바위에 “300米”라고 새겨진 바위글씨도 철책을 설치하고 등산객이 많아져 안내 표식으로 새긴 듯하다.
김상용(金尙鎔, 1902~1951)은 1929년 11월 백운대를 오르며 “우리가 고양이 모양으로 사지로 기어오르던 곳에도 이제는 제법 설비가 든든해졌습니다. 이런 줄과 말뚝의 덕으로”라며 6년전인 1923년에 오른 코스가 백운대에 철책이 설치된 쪽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백운대에는 이전에도 철삭(鐵索)이 설치되어 있었던 기록이 전하는데, 1881년 백운대를 오른 유주현은 「遊白雲臺」에서 “잔도와 층계를 밟으며 벽을 따라 나아가니 두 개의 쇠밧줄이 허공을 가로질러 계단을 이룬 것이 있다.”고 하며 결단암에서 철삭(鐵索)이 설치된 길로 올랐음을 말하고 있어, 조선시대 선비들도 이 길로 백운대에 올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운대 서북쪽에 설치된 철책은, 김상용의 등반기에 “백운대 밑으로 수십장을 내려가서 형과 내가 한시간이나 두고 애써 찾던 그 샘물이 있지 않습니까. 내려가 보니 물이 있기는 하나 가랑잎 종이 부스러기 같은 것이 덮히어 아까운 약수를 망쳐버렸겠지요”라고 하는 등 당시 등반기에 정상부근 암자터로 내려선 기록들을 보아 1927년에 함께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약수암터에서 여우굴 방향의 등산로로 오르내리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백운대 능선을 따라 북한산성(사적 제162호)이 축성되었고 백운봉 암문은 일명 개구녕문이라 했다. 일제강점기 등산지도에 ‘衙門’ 또는 ‘衛門’으로 표기되어 있고 최근까지 위문으로 불려오다가 관심있는 이의 지명 변경 요청으로 암문에 걸린 작은 나무 현판이 내려지고 백운봉 암문으로 원래 명칭을 되찾았다. 일대는 자연경관이 뛰어나 명승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정상바위에는 정지용이 1954년 이후 새긴 3.1 운동 암각문(고양시 향토유적 제32호)이 있고 흉물스럽던 구부러진 지봉대(指峰臺) 철심은 뽑혀졌다.
민속 신앙의 대상으로 이성계의 명호글씨가 쓰여 있는 정상의 뜀바위(결단바위라고도 함)는 혼인 전에 신랑이 이곳에 올라 뛰어넘어야 혼례를 치를 수 있었으며 뜀바위에 빠지면 저 멀리 인천 앞바다에서 떠오른다는 민담이 산 북쪽 마을에 전해진다.
백운대를 둘러 암자터가 몇 곳이 있는데, 백운산장 백운암과 약수암터 그리고 백운대 정상 바로 아래 암자터다. 백운암과 백운산장은 북한산국립공원의 차지가 되어 시설을 고치는 중이다. 정길(鄭佶, 1566~1619)의 「遊三角山記」에 그는 인원(仁圓)이라는 늙은 승려를 따라 백운봉 중턱의 탁 트인 백운암(白雲菴)에 올랐는데, 동쪽으로는 도봉산 서쪽으로는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이 아득하며 백운봉 석문 넘어 깊은 골짜기로 떨어질 것 같았고 하여 지금의 백운산장 근방으로 추정되나 소재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약수암터는 일제강점기 중추원에서 북한산을 조사한 『北漢山地誌抄畧』에 인수봉 서쪽에 백운대가 있으며 “南面山腹”에 백운사의 유적이 있으며 그 아래 “淸泉이 湧出”하니 백운수(또는 万水)라고 하여 약수암터를 백운사로 추정하고 있다. 이 약수암터의 동쪽 계곡을 오르면 시발약수터가 있는데 이곳도 폐와편과 폐자기편이 눈에 뜨이고 계속해서 여우굴을 지나 오른쪽 능선을 넘으면 백운대 뜀바위 서쪽 아래로, 만경대를 마주보는 아늑한 자리에 암자터가 있다. 석축은 주변돌을 막쌓기를 하였으나 그 솜씨가 정교하다. 그 아래 협곡에 덮개돌로 굴을 이룬 안쪽에 물이 고여 이를 샘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깍아지른 협곡에 암자터가 있을까 싶지만 화두공안(話頭公案)의 ‘百尺竿頭進一步’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위치다.
백운대 정상 직하의 폐암자터 석축
한국산서회의 북한산 백운대 암벽등반 고전코스 탐사등반 및 문화유산 조사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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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소고(嘯臯) 서명균(徐命均, 1680~1745)의 별서로 우이구곡의 제9곡인 재간정(在澗亭) 자리다.
2)북문(北門, 註: 백운봉 암문)에서부터 오르면 「결단암(決斷岩)」이 있다. 이곳에서 준험(峻險)함이 다시 더해져 그 진퇴를 주저하는 일이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이 지점에 계단을 깍고 철책을 설치하여 절대 위험없이 갖춰져 있어 부인 어린이라도 쉽게 등반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경기도 편찬, 1937,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조선지방행정학회』, p.142)
3)당시 북한산 등산 안내 기사에 “위문에서 백운대 삼백미터”라고 하여 암문의 “300米”는 거리 표식으로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조선일보, 1937. 9. 18. 「상쾌! 륙색에 가을을 지고」)
4)이종헌, 2018, 『3인의 선비 청담동을 유람하다 이종헌 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삼각산이 무너졌다』, 부크크, p.230, 이종헌은 이 책에서 민경길이 『北漢山』에서 심능규(沈能圭, 1790~1842)의 시 「白雲臺」에서 “鐵索雙雙九節垂 쇠밧줄 짝 이뤄 구비 구비 늘어졌는데”라며 삼각산 백운대에 철삭이 설치되었다고 하나 이는 금강산 백운대를 오인한 것이라 하였다. 심능규는 본관 삼척(三陟)이며 주거지는 강릉(江陵)이었다. 금강산이 가까워 당시 유행하던 금강산 유산에 나서 백운대를 오르며 지은 시로 여겨진다. 해운정(海雲亭)의 주인으로 이지역의 문사로 유명하였고 중국의 고전에서 인(仁)에 관한 학설을 모으고 주석을 달아 편찬한 책인 인경부주(仁經附註)을 남기었다. 평생 유생으로 지내다 그의 나이 70세인 철종(哲宗) 10년(1859)에 향시(鄕試)로 치러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였다.
5)1954년 정재용이 스스로 독립선언서 낭독자라고 주장하기 전에는 누가 낭독자인지 알지 못했으며 더욱이 이 바위글씨를 일는강점기에 새겨 놓았다는 것은 무리한 추정으로 생각되며, 같은 의미로 인수봉 정상에 새긴 글씨를 1958년 10월 26일에 새겨놓는 등 백운대의 바위글씨는 최소한 1954년 이후에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6)每日申報社, 1913. 07. 22, 「北漢山地誌抄畧」
7)이 샘에 대해 김정태는 백운샘이라며 “백운대 정상 직하에(정면벽 중간) 얕은 굴 속에 있는 샘터, 백운수, 만수라는 별칭이 있으며 등정자의 유일한 물터”(김정태, 1976, 『登山 50年』, 한국산악회, p.30)고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그 근처에 백운사가 있었다.(김정태, 1969, 「한국의 산과 등산」, 『등산』 9월호, p.35)고 하나 다른 기록에서 이곳을 백운샘이라 한 것이 없고 『北漢山地誌抄畧』의 위치와도 상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