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 군대의 병사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엘리사가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로 인도하였다가 잘 먹여 돌려보낸 사건 이후에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아람 왕 벤하닷(Ben-Hadad)이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포위하였습니다(6:24). 아람 군대에 포위된 사마리아는 양식을 구할 데가 없어 사마리아 성 안의 사람들은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의 굶주린 형편을 6:25에서는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에 팔리고 있다고 묘사합니다. 나귀는 부정한 가축으로 분류되기에 식용으로 사용하는 가축이 아니었고, 이동수단이나 짐을 싣는 등의 일에 사용하는 동물인데, 그 나귀의 머리조차 은 팔십 세겔에 팔릴 정도였습니다. 나귀 머리라는 것은 다른 부위에 비해 가장 하찮은 부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세겔(שֶׁקֶל, Shekel)은 약 11.4g이고, 은 1세겔은 그 당시 일반 노동자의 4일 품 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러니 80세겔은 일반 노동자의 320일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거의 일년 동안 노동한 대가를 주어야 고작 나귀 머리 하나를 살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비둘기 똥이라고 표현한 것에 관해서는 실제로 비둘기 똥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비둘기 똥의 모양의 열매를 일컫는 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개정한글에서는 합분태(鴿糞太; 비둘기 똥 콩)라고 번역하기도 하였는데, 개역개정에서는 그대로 비둘기 똥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히레요님(דִּבְיוֺנִים)이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직역하면 비둘기 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열매가 쥐똥을 닮았다고 해서 쥐똥나무(Border privet)라고 불리는 식물이 있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비둘기 똥을 말려서 약재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학자들은 말 그대로 비둘기 똥이라고 여기기도 하는데, 굶주림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때 매우 하찮은 콩 종류의 열매라고 여기는 것이 나으리라 봅니다. 아무튼 이 비둘기 똥이라고 불리는 것도 1/4갑에 다섯 세겔이나 되었습니다. 갑(קַב, Cab, Kab)은 약 1.2ℓ인데, 하찮은 이 비둘기 똥이라 불리는 것도 일반 노동자가 20일이나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으로 살 수 있을 정도로 식량 구하기가 매우 힘든 상황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람(요람)은 사마리아 성 위로 걸어서 사마리아 성을 시찰(視察)하고 있었습니다(6:26). 성 위라는 표현은 성벽 위에 있는 길로 걸었다는 말입니다. 성벽 위를 걸으며 시찰하는 왕을 본 한 여인이 왕에게 도와달라고 외칩니다. 여인의 이러한 외침에 왕은 멈추어 서서 하나님께서 너를 돕지 않으면 어떻게 너를 돕겠느냐고 대답합니다(6:27). 이러한 말은 하나님이 도우셔야 한다는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도 못 도우시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돕겠느냐는 약간 비관(悲觀) 섞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작 마당이든, 포도주 틀에서든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들다고 답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이 여인이 무엇을 구하는지 듣기도 전에 이미 사마리아 성 안에 있는 백성이 굶주림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연을 듣기도 전해 그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이 여인의 호소는 물론 굶주림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지만, 매우 참혹한 상황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웃 여인과 약속하기를 오늘은 내 아들을 삶아 먹고, 내일은 네 아들을 삶아 먹자고 약속했지만, 내 아들을 삶아 먹은 후에 그 다음날 이웃 여인은 자기 아들을 숨겨놓고 내어놓지 않았기에 억울하다는 호소였습니다(6:28, 29). 사마리아 성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이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이 여인의 호소를 들은 이스라엘 왕은 너무나 참혹한 현실에 자기 옷을 찢으며 비통(悲痛)해합니다(6:30). 왕은 겉옷 속에 굵은 베를 입었는데, 이스라엘의 비참한 현실에 애통(哀痛)하는 마음으로 입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에게 그러한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의도도 다분히 있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스라엘 왕은 이러한 상황에서 엘리사를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다짐합니다(6:31). 사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고통은 이스라엘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지 엘리사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왕은 마치 선지자인 엘리사가 뭔가 잘못한 것처럼 엘리사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옷을 찢고 베옷을 입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하나님께 엎드리어 회개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왕이라면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지 않고 애꿎은 엘리사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에게 사신(使臣)을 보냈는데, 엘리사는 장로들과 함께 엘리사의 집에 있었습니다(6:32). 이러한 긴박한 상황 속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엘리사 선지자의 집에 함께 있다는 것도 특이한 일입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이스라엘의 왕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엘리사는 이미 왕이 자기에게 사람을 보낸 것을 알았고, 문을 닫고 왕이 보낸 사자(使者)를 문 안에 들이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마 이스라엘 왕은 사신을 엘리사에게 보내어 놓고 자신도 뒤따라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들이닥친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에게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라고 말합니다(6:33). 이스라엘 왕은 이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사에게 하나님께 간구하여 이 상황이 해결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를 죽이겠다며 엘리사에게 왔지만, 마음을 바꾸어 엘리사에게 하나님께 이 상황을 해결해 주시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이스라엘 왕과 함께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는 것입니다(7:1). 한 스아(סְאָה, Seah)는 약 7.3ℓ인데, 고운 가루는 곡식을 아주 곱게 갈아서 만든 매우 고급스러운 곡식 가루를 의미합니다.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라는 가격도 평상시에 비하면 약간 비싼 가격이긴 하지만, 비둘기 똥이라고 표현된 것이 300㎖에 다섯 세겔이나 되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안정된 상황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왕을 보좌하는 시종무관(侍從武官)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겠냐며 의구심(疑懼心)을 드러냅니다(7:2).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한 말에 대해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라고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役事)에 대한 불신(不信)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신에 대해 엘리사는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라고 응답합니다(7:2).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 축복을 누릴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 축복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매우 참혹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에 있었기에 사마리아 성에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질 수 있었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와 같은 자가 있다면 그래도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나 자신이 엘리사와 같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