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가장 잊을 수 없는 여름방학
"빠~아~앙"
"흥 제 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난 절대로
너를 타지 않을 거라니까"
기적소리 요란하게 울리며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나지막이 앙탈을 부려보았다.
물론 어른들이 하시는 일에 따라야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큰소리를 울리며 달려가는 기차가 더 서운했다.
때론 안절부절못하고 혹시나 싶어 한 마을에 사시는 집안 어른이신 담임선생님께
"선생님 전 서울 가기 싫어요. 우리 아빠에게 말해주세요" 간절한 눈빛으로 하소연했지만
빙그레 웃기만 하시던 담임선생님.
천만다행 할머니께서 서울길에 잠시 동행을 했기에 그나마 위안을 삼으며
아버지 손에 잡혀 기차를 타야만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신학기가 시작되고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저 세상으로 가셨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대성통곡을 하시던 아버지.
"저 불쌍한 것들을 어떻게" 친척들께서 눈시울을 붉히며 말씀하셨지만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때는.
유난히 부부금실이 좋았던 아버지께서 일단 맘 추스를 동안 동생과
나는 할머니가 계신 고향 마을로 오게 되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섶에 우리 집 수호신 큰 감나무가 반들반들 기름지고 두툼한 나뭇잎을
수없이 흔들며 어서 오라고 반겨준다.
감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떨어지는 날에는
기다란 풀줄기에 감꽃을 넣어만든 감꽃 목걸이와 팔지를 둘둘 말아 걸고
나무 막대기 하나 손에 들고 아프리카 추장처럼 의기양양하게 들판을 뛰어다녔고,
친구들이 먹는 삐비가 하도 먹고 싶어서
논두렁을 뒤지다가 종아리에 시꺼먼 게 붙어 오물오물거리는데 주위에 피가 스멀스멀 나온다.
이제는 죽는구나 하고 큰소리로 울어라도 보고 싶었지만 정작 무서워 큰소리로 울지도 못하고
훌쩍훌쩍거리면서 심장이 터져라 무작정 뛰어갔다.
잡풀이 무성하여 길이 보이지도 않는 울퉁불퉁한 논두렁 길을.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이제는 제대로 노는 시간.
원두막에 앉아 익지도 않은 수박 따서 병순이랑
속이 허연 수박을 맛있다고 입 맛을 다시며 먹었던 기억들.
조상께 제를 지내는 초하루 삭망에는 팥을 두툼하게 넣은
팥시루떡이 먹고 싶어 늦은 밤까지 기다렸고,
겨울이 되면 할머니께서 간식으로 드시던 호박고지떡은
호박고지 냄새가 난다고 쳐다도 안 보았지만,
할머니 나이가 된 이제는 없어서 못 먹는 호박고지떡.
설날 저녁 아랫집에 사는 화자언니랑 부엌 아궁이에 앉아 떡국을 먹으며
안방에서 가족들하고 떡국을 먹는 것보다 더 신나고 재미있었던 기억들.
정월 대보름이 가까이 다가오면 불장난에 정점을 찍어며 깡통에 관솔을 넣어
철사로 길게 엮은 줄을 돌리던 깡통 불놀이는 선망의 대상일 뿐
한다는 짓이 양지바른 언덕에 조그마하게 구멍을 내어 나뭇잎을 넣고
불을 붙이면 빨갛게 타오르던 불꽃이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래도 신나게 매일매일 햇살이 밝은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양지바른 언덕에서 불장난을 했다.
그렇게 내 인생의 황금기 2년은 기억의 파편만 남긴 채 감쪽같이 흘러갔다.
서울로 올라와 6학년 새 학기가 되고 어영부영 가을이 오자
서울에서도 운동회는 한다. 효창운동장을 빌려 운동회를 했는데
뭘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렇게 문이 여러 개 있는
운동장은 난생처음 보았다는 기억만 있을 뿐이다.
중학교 추첨세대다.
정말 은행알을 굴려서 용산구에 하고많은
중학교가 있었는데 영등포구 상도동 신설학교에 갔다.
아침마다 제1한강교를 넘어 진흙탕 산꼭대기 신설학교에 다녀야 하는
멀미쟁이 철없는 딸아이가 얼마나 걱정이 되셨는지
아버지께서는 학교에 같이 다닐 친구부터 찾으셨다.
엄마의 몫까지 충실하셨던 아버지.
당신의 넥타이로 딸아이 동복 치마 멜빵을 만들어 주시고,
가정시간에 수예를 배우기는 했지만 손재주가 없는 딸아이를 대신에 가정숙제 신주머니에
수를 놓아주시며 물심양면으로 노심초사하시면서 딸아이를 키우셨던 아버지.
중2 여름방학이 되고 드디어 할머니 계시는 고향에 가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서부역 장항선 기차 안까지 들어오셔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는지
불안한 눈초리로 딸아이 손을 꼭 잡었다 놓으셨다.
열다섯 살 때 난생처음 혼자 기차를 타고 고향집으로 갔다.
"빠~아 앙" 기적소리를 앞세워 기차가 고향 마을을 지나간다.
'그래 내가 간다 간다니까'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던가.
종착역 장항에 기차가 도착하자
장시간 기차를 탔던 지루함도 눈 녹듯 사라져
재빠르게 기차에서 내렸다.
비릿한 갯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버스 정류장에서 서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눈에 익은 물문과 신작로가 차 창문 너머로 보이자
마음이 먼저 버스에서 내리더라.
여전히 큼지막한 소똥이 말라붙어 있는 황톳빛 신작로를 오랜만에 걸으니
흙먼지가 잔잔하게 일며 따라온다.
저만치 언덕 아래 우리 집 수호신 큰 감나무가 보인다.
바깥마당 멍석에 뭘 널어놓으셨는지 멍석에 쪼그리고 앉아 계신
할머니 모습이 보이자 숨 가쁘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할머니를 놀라게 하고 싶어 가만가만 큰 감나무 앞을 지나 언덕길을 올라가는 데
어느 사이 할머니께서 아시고 언덕을 바삐 내려오시며
"아이고 내 새끼" 가슴으로 안고 얼굴을 비비신다.
'얼마나 오고 싶었는데요....' 물론 말은 안 했지만
수도 없이 이 말을 되뇌고 있었다.
3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있는 성질 여과 없이 드러내 까칠하기로
소문이 나 있던 병순이가 베풀기 좋아하고 수더분하게 변신을 하여
철이 들면 이렇게 행동하는구나 하고 일깨워주던 친구.
여전히 어른스러운 한순이, 인희, 순덕이
들에 핀 야생화 같은 친구들이기에 더욱더 향기가 진한 친구들.
나는 그 친구들의 향기에 취해 내 생애 가장
잊을 수 없는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쌀을 흠씬 불리는 걸로 보아 할머니께서 떡을 하시려나보다.
도고통(절구통)에 물린 쌀을 넣고 도고(절구) 질을 하시는
허리 구부정한 할머니가 안쓰러워 대청마루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쪼르르 내려가 "제가 할게요"큰 소리를 팍 쳤겠다.
절구질에도 기술이 필요한지 아무리 절구질을 해도 쌀이 가루가 되지는 않는다.
속으로 절구질하면서 숫자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백은 채워야지 욕심껏 백을 채우고
도고통속을 들여다 보아도 으깨진 쌀은 별로 없다.
빨갛게 된 손바닥에 물집까지 잡혀 있는 내 손을 보시고는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하시면서 할머니는 다시 절구를 잡으신다.
십리가 되는 장항까지 걸어서 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버스 타는 동구밖까지도 만만치 않게 걸어 야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없이 집에서 떡쌀을 찧는 게 보통였지만
나이 드신 할머니나 어린 손녀딸에게는 보통일은 아니었다.
칠월칠석날 할머니는 통팥시루떡을 하셨다.
대숲이 떠나가라 왁자지껄하던 수다쟁이 참새들도
잠들어버린 뒤꼍 장독대 앞이 제단인양
통팥시루떡을 가져다 놓고 할머니는 지성을 들이신다.
두 손을 모아 비비며 자손들의 안위를 간절하게 바라는 지성은 끊임이 없다.
이제나 저제나 아무리 기다려도 끝나지 않는 할머니 지성에 지쳐 그만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떡타령'부터 했다.
부엌 안에 있는 찬광은 대낮에도 어두 껌껌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양쪽 문을 활짝 열고 시렁에 얹은 떡을 꺼냈다.
어두 껌껌한 찬광이 무섭긴 해도 하루종일 '팥바구니 쥐들랑 거리듯' 왔다 갔다 하면서
떡보의 여름사냥은 밥도 안 먹고 떡만 들고 다녔다.
꿈같은 여름방학도 끝나고 이제는 다시 서울로 와야 한다.
바깥마당까지만 나오시라고 할머니와 이미 약속을 했다.
언덕 아래로 내려오면서 큰 감나무에게 할머니의 건강을 부탁했고
흙먼지가 아무 생각 없이 이는 신작로를 따라오면서
절대로 뒤 돌아보지 않으리라 맹세를 했지만
동구 밖 물문에 와서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기어이 뒤 돌아보고 말었다.
인적까지 한적한 장항역 플랫폼은 하얗게 부서지는 아침햇살만이 가득하여
내 설음을 더욱더 부채질하고 있다.
헛것을 밟듯이 진정되지 않는 마음 가라앉히며
고향마을이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었다.
'빠~아~앙'
기적이 울린다. 싫지만 참았다.
재빨리 달려가는 기차 차창 너머로 저 멀리 언덕 위에 우리 집이 보였다.
기차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대문 앞에 할머니께서 망연히 서 계신다.
참고 있던 설음이 터져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2024.8.2
NaMu
첫댓글 몇 번 더 읽어야 제대로 된 댓글을 달 수있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군요.
추억이 아름답습니다.
돌아 갈 수 없는 세월이라 더 애틋하구요.
할머니의 지성이 하늘에 닿은 듯 합니다.
집을 지키는 수호신 감나무잎의 반질거림이 눈에 아른거려요.
정말 감동깊게 읽었습니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성장기에 엄마가 계시다는 것은
가장 큰복을 타고 난것 같아요.
아득히 멀어서 우리에게도 그런시절이
있었나 싶지만, 잊지 못할 어린시절이
우리에게도 분명있었어요.
감나무가 유난히 크고 우람해서 수호신
같았어요.
아직은 많이 서툴른데요 잘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커쇼 님
인성도 좋은 커쇼를 저도 좋아해요.
근데요 요사이는 오타니에 푹 빠졌어요.
WBC에서 보여주었던 오타니의 리더십
감동 그 자체 였거든요.
(WBC가 오타니에 의한 오타니를 위한 잔치라고 극찬한 기사도 봤어요)
절창입니다.
나도 그 옆에 있었던 양
성장기의 파노라마를 눈에 다 담았습니다.
빠~~아~~앙~
그렇게 한 시퀜스 씩 세월이 흐르나봅니다.
개인적이 이야기라서요.
쓸까말까 망설였는데요.
누구나가 있었던
우리들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써 봤어요.
그러게요 그렇게 우리네 인생사가
퍼즐게임같아요.
감꽃이 떨어지면 주워서 먹기도 하고
실에 꿰어 목에 걸면 감꽃향이
은은하게 번졌지요.
떫은 땡감이 떨어지면
된장에 찍어 먹기도 하고
물에 며칠씩 담궈 놨다가
떫은맛을 우려내 먹기도 했구요.
뭐 하나 허투로 버리는거 없었던
감나무집 아이들.
그때는 감나무도 어찌그리 귀하던지요.
나무랑님 여름방학과 기차여행이
동화처럼 아련합니다.
서울내기 소녀가 시골 동무들과
그리고 가족과 함께 만들어간
정감어린 추억들~
그때가 참 그리워지는 여름방학~
너무너무 아름다운 글에
제 마음도 한 켠에 걸어두고 나갑니다.
우~와 제라 님도 감나무집 아이였군요.
저희 집에도 감나무가 많았어요.
태풍이 오면 아직 여물지도 않은
감들이 우수수 떨어지기도 하구요.
저는요 아직도 죽마고우같은 시골친구들을
자주 만나고 친하게 지내요.
순수하고 천진난만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
그런지도 몰라요.
그러게요 감나무집 소녀 제라 님이 눈에 선하게 그려져요.
같이 공감 할 수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넘넘
좋아요
'절대로 뒤돌아 보지 않으리라' 는 대목에서 부터,
그만 코끝이 찡~
나무랑님, 왜 남의 마음까지 사무치게 만드나요.
고향의 그리움,
그맛이 이보다 더 진하게 표현될까요.
일찍 엄마를 떠나 보낸
나무랑님의 슬픔도 아픔이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할머니의 사랑 역시
나무랑님을 이토록 잘 살게 만들었습니다.
커다란 집에 할머니 혼자 계신다는게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넘 아펏거든요.
서울에 와서도 한동안은 시름시름 가슴앓이를 했어요.
고향은 제 글쓰기에 원천인데요.
좀더 오래 살었으면 풍성한 글을 쓸 수
있었겠지만 2년은 넘 짧았어요.
(좋은 목수는 재료 탓을 하지 않는다는데
저는 그 정도는 아닌가봐요)
그러게요 세상 다정다감하신 아버지 딸이 없어 손녀딸을 딸처럼 아껴주시던 할머니가
계셔 천만다행였어요.
늘 잘 봐 주셔서 감사드려요. 콩꽃 언니
충청도 산골의 내고향에서 국민핵교 5학년까지 자란 내 소년기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글.
그래서 눈을 지긋이 감고 고향으로 달려가 봅니다.
고향
----------------------- 박 민 순
등 굽은 초가지붕 위로
한 폭의 그림처럼
저녁연기 피어오르고
노을이 붉게 탈 때마다
지는 하루해 아쉬워
울어대던 산새들
까치발 높이 들고 밖을 보면
일 마친 누렁소
터벅터벅 걸어오던
앞 들녘, 논둑길
그곳을 비추던 달빛
그리고 별빛마저
가로등 불빛에 밀려
흐릿해져 버렸다
자동차 시동 켜고
불빛 멀리 밝혀
더듬더듬 걷는 옛길
그림자 길게 늘인
내 생각의 막다른 골목길에서
지번地番 잃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역시 시인은 다르시네요.
충청도 두메 산골을 어쩜
이렇게 잘 표현하셨어요.
초가지붕에 저녁연기
어쩌면 우리가 공감할 수있는
마지막 세대같아요.
제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나무랑님의 고향집 풍경이
이렇게 술술 잘 그려지는 걸 보니
글이 그림인가 싶습니다.
기적소리까지 더하니 그림이
노래가 됩니다.
우~와 넘나 잘 봐주신것 같아요.
많이 서투른데 감사드려요.
아름문학방에 맘자리 님과 가람의 뫼 작은형님께서 주옥같은 글을 올리던게 엊그제 같은데요.
벌써 일년이 지났어요.
자상하셨던 아버님이 얼마나 그리울까요
팥시루떡 호박고지떡 제고향 청송에서는 가을 감을 깎고 남은 껍데기를
말려 시루떡에다 넣고 찌더군요 그게 얼마나 달던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요 아버님을 생각하면 자랑스런 딸이
되어 본 적이 없어서 평생 죄인같아요ㅠㅠ
아 고향이 주왕산 있는 청송이시군요.
감 껍데기를 넣어 만든 감껍데기 시루떡 그러게요 넘넘 달달하고 맛있을 것같아요.
지역 특산물로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나봐요.
예전에 정기산행후에 뒷풀이를 하는데 사과로 깍두기를 만들었더라구요.
사과로 깍두기라니 넘나 놀랐어요.
무우보다 달달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네요
서울에 오셔서 효창운동장에서 운동회를 했다니
연배도 비슷하고 어쩌면 동네에서 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효창출신입니다
3년만에 찾아간 고향 할머니도 뵙고
따스한 추억을 가지고 계시네요
아~함 효창동에 사셨군요.
저는 금양 다녔는데요.
6학년 1년만 다녀서 몇회 졸업생인지도
몰라요.
심지어 졸업 앨범도 없어졌어요ㅠㅠ
그렇지만 무지 반갑네요.
저희집은 일본식집 많은데 있잖아요.
거기있었어요 2층은 다다미방였구요.
아 버스 정거장 건너편에 빵집 있었잖아요.
저희 아버지께서 퇴근때 마다 단팥팡 소보로빵 앙꼬가 들어있는 소라모양에 빵을 매일매일 사가지고 오셨어요.
저희집이 빵집 근처에 있었거든요.
실질적으로 서울분이신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시골생활을 조금 하셨습니다.
그래 정감 있는 추억 많아 보입니다.
제가 조금 아는
나무랑님을 보면 글도 좋고
또 등산으로 다져진 체력이 있어 그런지 파이팅 넘칩니다..ㅎ
다만 응모작품이기에
조금 더 다듬으면 아주 좋은 글이 될거 같습니다.
일례로 상망은 삭망이 맞겠지요..^^
우~째 이런일이 그러게요 상망이 아니고
삭망였어요.
무쟈게 성격이 급해서요.
한 번에 글을 쫘악 쓰고 올리다보니
오타도 많고 실수도 많아요.
근데말예요 상망은 몰랐어요.
글을 쓰면서도 감이라는게 있잖아요 상망이 맞나 순간 찜찜하긴했지만 애라 모르겠다 맞겠거니하고 올렸다니까요ㅠㅠ
가르쳐주셔서 넘넘 감사드려요.
재주가 메주라서요 할 줄아는 거라고는
그냥 걸으면 되는 등산 밖에 없다니까요.
그렇다고 다져진 체력도 아니예요.
쪼만하고 살도 많지 않아요.
일찍 세상
떠나신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얼머나 클까요
시골 할머님과의 추억의..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나무랑 선배님 을모글 감사합니다
이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아이는 엄마가
없는 아이라는 걸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몰라요.ㅠㅠ
그러게요 저는 할머니를 어려서부터 좋아했어요.
많이 서투른데요 잘 봐 주셔서 감사드려요
지 인운영자님.
할머님과 아버지의 지극 정성으로
지금의 나무랑 님이 계셨네요
서천 에서 보낸 중학교 시절의
여름방학의 추억들이 아득하게 다가오네요
글자 하나 하나 너무나 애틋합니다
♡♡♡
그러게요 엄마 복은 없었어도 천만다행였어요.
옙^^ 생애 잊을 수없는 여름방학였어요.
잘 봐주셔서 넘넘 감사드려요 리즈향 운영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