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잠언 2장 1절 – 22절) 2: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6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8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9 그런즉 네가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10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요 11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12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 내리라 13 이 무리는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며 14 행악하기를 기뻐하며 악인의 패역을 즐거워하나니 15 그 길은 구부러지고 그 행위는 패역하니라 16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17 그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며 그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18 그의 집은 사망으로, 그의 길은 스올로 기울어졌나니 19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 길을 얻지 못하느니라 20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21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22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솔로몬의 잠언” 중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왕국의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살아갈 젊은이들이 지녀야 할 15가지 지혜의 교훈을 권면한 제1 잠언 모음집(1:1-9:18)의 세 번째 교훈 내용입니다. 첫 번째는 지혜를 추구하는 자는 마땅히 악인의 유혹을 피하는 것이 지혜라고 했고(1:10-19), 두 번째는 책망을 듣고 돌이키게 하는 지혜의 초청에 적극 응하는 것이 지혜라고 했습니다(1:20-33). 오늘 본문에서는, 지혜를 추구하되 어떤 자세로 추구할 것인지와 지혜가 가져다주는 신앙적 현실적 유익이 무엇인지를 지혜 없는 자의 삶과 비교하여 권면합니다. 오늘이나 과거나 종교와 지도자들이 타락하면, 우리 내부의 문제를 뼈 깊이 인식하고 고치려고 하기보다, 신앙공동체 밖의 사람들의 문제를 가지고 난리법석을 떱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다 공동체의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토기장이의 비유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며, 택하신 신앙 민족 공동체인 유다 왕국의 멸망을,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너희를 치려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렘18:11)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선포에 유다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려는 “지혜”보다, 오히려 함께 똘똘 뭉쳐서 “이제 예레미야를 죽일 계획을 세우자. 이 사람이 없어도 우리에게는 율법을 가르쳐 줄 제사장이 있고, 지혜를 가르쳐 줄 현자가 있으며, 말씀을 전하여 줄 예언자가 있다. 그러니 어서 우리의 혀로 그를 헐뜯자.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무시하여 버리자”(렘18:18,새번역)라는 “미련한” 행태를,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안타까움으로 호소합니다. 이런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은 결국 북 이스라엘을 앗수르 제국에 주전 722년에, 남유다를 바벨론 제국에 주전 586년에 멸망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제사장”은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계명 준수를, “현자”는 “지혜”를 통한 하나님 경외를, “예언자” 곧 “선지자”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순종을 가르치는 3부류의 정신적 지주가 유대 사회를 지탱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문제는, 백성들이 하나님보다 이들을 더 의지했고, 당시 이들 유다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실세들이었던 다수 역시, 자기 권력과 이권에 도취되어 타락했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바라봐야 하는 거룩한 통찰력의 “지혜”입니다. 1. 지혜를 추구할 것을 어떻게 권면합니까? “솔로몬”은 지혜에 대한 추구를, 첫째로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2:1)라며, “나의 말”을 “나의 계명”으로 동일시하여 스승의 훈계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자기 안에 “간직”하라고 권면합니다. “계명”은, 훈계 또는 율법을 의미합니다. “만일”이라는 표현을 한 것은,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소망의 마음과, 그럴 때 얻게 될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약속(2:5,9)의 전제적 의미입니다. 둘째로,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2:2)라며, 지혜를 얻기 위해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춰 성실하고 진실한 적극적인 태도로 스승의 훈계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것을 권면합니다. 앞에서 “나의 말을 받으며”라는 외적 행동을 “귀를…기울이”는 것으로, “네게 간직하며”의 내적 행동을 “마음을…두며”라고 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지혜를 추구할 것을 다시금 강조합니다. “지혜”와 “명철”도 유사한 표현으로서, 지식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의 뉘앙스 차이가 존재하는 단어로, 보통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명철”은, 보통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신령한 능력으로서의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지혜”의 결과가 “명철”인 셈입니다. 모든 말에 무조건 맹종하는 것이 “지혜”가 아니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 놀랍게도 사도행전은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17:11,개역)라며, 사도 바울의 말에 무조건 맹종하기보다 성경을 통해 과연 그러한가를 검토해보았던 저들의 신앙을, “신사적”이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라고 증언한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셋째로,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2:3)라며,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지혜”와 “명철” 곧 “지식”과 “명철”을 구하고 찾고자 할 것을 권면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며, 적극적인 자세로 하나님의 진리를 갈망하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질 것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지식”과 “지혜”가 오늘 본문처럼 같은 의미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굳이 구분한다면, “지식”은 어떤 사물에 대한 기술적 기능적 이해력으로서, 이 세상의 수많은 개별적 대상에 대해서 분석적 이론적으로 갖고 있는 인식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여러 논리적 증거들을 통해서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서, 쉽게 말하면 ‘이론적으로 배운 것’ 곧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혜”는, 한 인격이 인생의 존재와 의미 전반에 걸쳐 대립하는 상황까지 전체를 볼 줄 아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나 자신을 포함한 온 세상 곧 우주와 역사와 인생과 삶의 전 영역에 대해서 통합적 직관적으로 아는 인식으로서, 쉽게 말하면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배운 다양하고 폭넓은 이론적 “지식”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기도 하지만 한계성이 있으며, 이론적 “지식”이 없어도 하나님이 주신 양심과 이성에 따라 우주의 원리 곧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추구하면 심오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넷째로,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2:4)이라며, 단지 “불러 구하며…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는 단계보다, 돈을 벌기 위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이상의 열정과, 또한 광부가 땅속 깊은 곳에서 금과 은을 찾고 채굴하기 위해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노력을 기울일 것을 권면합니다. 지혜는 순식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오랜 경험과 훈련 끝에 인격으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엇보다도 현실 상황 속에서 세상 죄악의 유혹을 극복하며 인내해야 할 것을 권면하는 의미합니다. 욥도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28:12,20)라고 탄식하며, 은과 금을 얻기 위해 “사람은 어둠을 뚫고 모든 것을 끝까지 탐지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광석도 탐지하되, 그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갱도를 깊이 뚫고, 발길이 닿지 않는 곳 사람이 없는 곳에 매달려 흔들리느니라”(욥28:3-4)며, 그럼에도 이렇게 애쓰는 인간의 노력과 열정과 수고만으로도 “지혜”와 “명철”을 얻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8:28)고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결국 참된 지혜는,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는 고백입니다. 2. 지혜가 가져다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지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은, 부여받은 지혜를 보화처럼 귀하게 여길 때 주어지는 신앙적 윤리적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지혜”가 가져다주는 영적 유익으로서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2:5)라고 선언합니다. 참된 지혜의 시작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1:7)고 했던 것처럼, 인내와 진실한 마음으로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를 겸손히 받아 마음에 간직하고 순종하며 지혜를 추구한 결과 역시, 보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경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바른 지식을 터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2:6)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지혜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그 입에서 내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지혜”가 삶의 전 영역에 대한 통찰력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지식과 명철”은 윤리적 인격적 의지적인 바른 분별력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경외심과 지식이 없을 때 벌어지는 윤리 도덕적 악행을,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호4:1-2)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해서 윤리적 행위를 망각하고 종교적 행위에만 열심을 다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며,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진정한 신앙의 자각과 각성을 호소합니다. 둘째로, “지혜”가 가져다주는 윤리적 인격적 유익으로서 “그런즉 네가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2:9)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2:7-8)고 밝힙니다. “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며 알게 될 때,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해야 할 믿음의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지혜”의 분별력은,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와 “행실이 온전한 자”를 보호하시는 “방패”로서 주어지는 선물이며, 또한 “정의의 길”과 악한 사람들과 구별된 “성도들의 길”을 가도록 “보호하시며…보전하려 하심”이라고 밝힙니다. 솔로몬이 잠언을 기록한 목적에서,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1:2)라며, 이로써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1: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행할 “모든 선한 길” 곧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합당하게 사는 방식을, 솔로몬은 “공의와 정의와 정직”으로 제시합니다. “공의와 정의”가 혼돈되어 사용되다보니, “공의”는 “정의”(새번역)로도 말하며 도덕적으로 옳은 것을, “정의”는 “공평”(새번역)으로도 말하며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정직”은 인간관계에서의 내적 외적 자세를 의미합니다. ‘재난은 사라질 수 있지만, 인격은 소멸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재난은 일시적이지만, 인격은 재난 가운데서 더 빛을 발하고 성숙해지게 하여 그 재난을 극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혜”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떠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어야하는지를,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지혜”가 가져다주는 인생의 구체적인 유익으로서,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 내리라”(2:12)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요.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2:10-11)라며, 하나님의 지혜가 “선한 길”을 분별하게 하여 죄악의 자리에 서지 않고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악한 자의 길”은, 윤리적으로 선을 상실한 행동으로서 악한 의도를 갖고 행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패역을 말하는 자”는, 고의적 악의적으로 말씀의 진리를 왜곡시켜 사람을 미혹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믿는다고 하면서 잘못된 삶을 사는 이들의 방식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 모든 삶의 가치관을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로써 “지혜”가 우리의 삶 전반을 직관하는 “지식”의 통찰력을 갖게 하여, 영적 도덕적 성품의 인격을 형성하는 건강한 “영혼”으로서 마음을 “즐겁게 할 것”이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선한 일을 도모하고자 악한 일을 경계하며 신중한 삶의 태도를 유지하려는 “근신”과, 상황과 사리와 사람을 올바로 판단하는 “명철”로 인하여, 경거망동하지 않는 행동으로 “너를 지키며…너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는 유익이 있다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하면서도 “지혜”를 거부하는 자들은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로서, “이 무리는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며, 행악하기를 기뻐하며, 악인의 패역을 즐거워하나니, 그 길은 구부러지고, 그 행위는 패역하니라”(2:13-15)고 경계합니다. 넷째로, “지혜”가 주는 “선한 길”에 대한 분별력과 통찰력의 유익으로 인해 인생의 삶의 여정에서,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2:16)라고 선언합니다. “말로 호리는”은, 유혹을 목적으로 입에 발린 말과 아첨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패역을 말하는 자” 역시도, 진리와 진실을 왜곡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선동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음녀”와 “이방 계집”이 단순히 인종적인 이방인이 아니라, 믿는다고 하면서도 도덕적 윤리적으로 신앙적인 영역 밖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지칭합니다. 따라서 “그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며, 그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2:17)며, 이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지 말 것을 “그의 집은 사망으로, 그의 길은 스올로 기울어졌나니,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 길을 얻지 못하느니라”(2:18-19)고 경계합니다. 3. 지혜 추구의 궁극적 결과가 무엇입니까? 솔로몬은 “지혜”에 대한 담론을 시작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1:7)는 대 전제를 선포하며, “지혜”를 추구하는 자는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1:10)며, “악한 자”를 멀리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세 번째 교훈에서는 “지혜”를 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유익을,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2:5)라며, “그런즉 네가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2:9)고 밝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그동안 “지혜”를 추구하는 선물로 주어진 신앙의 “선한” 분별력과 통찰력이, 우리를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 내리라”(2:12) 그리고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2:16)라고 약속합니다. 이제 솔로몬은 세 번째 교훈을 마무리하며 이러한 지혜 추구의 궁극적인 결과를, 첫째로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2:20)라고 약속합니다. “선한 자의 길”은, “지혜”를 추구하는 자가 단지 윤리적으로 모범이 되는 선한 길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선한 자”로서의 삶을 행하고자 추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걸어가는 삶의 방식은 늘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고자 하는 “의인의 길”을 지키게 될 것이라고 밝힙니다. 둘째로, 자신들의 전인격으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올바로 깨닫고 “선한”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인”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축복을,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2:21) 곧 “세상은 정직한 사람이 살 곳이요, 흠 없는 사람이 살아남을 곳이기 때문이다.”(새번역)라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2:22) 곧 “불의하게 살면 세상에서 끊기고, 신용 없이 살면 뿌리가 뽑히고 만다.”(공동번역)고 밝힙니다. “땅”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약속과 축복의 땅인 가나안 땅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땅을 의미하며,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솔로몬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지식의 근본”인 “지혜”를 추구하게 했던 이유를,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2:9)며 따라서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2:20)라고 말씀한 이유와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세상에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의 참된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2:20)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흔히들 “선한 자의 길”을 추구하는 윤리적 자세를 가리켜서 인본주의적 발상이라고 공격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입니다. 왜 믿는다고 하는 이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1:7)고 경고했는지를 분별하여 깨닫는 이들이 진정한 “지혜”의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공의와 정의와 정직”(2:9,1:3)을 말하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들인, 이들의 실체가 무엇이며 어떤 사람들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 “솔로몬의 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이들로 가기를 원하시는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2:9)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하며, 가야할 길과 가서는 안 될 길, 함께 해야 될 사람과 함께 해서는 안 될 사람을 분별하는 “명철”의 “지혜”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2:17)로서, 영적 우상숭배에 빠진 “음녀”와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과 같은 잘못된 신앙인들에게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들의 특징을, 믿는다고 하면서 행하는 이율배반적인 상반된 거짓 행동을 가리켜서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며, 행악하기를 기뻐하며, 악인의 패역을 즐거워하나니, 그 길은 구부러지고, 그 행위는 패역하니라”(2:13-15)고 분명하게 분별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를 향해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호10:13)던 길을 떠나서,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10:12)고 초청하며,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 선포합니다. 우리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2:20) 하는 “지혜”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길인 “정의의 길”과 “성도들의 길”(2:8)을 걸어가는 복된 신앙의 사람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