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 4 외 1편
이희석
이곳의 돌들은 서로 미워하지 않아요
누르는 것들의 무게는 한시도 그대로인 적이 없지만
기울기는 더 기울지 않죠
사람과 차 말고도 구름이 자주 지나갔어요
빗물이 골을 파고
눈송이는 가벼이 배반하고
바람은 다독이는 척하지요
햇빛은 무서워요
쉬지 않고 째려보죠
모래알들이 그 눈길을 피해 도망 다녀요
길 건너 빌딩은 아무도 모르게 떨죠
버스 정류장 쪽 돌 틈에서는 담배꽁초가 새끼를 쳐요
화이트, 블랙, 히스패닉과 노랭이들이 구겨진 채
인류평화에 기여하죠
흘러내리는 것은 엎드리기도 하고
오르려는 것은 배꼽 인사를 하기도 하지만
비탈은 공평하죠
16도입니다
꼭대기는 평지를 부러워하고
평지는 꼭대기를 그리워하는데
비탈은 왜 비탈로만 있으려 할까요?
그래요 거기까지예요
당신이 더는 비탈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당신 눈이
내 얼굴을 좀 바라볼 수 있을까요?
사랑의 유통기한
이희석
너의 가슴에 있는 사과를 한 입 베어먹었다
그것은 하와가 손 뻗어 잡았던 처음
어제 식탁에는 사과가 두 개
오늘 접시에는 사과가 반 개
그제 야채실 구석에는 다 물러버린 사과가 한 개
주례사에서 T 선생은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되도록 살라고 했다
사과가 파 뿌리가 되는 일도 있을까?
요구르트 통에는 검은색 날짜가 찍혀있다
우리는 하루라도 더 먼 날짜를 집어 드는데
너의 몸에도 그런 숫자가 있는 걸까?
아니 내 몸 어딘가에 너의 유통기한이 새겨져 있는 걸까?
지금 물결이 이전의 물결이 아닌 것은 바다가 알리라
오늘 당도가 어제의 당도가 아닌 것은 사과가 알리라
우리에게 남은 사과는 무슨 색일까
푸른색일까? 붉은색일까?
철분으로 뒤덮인 녹슨 색일까?
사과가 다 떨어졌네......
신선실을 열며 너는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그것,
무엇이 다 먹은 걸까
---애지 사화집 김선옥 {꽃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