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귀하지 않은 환자는 없다
중앙일보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누구나 마음의 빚을 지고 산다. 타인의 배려에 응답 못 했던 불찰에 대한 자각이 일 때면 관계에 대한 부담은 쉬이 가시질 않는다. 사람 됨됨이에 대한 자기검열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의사로서의 지난 시간은 소중한 분들에게 받았던 과분한 은덕 속에 여물어 갔다. 보은에 대한 자세로 환자의 치료에 정진하고 사람의 체온이 있는 의사로서의 소명 있는 삶을 매진하겠다는 결기는 생존이라는 변명 속에 스멀스멀 해져간다. 살아내기 급급한 근시안적 삶의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럴 때면 마음의 빚은 잠시 뒤편에 내몰린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비약적인 현대의학 발전이 의사를 기술자로 변질시켜, 환자와 의사 관계를 건조한 ‘비인격적’ 관계로 전락시켰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20세기 들어, 눈이 부실 정도로 비약적 발전을 거듭한 의학기술은 인류의 오랜 질병을 퇴치함으로써 소중한 생명을 지키고, 인간 수명을 연장하는 일에 크게 이바지했다.
의학이 때때로 휴머니즘 훼손
손익계산 따지며 환자들 외면
라파엘클리닉의 특별한 진료
외국 노동자에도 따듯한 손길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그러하기에 의학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유효하고 유익한 학문이었으며 의사는 ‘휴머니스트’가 될 수 있었다. 의술이 시장경쟁에 노출된 지금의 의료 환경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되돌아가야 할 길이다. 인간의 체온이 내재된 생명과학으로서의 의학은 최근 들어 정체성 위기에 직면해 있다. 난치병 치료를 위한 비윤리적 연구가 횡행하고 있으며 의학의 이름으로 도용되는 반생명적 현상은 도처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져 일부 의사들의 환자에 대한 비윤리적 진료는 비즈니스의 영역으로 전락한 의술의 탐욕적 변질에 불과하다. 모두가 아닌 일부에서 벌어진 일일지언정 딱히 변명할 도리가 없다. 의학의 본령인 휴머니즘의 실종이다. 자조적이며 비관적일 순 있겠지만 어쩌면 오늘날 현대의학은 결국에는 자본의 기술이 지배할 것이며 이것은 결국 환자들의 의료비 상승과 비인격적 관계로의 고착화를 이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의학은 손익계산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인간존재의 가치여야 하는데도 말이다.
의학이 추구하는 방향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다. 환자를 질병 치료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일이 아닌 것이다. 소수의 생명을 도외시한 채 다수의 인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의학을 반윤리적 사고와 방식으로 도구화하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며 의학이 지닌 본래의 참된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다. 그러하기에 때론 경제학적으로 손해 보는 의학도 필요한 것이며 사회공동체가 그 손해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도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건강보험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사회적 논란이 불거진 어느 진보 논객의 “언제까지 외국인 노동자하고 70세 분들 먹여 살리는 데에 돈을 헛써야 되는가”라는 발언은 과연 맞는 것일까.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외국인 대상 무료진료소인 라파엘클리닉은 그렇지 않음을 강변한다. 치유의 천사로 전해지는 라파엘의 이름으로 클리닉은 매주 일요일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진료가 열린다. 한 회 평균 300명 이상의 외국인 환자를 진료한다. 지방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족, 북한이탈주민을 위해 지역으로 찾아가는 이동클리닉도 운영한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 우리나라 이주노동자의 건강을 돌보기 위한 라파엘클리닉을 각별히 여겼고 라파엘클리닉 창립 10주년 기념 미사는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미사였다. 선종 일주일 후, 통장에 남은 잔고 340만원이 라파엘클리닉으로 자동이체되어 남겨진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숙제를 안겨주었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나라는 과연 민주주의 국가일까. 선진국은 맞는 것일까. 어림잡아 추정되는 이주노동자가 120만 명을 훌쩍 넘은 지금, 우리는 아직도 이주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침탈하는 존재인지, 아니면 우리가 모두 기피하는 3D업종을 대체해 주는 존재인지 아직 사회적 합의조차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비용적 측면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라파엘클리닉에서 접한 이주 노동자들은 우리의 70, 80년대가 그러했듯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삶에 대한 열정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 사회 약자들에게 의학이 줄 선물은 무엇일까. 핵무기로 돌아온 북한에 무조건 퍼준 곳간이 아니라면 우리도 이제는 이주노동자에게 비용을 떠나 아픔을 돌봐줄 여유는 있는 나라가 되지 않았는가. 세상에 귀하지 않은 환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