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金鎬)는 효자 김극충(金克忠)의 부친(父親)이다.
《풍산김씨세보문헌록(豊山金氏世譜文獻錄, 소화 10년 (1935년)》에서 옮겼다.
<원문>
《郡守公諱鎬墓誌銘》
勝國時有諱文迪官判相事寔爲豐山金氏鼻祖七傳至奉翊大夫三司左尹諱安鼎是生諱子良前朝侍中是生諱從海即公高祖曾祖諱述山祖諱舜老成均生員 考諱元吉安邊教授妣密陽朴氏進士諱世蕃之女公諱鎬字應基自幼孝友甚至 及長受業于徐花潭門乙卯中司馬壬戌登第出宰累縣有循吏風橫城龍安三登 有去思碑癸巳出宰高陽明年罷歸終于忠州德面里第生以嘉靖五年丙戌七月 二十三日沒以萬曆二十二年甲午三月二十九日享年六十九初窆于槐山地萬 曆三十年壬寅移葬于利安堂峴下洪倉洞向午之原配青松沈氏參奉諱英之女 領議政諱溫之後生正德十六年辛巳歿後公九年即壬寅八月二十九日某月日 同祔焉有三男長克忠宣敎郎次克邦直長次克家司果宣敎郎生六男曰璫武主 簿曰璘武郡守曰璿通德郎曰珩武監察曰璜武宣傳曰瑨正郎直長生二女一男 曰瓚權震李海宗司果生一男二女曰瑜同知女金吉元贈參判金羽部將主簿生 一男時弼縣監郡守生一男時重通德生五女二男時稷武訓僉時鎰折衝監察生一男時柱判官宣傳生二女二男時挺時郁武判官正郎生一男二女時萬瓚生四男時大武宣傳時鳴時伯時厚同知生五男二女時佐同知時佑通德郎時輔時任 望今內外玄孫凡若干人於乎公歿之後于今百有餘年尙闕竁誌今玄孫重九適時宰昆陽昆陽磁器之品甲於吾東重九乃以書告於夏錫曰吾在郡時燔出先世墓誌云故不敢以文拙辭玆以謹誌時 崇禎紀元後再甲辰也
銘曰
卓爾其行 煥乎其文 位不稱德
州治之西 子坐之原 寔公幽宅
玄孫嘉善大夫行同知中樞府事夏錫謹撰
五代孫成均進士夢鼎謹書
<표점정리>
《郡守公諱鎬墓誌銘》
勝國時, 有諱文迪, 官判相事, 寔爲豐山金氏鼻祖. 七傳至奉翊大夫三司左尹諱安鼎, 是生諱子良, 前朝侍中, 是生諱從海, 即公高祖. 曾祖諱述山, 祖諱舜老, 成均生員, 考諱元吉, 安邊教授, 妣密陽朴氏, 進士諱世蕃之女. 公諱鎬, 字應基, 自幼孝友甚至. 及長, 受業于徐花潭門. 乙卯中司馬, 壬戌登第. 出宰累縣, 有循吏風, 橫城、龍安、三登, 有去思碑. 癸巳, 出宰高陽, 明年罷歸, 終于忠州德面里第. 生以嘉靖五年丙戌七月二十三日, 沒以萬曆二十二年甲午三月二十九日, 享年六十九. 初窆于槐山地, 萬曆三十年壬寅, 移葬于利安堂峴下洪倉洞向午之原. 配青松沈氏, 參奉諱英之女, 領議政諱溫之後. 生正德十六年辛巳, 歿後公九年即壬寅八月二十九日, 某月日同祔焉. 有三男: 長克忠, 宣敎郎; 次克邦, 直長; 次克家, 司果. 宣敎郎生六男: 曰璫, 武主簿; 曰璘, 武郡守; 曰璿, 通德郎; 曰珩, 武監察; 曰璜, 武宣傳; 曰瑨, 正郎. 直長生二女一男: 曰瓚, 權震、李海宗. 司果生一男二女: 曰瑜, 同知; 女金吉元, 贈參判; 金羽, 部將. 主簿生一男: 時弼, 縣監. 郡守生一男: 時重. 通德生五女二男: 時稷, 武訓僉; 時鎰, 折衝. 監察生一男: 時柱, 判官. 宣傳生二女二男: 時挺、時郁, 武. 判官正郎生一男二女: 時萬. 瓚生四男: 時大, 武宣傳; 時鳴; 時伯; 時厚. 同知生五男二女: 時佐, 同知; 時佑, 通德郎; 時輔; 時任. 望今內外玄孫凡若干人. 於乎! 公歿之後, 于今百有餘年, 尙闕竁誌. 今玄孫重九, 適時宰昆陽. 昆陽磁器之品, 甲於吾東, 重九乃以書告於夏錫曰: "吾在郡時, 燔出先世墓誌云." 故不敢以文拙辭, 玆以謹誌. 時崇禎紀元後再甲辰也.
銘曰: 卓爾其行, 煥乎其文. 位不稱德, 州治之西. 子坐之原, 寔公幽宅.
玄孫嘉善大夫行同知中樞府事夏錫謹撰.
五代孫成均進士夢鼎謹書.
<번역>
군수공 휘(諱) 호(鎬) 묘지명
고려 때에 휘 문적(文迪)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벼슬이 판상사(判相事)에 이르렀으며 이분이 바로 풍산 김씨의 비조(鼻祖)이시다. 7대를 내려와 봉익대부 삼사좌윤 휘 안정(安鼎)에 이르렀고, 이분이 시중(侍中)을 지낸 휘 자량(子良)을 낳았으며, 이분이 휘 종해(從海)를 낳았으니 곧 공의 고조부이시다.
증조부의 휘는 술산(述山)이고, 조부의 휘는 순로(舜老)로 성균생원이었으며, 아버지의 휘는 원길(元吉)로 안변 교수(安邊敎授)를 지냈다.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 朴氏)로 진사 휘 세번(世蕃)의 딸이다.
공의 휘는 호(鎬)이고, 자(字)는 응기(應基)이니, 어릴 때부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자라서는 화담 서경덕(徐花潭) 선생의 문하에서 학업을 받았다.
을묘년(1555년)에 사마시(진사/생원시)에 합격하고, 임술년(156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현의 수령으로 나아가 순리(循吏)의 풍모(有循吏風)가 있었으니, 횡성, 용안, 삼등에는 공을 그리워하는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순리(循吏)는 《사기(史記)》의 '순리열전(循吏列傳)'에서 유래한 용어로,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여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해준 벼슬아치를 칭송할 때 쓴다.
계사년(1593년)에 고양 군수로 나아갔다가 이듬해 파직되어 돌아와 충주 덕면리(德面里) 제택(第宅, 私家, 邸宅)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가정 5년 병술년(1526년) 7월 23일에 태어나, 만력 22년 갑오년(1594년) 3월 29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다.
처음에는 괴산(槐山) 땅에 묻혔다가, 만력 30년 임인년(1602년)에 이안(利安) 당현(堂峴, 당고개) 아래 홍창동(洪倉洞) 자좌오향(坐午向, 남향)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배위(配位, 부인)는 청송 심씨(靑松 沈氏)로 참봉 휘 영(英)의 딸이자 영의정 휘 온(溫)의 후손이다. 정덕 16년 신사년(1521년)에 태어나 공보다 9년 뒤인 임인년(1602년) 8월 29일에 세상을 떠나니, 모월 모일에 같은 묘역에 합장하였다.
슬하에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극충(克忠)으로 선교랑이고, 차남은 극방(克邦)으로 직장이며, 삼남은 극가(克家)로 사과이다.
선교랑(극충)은 6남을 두었으니, 당(璫)은 무과 주부,린(璘)은 무과 군수, 선(璿)은 통덕랑, 형(珩)은 무과 감찰, 황(璜)은 무과 선전관, 진(瑨)은 정랑이다.
직장(극방)은 2녀 1남을 두었으니, 아들은 찬(瓚)이고 딸들은 권진(權震), 이해종(李海宗)에게 시집갔다.
사과(극가)는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유(瑜)로 동지중추부사이고, 딸은 김길원(金吉元), 증 참판 김우(金羽) 부장에게 시집갔다.
주부(당)는 1남 시필(時弼, 현감)을 두었다. 군수(린)는 1남 시중(時重)을 두었다. 통덕랑(선)은 5녀 2남을 두었으니, 시직(時稷, 무과 훈련원 첨정), 시일(時鎰, 절충장군)이다. 감찰(형)은 1남 시주(時柱, 판관)를 두었다. 선전관(황)은 2녀 2남을 두었으니, 시정(時挺), 시욱(時郁, 무과)이다. 정랑(진)은 1남 2녀를 두었으니, 시만(時萬)이다.
찬(瓚)은 4남을 두었으니, 시대(時大, 무과 선전관), 시명(時鳴), 시백(時伯), 시후(時厚)이다.
동지(유)는 5남 2녀를 두었으니, 시좌(時佐, 동지), 시우(時佑, 통덕랑), 시보(時輔), 시임(時任)이다.
지금 바라보건대 내외 현손(玄孫, 4대손)이 무릇 몇 사람이 된다. 아! 공이 세상을 떠나신 지 이제 백여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묘지명(誌石)이 없었다.
이제 현손 중구(重九)가 마침 곤양(昆陽, 곤양은 지금 경남 泗川市 곤양면 일대를 말한다.) 수령으로 재직 중인데, 곤양은 도자기의 품질이 우리 동방(조선)에서 으뜸이다. 중구가 이에 편지를 보내 나(하석)에게 알리기를 "내가 고을에 있을 때 선대의 묘지석을 도자기로 구워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감히 글이 졸렬하다 핑계로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삼가 기록하노니, 때는 숭정(崇禎) 기원 후 두 번째 갑진년(1724년, 경종 4년)이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높도다 그 행실이여,
화려하도다 그 문장이여.
벼슬은 덕망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고을 관아 서쪽,
자좌오향(남향)의 언덕이
바로 공의 유택(幽宅)이로다.
현손 가선대부 행 동지중추부사 하석(夏錫)은 삼가 지음.
5대손 성균진사 몽정(夢鼎)은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