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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9.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수요일. - 사람이 진정 꽃보다 아름다운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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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9. 사순 제5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람이 진정 꽃보다 아름다운가?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전에 말씀드린 바 있어 제가 어떻게 강론을 준비하는지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새벽 강론을 올린 다음 바로 다음 날 독서와 복음을 읽고
하루 내내 독서와 복음을 가지고 묵상하고 다음 날 새벽 강론을 완성한다는 것을.
그래서 어제도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주제를 자유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출근하는데 어제 안 보이던 나무의 새순들이 보였고,
순간 ‘나무는 자유롭고 꽃은 자유로운가?’하는 묵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나무와 꽃은 자유롭지 않고 자유가 없다는 묵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나오고 싶을 때 나오고 싫으면 나오지 않을 수 있지만,
나무는 자기가 내고 싶을 때 새순을 낼 수 없고,
꽃은 자기가 피고 싶을 때 필 수 없으며,
사람이 머리를 물들이듯 꽃이 다른 색 꽃을 피울 수 없잖아요?
정해진 때에 피고,
정해진 모습을 핍니다.
그대로 피지 않으면 그것이 자유라고 하지 않고 돌연변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샛노란 개나리와 수선화꽃이.
야리야리 연보라 진달래꽃이.
귀부인 목련꽃은 어떻습니까?
그런데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습니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아름다운 머리를 괴상하게 물들이기도 하지만
비구니의 머리처럼 파르라니 삭발할 수도 있지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옷으로 숨기려 했지만
요한처럼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을 수도 있고,
회개하는 사람들처럼 회색 옷을 입을 수도 있지요.
꽃은 자연의 이치에 순종하여 아름답지만
사람은 죄지을 자유로 사랑하니 아름답습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것도 아름답지만
자유로 사랑하는 것도 아름답다는 말이고,
자유로 진리에 순종하고 자유로 사랑까지
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 더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진리 안에서 자유롭고
사랑 안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다니엘서의 세 청년이 바로 그런 존재들입니다.
뜨거운 불가마도 그들을 가두거나 억누를 수 없었고,
불가마 안에서 주님과 자유로이 거닐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주님 안에 머물면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롭고
사랑으로 더 자유로운 우리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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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9.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이는 이미 믿는 이들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알려주시며, 당신의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깨달을 것이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넘어서, 나아가 그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에로의 초대임가 동시에 진리에로 그리고 자유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이에 응답의 첫걸음은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지탄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요한 8,37)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할 수 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말한 대로,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말씀이신 그분께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그분 영의 수액을 받아먹듯이 그분의 생명을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지 상대 안에 머무르는 단순한 머무름이 아니라 역동적인 상호교환, 곧 서로에게 건너가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extasis와 kenosis)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이는 본질적으로 서로 향하여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향하여 있으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무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머무르는 자리요, 궁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같은 복음서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요한 16,13)
그렇습니다. 말씀과 우리가 이렇게 상호내주하면 진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진리이신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말씀이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고”(요한 8,34), 진리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진리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주님!
제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가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제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되게 하소서!
당신은 진리이오니,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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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9.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자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주기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그분의 사랑을 안다면 그냥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갈라2,20) 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않았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17,21.)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 이제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여 주님과 하나 되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도 수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되새기며 실행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2-3)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여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 그리고 그 세력이 가져온 죽음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경청하고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살아야 합니다. 실천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랑의 메시지인 성경,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성경대로 사는 사람과 성경을 공부만 하는 사람의 차이는 실로 엄청납니다”(요하네스 타울러).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야고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넌 내 마음 몰라. 좋으면서 싫은 척하는 내 마음 몰라. 떨리면서 떨리지 않는 척하는 내 마음 몰라. 겉으로는 차가운 척하면서 속으로는 온통 열병을 앓고 있는 내 마음 몰라.”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나를 아는 분은 누굴까? 참새 마음은 참새가 알고, 비둘기 마음은 비둘기가 안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속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저를 알고, 저도 주님을 압니다.’하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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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9.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73년에 캐나다로 이민 오신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50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치 한편의 영화와 같았습니다. 어르신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 있는데 지금의 배우자를 만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배우자를 따라서 천주교를 만난 것이라고 합니다. 삶의 고비에 하느님께서는 늘 새로운 길을 마련해 주셨다고 합니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면서 자녀들을 잘 키웠습니다. 바이올린을 하는 딸은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했습니다. 첼로를 하는 딸은 예일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토론토 대학을 졸업한 아들은 의사가 되었습니다. 의사가 된 아들은 아프리카로 가서 의료 봉사를 하였습니다. 딸들도 자신들의 재능을 나누었습니다. 자녀들이 모두 자리를 잡았고, 이제 노년의 삶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르신은 또 다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것은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르신은 11년째 병원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병원봉사의 주된 업무는 수술을 앞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수술 전에 아이들은 전날 금식을 하기에 당일에는 배고파서 운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아이들이 울면 함께 울면서 아이들을 달래준다고 합니다. 그 일을 11년 째 하면서 이제 아이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의 청년들은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리라 믿지만 설사 불가마에서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전에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열심히 일 했으니 즐겨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광고를 기점으로 해외여행이 늘어났습니다. 이 광고를 기점으로 휴가를 즐기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낯선 땅에서 공부했던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이국땅에서 삶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도 이스라엘 젊은이들을 아꼈습니다. 이제 그들 앞에는 ‘꽃길’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청년들은 새로운 선택을 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겠다고 합니다. 40년 동안 열심히 일한 어르신이 충분히 노년을 즐길 수 있었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도 매년 ‘성사전담사제’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은퇴라고 했고, 작년까지는 원로사목자라고 했는데 올해부터 성사전담사제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청년들이 꽃길 대신에 하느님의 영광을 선택하였듯이, 어르신이 꽃길 대신에 봉사의 길을 선택하였듯이, 성사전담사제가 되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길을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진리는 열심히 일했으니 자유롭게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는 성공과 명예 그리고 권력이라는 바벨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창고에 보물을 가득 쌓아놓고 기뻐하던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굶주리고, 지금 헐벗고, 지금 가난하고, 지금 갇혀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이스라엘의 청년들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불가속이라도 기꺼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진리는 40년 동안 열심히 일한 후에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병원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기력이 다할 때까지 성사전담사제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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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9.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꼰대 패션 탈출법’이라는 이상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패션은 ‘꼰대’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다. 패션은 자유이지만, 꼰대의 성향상 ‘내가 편하다’는 이유로 시간과 장소에 맞지 않는 스타일을 고수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유행에 뒤처진 헐렁한 슈트도 모자라, 와이셔츠 안에 메리야스를 받쳐 입고 하얀 양말까지 고수한다면 꼰대일 확률이 높다. 신발이 안 보일 정도로 길이가 긴 바지를 선호한다거나 청바지, 면바지 등 캐쥬얼 차림에도 정장 구두를 매치해야 직성이 풀린다면 100% 꼰대다. 자신의 체형보다 큰 크기의 옷을 선호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글에 따르면 저는 확실히 ‘꼰대’였습니다. 그냥 저 편한 대로 입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누구에게 특별히 잘 보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제 맘이 가는 대로 특히 편한 복장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와이셔츠(끌러지 셔츠) 안에 메리아스는 반드시 입어야 하고, 청바지, 면바지 등 캐쥬얼 차림에도 정장 구두를 신기도 하고, 제 체형보다 큰 크기의 옷을 선호합니다.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꼰대 패션 탈출법’에 의하면 저는 분명히 ‘꼰대’였습니다.
솔직히 패션은 자유라면서도 다른 이의 패션을 평가하는 것이 더 ‘꼰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나이 많은 사람이 꼰대일 것으로 판단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변의 다양한 비판에 귀를 닫거나, 개성이라는 이유로 자기 기준만 맞다고 생각하면 다 꼰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부모의 말을 꼰대 같다면서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 자녀 역시 꼰대입니다. 꼰대를 싫어한다면서도 자신이 꼰대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유다인이 주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자기 기준에서 벗어난다면서 틀렸다고 하고, 자기들을 비판한다면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꼰대’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 주님의 참 제자가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통해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죄의 종이 될 뿐입니다(요한 8,32 참조).
주님의 뜻이 때로는 우리에게 커다란 걸림돌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주님의 뜻을 바라보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꼰대’에서 벗어나 주님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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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 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하세요. 이것이 바로 현재 제가 사는 방식이랍니다(오프라 윈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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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9.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유의 여정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로, 그리스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정치인, 여행가로 널리 알려진 ‘니코스 카찬차키스(1883-1957)’의 묘비명입니다. 그의 ‘영혼의 자서전’은 제가 평생 애독하는 책입니다.
“자유를 향한 머나 먼 여정”
최초로 남아프리카의 대통령을 역임했던 위대한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의 자서전으로 고 김대중 대통령이 번역했고, 역시 얼마전 감동깊게 읽었던 책입니다. 자유입니다. 인간은 자유입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이며 자유로워야 비로서 인간입니다. 참으로 자유로울 때 행복합니다. 과연 참으로 자유롭습니까? 역시 우리 삶은 ‘자유의 여정’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이 “자유의 여정-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말마디가 가슴을 떨리게 합니다.
불암산 기슭 수도원에서 만35년 정주의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자유롭고 행복한가?” 자문한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자유가 없다면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예전 신자분과 주고 받은 대화가 생각납니다.
“여기 수도원이 천국입니다. 행복하시겠습니다.”
“자연환경이 좋아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주님과의 관계가, 형제들과의 관계가 전혀 무관한 남남의 불편한 관계라면 거기가 지옥일 것입니다. 날로 주님과의 우정, 형제들과의 우정이 깊어져 자유로울 때 거기가 천국입니다.”
또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여기 수도원의 늘 단조로운 일상에서 무슨 맛으로, 무슨 재미로, 무슨 기쁨으로 삽니까?”
“하느님 맛, 기도 맛, 말씀 맛으로 삽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진리를 깨달아 주님을 아는 맛으로 삽니다.”
지금 물어도 똑같은 대답일 것입니다. 참으로 기도와 말씀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때 늘 새 하늘과 새 땅, 새날의 자유로운 삶입니다. 끊임없이 바꿔야 할 것은 외적환경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마음이 늘 새로우면 늘 새롭고 놀랍고 좋고 자유로운 만남일 수 있습니다. 이런 자유의 내적 여정의 삶일 때 행복한 정주의 삶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과의 관계가 날로 깊어지는 예닮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일 때 내적으로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이런 자유는 다음 고백에서 처럼 순전히 선물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을 만나니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이런 참된 자유가 선물임은 오늘 복음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 두 대목이 참 은혜롭습니다 참자유의 소재를 밝힙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말씀이자 진리이신 예수님과의 깊은 친교와 더불어 날로 자유로워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자유의 여정은 진리 탐구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진리이신 예수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자유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날마다의 제 강론 쓰기입니다. 참으로 깨달음을 통해 자유롭기위해, 살기위해,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날마다 쓰는 강론이요, 살아 있는 그날까지 "미사드리는 것", “걷는 것”, “강론 쓰는 것” 셋만이 제 유일한 소망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이신 영원한 도반 예수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우정관계가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런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을 통해 참으로 서로를 알아감이 없이는 참자유는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평생을 살아도 이런 진리이신 아드님을 만나지 못해 무지와 허무, 세상의 종이 되어 참자유의 맛도 누리지 못하고 산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망하겠는지요? 주님의 진리 맛, 말씀 맛이 아니곤 영혼의 목마름, 배고픔은 결코 해결되지 못할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을 만날 때, 주님과 함께 할 때 참으로 자유로운 삶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다니엘서의 불가마 속에서 열렬히 하느님께 찬미를 바치는 세 청년이 이의 모범입니다. 불타는 화덕속에서도 열렬히 하느님을 찬미하는 모습이 그대로 진리로 자유로워진 공동체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 다니엘서는 세 청년의 아름다운 찬미가가 많이 생략되었습니다만 우리 수도자들은 주일이나 축일 때는 이 세 청년이 바친 찬미가를 아침성무일도시 바칩니다. 이 세 청년처럼 모두를 찬미로 바꿀 때 운명도 바뀌고 참으로 자유로운 삶입니다.
“내 아픔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내 병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내 절망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내 불행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내 시련과 고통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찬미로 바칠 대상은 끝이 없습니다. 찬미에 기겁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사탄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하면 사탄은 멀리 달아납니다. 새삼 우리가 평생 날마다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공동체 형제들을 자유롭게 하는데 얼마나 결정적 도움을 주는지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찬미의 훈련, 자유의 훈련 시간이 공동전례기도 시간입니다.
제1독서 다니엘서의 불가마 속에는 세 청년만 있었던게 아니라 주님의 천사도 있었듯이, 주님께서도 늘 우리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함께 하시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십니다.
바로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 기도 은총이 불가마 연옥같은 세상에서, 공동체에서 크게 다치지 않고 자유롭게 살게 합니다. 마침내 네부카드네르 임금도 세 청년을 불가마 속에서 살려내신 하느님께 찬미의 고백을 바칩니다. 불가마 속의 이스라엘 세 청년이야 말로 찬미공동체의 모범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내셨다.”
찬미와 감사의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주님의 종들입니다. 날마다의 주님의 이 거룩한 찬미와 감사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곤경에서 구해 내시어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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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9.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특히 늦게 얻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봉헌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아브라함에게 ‘신앙의 선조’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사악이 아브라함에게 재물로 드릴 양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 것이란다.
이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끝까지 하느님 아버지를 의지하는 모습, 그분이 아니면 아무도 우리를 이 고난에서 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모습. 이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이며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어찌 내 아버지를 믿지 않느냐. 어찌 아브라함을 믿고 있느냐. 아브라함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신앙의 대상은 오직 한 분 나의 아버지이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신앙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명예입니까. 돈입니까. 그도 아니면 무엇입니까?
정말 하느님 한 분이십니까? 혹은 하느님과 비견될 다른 신앙의 대상을 지니고 계신 것은 아닌가요?
우리가 우리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신앙의 대상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신앙의 길을 걷다 보면 무수한 위기와 고난을 맞이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버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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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세라세라
케세라세라는 스페인어로
‘어떻게든 잘 될 거야.’라는 긍정적 의미입니다.
지금은 조금 어려워도
앞으로는 잘 될 거야.
지금은 힘들어도
앞으로는 잘 될 거야.
지금은 매우 아파도
앞으로는 잘 될 거야.
지금,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고통, 아픔 때문에
한숨짓는 모든 분에게 하고픈 말입니다.
케세라세라
케세라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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