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속의 고사성어 -57
소병조성(燒餠造星)
[요약] (燒: 불 땔 소. 餠: 떡 병. 造: 만들 조. 星:별 성)호떡으로 별을 만든다는 말로, 엉뚱한 핑계를 대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행위를 이름. 독립운동가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선생의 일화에서 연유함.
[문헌] 한국인(韓國人)의 지혜(智慧). 백과사전 등
[내용]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1850~1927)선생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호(季皜), 호는 월남(月南). 아버지는 이희택(李羲宅)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1864년(고종 1) 강릉 유씨(江陵劉氏)와 결혼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후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불리던 사람들은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학무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다섯 사람이었다.일본은 무장한 병사들을 궁궐로 데리고 들어와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고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외교권은 물론 내정까지 관장하였다. 이처럼 한일 병탄(倂呑) 중이던 1920년대,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1850~1927)선생은 시국강연회를 열었다.
장내는 청중으로 가득 차 있고, 연단 옆에는 일본 경찰이 칼을 짚고 앉아 감시하고 있었다. 조선인의 강연회에는 으레 일본의 고등계 형사가 지켜보고 있게 마련이었다.
월남은 연단에 올라 큰기침을 한 후 연설을 시작했다.
“내가 조금 전에 보았던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내가 이곳으로 오는데 골목에서 호떡 한 개를 가지고 두 아이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중학생이고, 다른 한 아이는 소학교 학생 같았는데, 소학교 학생이 가진 호떡을 중학생이 예쁜 별로 만들어 주겠다면서 빼앗아 (燒餠造星)조금씩 먹기 시작합디다. 소학생이 울면서 앙탈을 하니까 이번에는 달떡을 만들어 주겠다면서 살살 꼬여 결국 그 호떡 한 개를 다 먹어버리니, 소학생은 억울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구 울기만 합니다.”
월남의 이야기가 이에 이르자, 청중들은 벌서 그 이야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여기서 호떡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이고, 소학생은 우리나라 사람, 중학생은 일본인을 비유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있던 일본인 경찰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뒤늦게야 깨닫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연설을 중지시켰다. 결국 그날의 강연은 계속하지 못하고 그것으로 끝나버렸지만,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말처럼 월남은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듯을 그 짧은 이야기로 충분히 전했던 것이다.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선생의 기지(奇智)넘치는 독설(毒舌)를 보자.
월남(月南)선생이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그때 10여 년간 모시던 박정양(朴定陽; 1841∼1904=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내각총리대신 등을 지내면서 온건중립파로서 진보적인 개화사상을 가지고 이상재(李商在) 등 개화파 인사들을 지원하였음)이 1894년 갑오개혁 후에 내무독판(內務督辦)이 되자 그의 추천으로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이 되었다. 이어 학무국장(學務局長)을 맡으면서 젊은이들에게 바른 교육을 시키고, 민족자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무얼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됐다. 이후에 전개되는 그의 후반생을 보면 그것은 독립운동가로서 전범을 보여, 올곧은 삶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것임을 알게 한다.
당시 선생은 고종(高宗)을 직접 뵐 기회가 있었는데, 외세에 빌붙어 매관매직을 일삼던 김홍육(金鴻陸= 조선 후기의 역관(譯官). 아관파천 때 고종과 베베르 사이의 통역을 맡았음. 고종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리다가, 러시아와의 통상에서 거액을 착복하여 유배되었는데, 떠나기 직전 고종을 독살하려는 사건을 일으켜 유배지에서 잡혀와 사형됨) 일파가 고종에게 보자기에 싼 뇌물을 바친 것을 보았다.
선생은 “상감 계신 방이 왜 이리 추운가.”라고 일갈한 뒤 서슴없이 그 뇌물을 보자기째 난로에 넣어 태워버렸다. 그러고는 통곡하며 왕 앞에 엎드려 대죄(待罪)를 했다. 그러나 고종은 도리어 눈물을 지으며 이상재 선생의 손목을 잡아주었다.
통감부 시대에 어느 좌석에서 매국노 이완용(李完用)과 송병준(宋秉畯) 등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선생은 비위가 뒤틀려 두 매국노에게 쏘아붙였다.
“대감들도 어서 동경으로 이사 가시오.”
이 말에 이완용과 송병준은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영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오?”
하고 반문하니까 이상재 선생은
“대감들은 나라 망치는데 천재가 아니오? 그러니까 대감들이 동경으로 가면
일본도 망할게 아니겠소.”
선생이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동경에 갔을 때, 병기창을 시찰하였다. 그날 저녁에 환영회석상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병기창을 보았더니, 무수한 대포며 갖가지 총기가 있어 과연 일본이 세계의 강국임을 알았소. 다만, 성서에 이르기를
‘칼로 일어 선 자는 칼로서 망한다.’ 하였으니 그것이 걱정이오.”
우쓰노미아(宇都宮)란 일본군 사령관이 한국의 명사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푸는데 월남도 YMCA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우쓰노미야 사령관이 한 참 으스대며 일본의 병력과 무기를 한창 자랑하다가 기침을 콜록이며 엄살을 부렸다.
“감기에 걸려 여러분에게 실례가 많았습니다.”
월남선생이 그 말을 받아 한 마디 받아쳤다.
“아니 그 감기는 대포로도 쏘아 죽이지 못한단 말이요?”
이 말에 온 좌중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거리가 된 우쓰노미야는 화를 낼 수도 없고 얼굴을 붉히며 쓴 웃음만 지었다.
서울 종로 2가에 있는 YMCA회관에서는 강연회가 자주 열렸고 그 때마다 일본 경찰이 끼어들어 감시를 하였다.한 번은 명사 초청강연이 있어서 월남선생이 사회를 보는데 역시 군중 속에 일본 형사들이 여기 저기 박혀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월남선생은 먼 산을 바라보듯이 둘러보며 한 마디를 했다.
“어허, 철도 아닌데 개나리가 만발했군...”장내 청중들은 월남의 눈길을 따라보며 폭소를 터트렸다.그 당시 속된 말로 일본 형사를 '개(견)'라 했고, 경찰을 일러‘나으리’라고 비아냥한 말이었기 때문이다.그야말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비수같은 일침이 아닐 수 없었다.
구한말 판사였던 변영만(卞榮晩, 卞鼎相의 長子)이 젊을 때에 월남선생에게 인사를 하고 헤어져 가는데 뒤에서 누가“변정상씨! 변정상씨!”라고 부르는 것이다.
변영만은'우리 아버지와 같은 이름이 또 있는가?' 의아하여 뒤 돌아 봤더니 월남선생이 히죽이 웃으며 보는 것이다.
변영만은 월남선생에게 다가가서
“어르신 농(弄)이 지나치지 않으세요?”라고 항의를 하니까 월남 선생이
“이놈아! 네가 변정상의 씨가 아니면 어느 놈의 씨란 말이냐?”라며 크게 웃는 것이었다.
변영만도 할 말은 잃고 실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사까노미야(朝香宮)라는 일본 皇族이 서울에 온다는 날, 일본 순사가 일장기를 걸라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다가 月南선생 댁으로 왔다.
“국기를 왜 않 다시우? 어서 다시우.”
月南 선생이 순사에게 물었다.
“국기를 왜 달라고 하는 거유?”
“아사카노미야 전하가 오늘 오신다는 것을 모르오?”그 말이 떨어지자
月南선생은 화들짝 놀라며 집 안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얘들아! 어서 대문간 쓸고 돗자리라도 펴라. 우리 집에 오늘 OO전하가 오신단다.”
월남선생은 1927년 2월에는 이념을 초월해 민족적 단결을 목표로 하는 민족단일 전선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선생은 이미 고령과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있었으나, 이를 수락했다. 이것이 그가 지도자를 찾는 당시 민중들을 위해 사회운동가로서 마지막으로 복무한 직임이었다. 그는 다음 달인 3월 29일 숨을 거뒀다. 4월7일 그를 추모하는 장례가 처음으로 ‘사회장’이라는 이름 하에 경성(서울)에서 치러졌다. 당시 경성 인구는 30만 명 정도로 추산됐는데, 그의 사회장에 운집한 추모객은 10만 명을 헤아렸다. 그는 충남 한산의 선영(先塋)에 안장되었다가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경기도 양주군 장흥명 삼하리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하 [네이버 지식백과] 이상재 [李商在] (두산백과)
이상재(李商在);
본관 한산(韓山). 호 월남(月南). 본명 계호(季皓). 충청남도 서천(舒川)에서 출생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서울에서 박정양(朴定陽)과 사귀어 l0여 년 간 그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다가, 1881년 그가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갈 때 그의 수행원이 되어 도일(渡日), 동행하였던 홍영식(洪英植)·김옥균(金玉均) 등과 깊이 사귀었다. 1884년 우정국 총판(郵政局總辦)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였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이듬해 사신 일행과 함께 귀국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독판(內務督辦)이 되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이 되었고, 이어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로 학무국장(學務局長)을 겸임하면서 신교육령(新敎育令)을 반포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지내고, 1896년 국어학교 교장·내각총서(內閣總書) 및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총무국장이 되었다. 서재필(徐載弼)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고, 1898년 독립협회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10일 후 석방되어 의정부 총무국장을 사임하였다. 1902년 개혁당(改革黨)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참찬(參贊)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 준비차 내밀히 한규설(韓圭卨)·이상설(李相卨)의 집을 왕래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후 석방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을 겸임하던 중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교섭을 받았으나 참가를 거부하였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회장이 되어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연합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 후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少年聯合斥候隊: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이듬해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와 기타자료로 엮음)
첫댓글 소병조성(燒餠造星), 호떡으로 별을 만든다는 말로,
엉뚱한 핑계를 대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행위를 이름.
독립운동가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선생의 일화에서 연유함.
소학교 학생이 가진 호떡을 중학생이 예쁜 별로 만들어 주겠다면서 빼앗아
(燒餠造星)조금씩 먹기 시작합디다. 감명 깊게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남강월남도산은 가히 천재라 말할 수 있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