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글은 몇 년 전부터 반재경 전도사님이 작성한 글로, 매년 교정 및 첨삭하여 올리고 있습니다. ]
'안식'은 믿는 자들이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계시이자 은혜의 복음에 있어서는 가장 기초가 되는 계시인데 짧은 지면을 통해 얼마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안식함으로....^^)
(히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안식"이란 것은 일이 다 끝났을 때 하는 것입니다. 잠시 쉬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이 다 마무리되어 쉬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재판이 끝났다든지, 계약이 마무리되었다든지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완성의 의미까지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잠시 쉬는 것이 아님을 아시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안식"은 다 이루어진 것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것이 영어로는 "It is finished!"인데, '마무리가 되었다, 완성이 되었다'라는 뜻으로 이렇게 완성되었기에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여러분께 이렇게 글을 쓸 때 뭔가를 짜낸다면 그건 저의 일입니다. 그러나 제 안에 이미 주신 계시를 풀어내는 것은 안식으로부터 나오는 일입니다. 두 가지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안식에 들어가는가?
(히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 "힘쓸지니"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어로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내 일을 쉬는 게 안식인데, 다른 것은 다 내 일을 쉬어도 안식에 들어가는 것에 있어서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 쪽에서 해야 할 '일'은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도 약간 모호하죠?
안식은 이미 된 것을 볼 때,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됐으니 이제 안식할 일만 남았지요. 그러면 다들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이제 아무것도 안 해요?"
아니요. 뭔가 하긴 합니다. 다만, 승리하기 위해 싸우느냐, 승리했기 때문에 싸우느냐, 이 차이입니다. 미래로부터 사는 법에서 제가 자세히 설명한 개념입니다.
이런 개념(진리)은 구약에도 종종 나옵니다. 그중에 안식을 위해 너무나 중요한 "바라보기"에 대한 것을 나누겠습니다.
여호수아는 승리하기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미 승리한 것을 봤기 때문에 여리고를 7번 돌고 소리를 꽥! 지르는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싸웠습니다.
(수 6:1)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 여리고는 엄청나게 견고한 진이며, 현재 굳게 닫혀서 들어가고 나가고 하는 사람이 없는 상태입니다.
(수 6: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립니까? 방금 여리고는 굳게 닫혀있다고 했는데, 여호와께서는 이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까지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었으니(과거형) 그것을 '보라'고 합니다.
이쯤 되면 또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됐다더니 안 됐네."
하나님과 우리의 이러한 시각의 격차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1절은 아직 여리고가 여호수아의 손에 들어온 상태가 아닌데도 여호와께서는 이미 주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영적인 영역과 물리적인 영역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시간에 대한 개념 차이로 볼 수도 있습니다. 즉, 영적인 영역에서는 이미 여호수아에게 주어졌으나 물리적인 영역에서는 아직 표출되지 않은, 즉 나타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에 제한받지 않으시고 카이로스라는 그분의 시간 속에 계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의 개념이 의미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은 이미 주셨는데 그것을 말씀하실 때 아주 특별한 명령을 하십니다. 바로 (이미 된 것을) "보라!"입니다.
우리의 물리적 눈으로 보라는 뜻이 아니겠지요. 물리적인 눈으로 본 상황은 암담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이미 네 손에 넘겨준 모습을. 이 부분이 엄청난 계시입니다.
그리고 3절부터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여호수아는 정말 이상한 방법으로 여리고 성을 차지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왜요? 이미 자기 손에 들어 온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변화될까요?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주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골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주님의 영광을 바라봐야 하는데, 그 영광은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즉, 주님과 우리는 하나로 연합되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모습이 바로 나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언제 그렇게 변화됩니까? 나의 진짜 모습인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도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이미 소유했지만 바라볼 때 표출됩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애써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을 때 그 모습이 현실 세계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예로 들어보죠.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가 상처가 있다는 것은 자기를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자아상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상처가 있는 것인데, 그런 경우, 내적 치유는 내 노력으로 되느냐? 아니지요. 내적 치유도 이미 된 것을 보아야 합니다. 즉 나는 주님과 한 영이라는 복음을 들었으니 이미 주님과 하나인 나의 모습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미 된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것입니다. 이미 더함 없는 사랑을 받는 내 모습을 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이미 되었으니)이며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다들 안 느껴진다고 불평합니다. 우리는 믿는 자들이지, 느끼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자 O, 감자 X, 여기서 '감'은 느낄 감) 이미 된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것이 안식입니다. 그리고 이 안식은 노동입니다.
(히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labour, 노동할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미 더함 없이 사랑받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도 표출이 됩니다. 이미 됐으니 이제 표출될 일만 남은 것이죠. 표출될 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이미 이루어졌고 우리의 믿음(이 경우 바라봄)을 통해 나타날 일만 남은 것입니다.
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교회의 회복과 부흥이 저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 엄청난 중압감에 괴롭습니다. 내가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스러운수고입니다. 영어로는 toil(토일)... 그러나 믿는 자는 이미 된 것을 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말씀에 증거 구절이 있어야겠지요. 내가 혼자 흠모하는 이성이 내 배우자가 되는 모습을 아무리 그려 본다고 한들,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니라 스토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상대방의 자유의지도 중요하니까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 이 정도는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가끔 또 엉뚱한 소리를 하시는 분들이 없지 않아 이런 것까지 언급하네요.
성경은 마지막 대 부흥을 여러 곳에서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교회 부흥은 하나님의 시각으론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합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거기로부터 나와서 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미 된 일이니 어려울 이유가 없지요.
또 저는 저의 부르심을 반드시 성취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취될 것 같지 않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성취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안식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수고지요. 내 부르심이 이미 성취된 것을 봐야 합니다. 이것도 말씀이 증거하느냐?
네, 합니다.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good)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저의 소원은 대한민국 회복과 한국교회 부흥인데 그 소원이 저에게서 나왔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일이라고 확신하며, 빌립보서 1장 6절이 예수의 날에 이루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미 이루어진 그날로부터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이미 된 것을 보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이미 됐다"라는 소식이 복음이며, 이미 된 것을 아는 것이 안식이며, 이미 된 것이 현실 세계에 표출되려면 이미 된 것을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그것이 말씀에 합당하다면, 여러분의 필요가 이미 된 것을 보십시오! 저도 열심히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