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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 1만 리 한반도 길
북간도 손님맞이...
강원도 속초항을 출항한. 여객선은 다음 날 오전 10시경 러시아 자루비노항에 도착한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입국장을 빠져나오자
여객선 회사에서 제공되는 10여 대 버스가 길게 줄을서 대기하고 있다.
대부분 버스에는 한글이 그대로 붙어 있고 대구 협성고등학교 스쿨버스도 한 대 보인다. 참 반갑다. 한국에서
노후화된 차량이 이곳으로 수출되고 차량에 한글이 그대로 붙어 있어야 이곳에서 차량의 가치가 높다고 한다.
한류가 여기까지 미치고 있다.
자루비노항은 국제항구지만 한국의 60년대 작은 어촌 수준이다
먼지를 일으키며 출발한 버스는 30여 분 지나 작은 국경마을이 나오고
차가 저속으로 지나고 있다... 이때 버스를 기다리고 있듯 러시아 남녀들이 먼지를 일으키는 차를 따라오며 담배 한 개비 달라며 손짓을
보낸다.
다들 술에 취해 있는 듯 눈에 초점이 없다. 자포자기한 모습들..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 무너지고 러시아의 현재 모습이다. 이제 국제사회서는 영원한 강자도 약자도 없다.
60년대 당시 미군 차가 지나면 기부 미 건빵 시가레트 하던 시절이 우리 한국에서도 있었다.
이곳에서 30여 분 지나자 국경 검문소다. 바리케이드 앞에 차가 멈춰 서자 러시아 국경 수비대 군인이 A K 소총을 거꾸로 메고
차에 올라선다.
70년대 우리나라 방위병을 보 듯. 빛바랜 얼룩무늬 군복에 삐딱이 눌러쓴 얼룩 모자와. 천으로 된 군화까지...
모든 게 흡사하다. 다른 건 눈이 노랗고 키가 클 뿐이다. 맨 뒤쪽에 와 손을 내밀며. 담배 하나 달라고 한다.
승객 한 사람이 피던 담배 반 갑 정도를 건네자 바로 앞으로 가더니 경례를 부치고 차에서 내리자 바로바리케이드가 올라간다.
참 편한 국경 통과다.
잠시 후 이제 러시아 국경 세관이다. 짐을 들고 차에서 내려야 한다. 출국 심사대를 거쳐 수속을 마치고 다시 짐을 들고 차에 오른다,
러시아에 입국해 한 시간 만에 출국심사를 마치고 중국으로 입국한다..
중국 장영자 세관 입국 수속이 러시아에 비해 많이 빠르고. 중국 세관원들의 눈빛이 러시아 세관원들과 사뭇 다르다.
빠른 수속을 마치고 입국장에 들어서자 조선족 친구가 손을 흔들며 반긴다. 조선족 친구로 1년 여 만이다.
같이 마중 나온 동생을 인사시킨다. 동생은 이 지역 현직 검사다. 동생의 관용차인 듯 검은 리무진에
기사로 보이는 젊은 친구가 짐을 받아 트렁크에 싣고 곧바로 출발한다.
차량 통행이 거의 없고 시멘트로 된 도로길을 시원하게 달린다. 간혹 우마차가 스친다
감회가 새롭다.
1년 전 SBS 새천년 추석맞이 특집 프로 그램에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재외 동포들을 상대로 생활수기
공모전이 있었다
당시 이 친구 부인이 현지 삶의 스토리와 함께 부모님의 이 주기등을 공모해 대상을 받았다. 시상식 참석차 SBS 초청으로
부부가 함께 대한민국 서울에 왔고 시상식이 끝나고 부부가 함께 대구 팔공산 내 집을 찾았다
100여 년 전 선조들이 이곳으로 이주할 당시 챙겨 간 족보 갑인보라는 것을 들고 왔다.
100여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갑인보를 들고 경주에 사무실을 둔 경주 최 씨 족보 편찬위원회를 찾아가 자문을 얻었다.
16대 할아버지가 연산군 시절 도승지를 지낸 것도 알 수 있었고 후손들은 지금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데 남쪽에는 청송 부남에
집성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부남으로 가 뿌리의 고향도 찾았다. , 다음 날 대구에서 경찰관의 도움으로 가까운 친인척들을 만나 재회도 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좋은 교훈을 나는 새삼 얻었다.
내 집에 머물던 3일간의 이야기다. 동대구역을 떠날 때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히던 때가 엊그제 같다.
차량 통행이 거의 없고 인적도 없다. 벌판에 확뚤린 시멘트 도로를 시원하게 달린다. 국경도시 첫 검문소다.
차가 멈추자 공안이 다가와 경례를 부치더니 바로 바리케이드가 올라간다. 중국 여행길에서 이런 특혜도 처음이다.
훈춘 시가지에 접어들자 단고기집, 골과. 진달래 밥집, 양고기 요릿집, 산적 집, 얼음보숭이 등
도로변 상가 간판에 한글 상호들이 다 정겹다. 도로에 차량은 몇 대 보이지 않고. 자전거 인력거가 넘치며
사람들 모습이 다 활기가 넘친다
러시아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북한에서 외화 벌이로 운영하는 금강산 식당 앞에서 차가 멈춘다.
12시가 넘었는데 식당 앞 분위기는 한산하다. 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 노래가
흘러나온다. 우측 한편에 평양 미녀들이 색동저고리 한복을 차려입고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다.
또 다른 평양 미녀들이 식탁으로 안내한다.
텅 빈 30여 평의 식당 내부에는 우리 일행 셋뿐이다.
저녁 시간에 영업하는 식당으로 보이는데 특별히 예약한 것으로 보인다, 40도가 넘는 들쭉술이 먼저 올라온다.
맥주잔에 부어 건배한다.
따라 마시기가 벅차다 평양 요리가 나오고 식사 내내 평양 미녀들의 라이브가 이어진다.
평양요리 맛이 아주 일품이며
평양미녀들의 라이브가 명창이다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요 노래가 흘러나오고 평양 미녀들의 배웅을 받으며 식당 문을 나선다
동생과 차를 먼저 보내고 자전거 인력거를 한번 타보라며 택시 잡듯 2대를 불러 세운다. 한대식 나눠 타고
이 친구가 앞에서 안내하는데 참 재미있는 운행 수단이다. 사통 팔통 조망권이 확보돼 있어 아주 좋다
요금은 시가지 어디던 1원이며 우리 돈 130원 정도다.
잠시 후 아파트 정문을 지나 통로 입구에서 자전거 인력거가 멈춰 선다. 5층 아파트로 외부는 우리와 별 차이가 없다;
훈춘시에 몇 안 되는 아파트라고 한다, 3층으로 올라가 아파트 내부로 들어선다.
내부 구조도 우리와 별다를 게 없고 우리 식 30여 평 정도인데 특이한 점은 오픈된 베란다가 없고 창문이 다 작다
작은방 한편에 짐을 풀고 나오자 식탁에 술상을 차려 놓았는데 술은 40도 넘는 러시아산 보드카다. 잔을 몇 잔 나누다
무역 차 북한 나진 선봉을 매일 다닌다는 친구에게 전화를 넣는다. 한국 친구 조금 전 도착했다 좋은 걸로 많이 갖고 오라고 한다.
영덕 대게를 말하는 같다. 청송 부남을 다녀올 때 영덕 강구항에 들러 대게 안주로 반주를 곁들였는데 당시 대게값에 놀라워했다.
북한 나진 선봉 경제특구는 중국 훈춘시와 두만강을 국경으로 마주하고 있고 이곳에서 왕복 두 시간이면 내왕이 가능하다,
이곳과 아주 가깝다,
다섯 시가 넘자 동생이 다시 찾아왔다.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에 저녁 식사가 준비가 돼 있다며 출발을 재촉한다.
도심 시가지를 벗어나자 냇가를 따라 요철이 심한 시멘트 포장길인데 다른 차량은 거의 볼 수 없다. 시냇물이 흐르는
냇가를 따라 20여 분 지나자 우측 산기슭 아래 오밀조밀 20여 호 남짓 작은 마을이 나온다.
마을 어귀에 황구들이 반기고 토닭들이 흩어져 모이를 찾고. 냇가에는 염소와 소들이 방목돼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우리가 산업화 과정에서 다 잃어버린 고향 산천 풍경 그대로다
냇가 한편에 차가 멈추고 한 집으로 들어서자 마당에서 사람들이 반긴다.
주택 내부로 들어서자 15평 정도의 온돌방 원룸 형태다. 사람들이 가득하다, 20 명은 넘을 것 같다. 불 지피는 아궁이와 주방이
내부에 다 들어 있고. 한편에서 인절미를 고물에 무치는 모습이 참 정겹다.
모두가 음식 장만에 분주한데 부친이 내손을 꼭 잡는다.
덕분에 이제 여한이 없다며 어릴 적 부모 품에 안겨 와 차디찬 이곳에 와 자랐다고 한다 6~70년대 중국 문화혁명 당시 일반가정에서 족보가
발견되면
바로 즉결처형되던 시절인데 조상을 버릴 수 없어 족보를 마루 밑 땅속 깊이 묻어두고 마음 졸인 이야기, 얼마 전 대구 친인척들이 이곳에 와 같이
지내며 백두산을 다녀간 이야기 등을 들려준다.
오늘 내가 온다고 해 4남매 자식과 손자 등 대가족이 다 모였다며 놓은 손을 몇 번이나 다시 잡는다.
정을 나누는 이들에게 애잔함이 묻어나고. 고향을 그리는 망향의 한이 아직껏 뼛속 깊이 남아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인절미가 나오고 토닭 요리도 나온다.
고물에 무친 콩나물 잡채. 묵판. 등 어릴 적 잔치 때나 볼 수 있던 낮 익은 음식들로,
진수성찬이다 상다리가 부러진다는 말이 이때 필요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갖은양념을 바른 잉어과 밀물 고기가 통재로 상에 올라온다.. 두자가 넘을 것 같다. 고기 머리 방향에 내가 앉을 것을 권하며
상이 다 차려져도 누구 한 사람 수저를 들지 않는다. 고기 머리 앞에 앉은 오늘의 손님이 고기 한 점을 들어야 다 함께 수저를
든다고 한다. 조선의 전통음식과 중국 풍습이 더해 북간도 지역 최고의 손님 접대 풍습으로 보인다
머리 부분 고기를 한 점 들자 박수를 치며 모두 함께 수저를 든다. 내가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과분한 대접이다.
밖에서 경적소리가 울린다, 북한 나진항을 다녀온 친구가 도착했다고 한다 같이 밖을 나가자
작은 화물차 적재함에 아이들 목욕하는 정도의 큰 고무물통이 실려 있는데 올라와 보라고 한다 영덕 대게가 맞는지??...
차에 올라가 안을 들여다보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솟 뚜껑만 한 대게 20여 마리가 물이 가득한 고무통 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때깔도 영덕 대게보다 한층 더 좋다. 대륙의 통 큰 기질을 엿볼 수 있는 이들의 문화다.
대게가 올라오고 술잔이 돌아간다. 요즈음 북한 사정은 어떠세요?? 말도 마시라요 사는 게 아니라 지옥이라며. 나진항은 경제특구라
그나마 매일 장마당이 열리는데 오늘 장판에서 앙상한 아낙이 퍼져 앉아 울고 있어 사연을 물었는데.
몸이 아픈 딸아이 약구입을 위해 갓 태어난 강아지 3마리를 봇짐에 싸 짊어지고 새벽부터 100리 넘게 걸어 오후에 겨우
장마당에 도착해 봇짐을 풀었는데 강아지가 모두 죽어 있었다며.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라며 죽고 싶은데
딸아이가 불쌍해 죽지도 못하겠다며 다시 울더라 같이 눈물이니 따라 울었다.
국수 한 그릇 사 먹이고 옥수수라도 몇 대박 사 가라며 인민폐 50원을 건네고 오는데 지금도 마음이 무겁다고 한다.
오는 길에서는 또 젊은 아낙이 어린아이를 노끈으로 묶어 앞에서 끌고 가는데 차가 지나자 손을 내밀더라
중국 상인들 차가 지나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손을 내미는 이들이 내왕 길 내내 부담이 돼 요즘은 강냉이 빵
몇 박스 싣고 가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준다고 한다. 북녘의 비참한 현실들 듣고 있는 내내 마음이 무겁다.
이들도 같은 동포애로 애잔한 정을 나누고 있다
어르신 과분한 대접받고 갑니다. 인민폐 몇 장을 두 분 게 드리자 뿌리치기에 두 분 손에 꼭 쥐어주고 차에 오른다.
백두산 잘 댕겨 오라며 돌아갈 때 꼭 다시 들리라고 한다. 네 잘 다녀오겠습니다, 12시 무렵 아파트에 도착해
잠을 청하지만 장마당에 앙상한 아낙의 강아지 사건이 머리에 스치며 혼란스럽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너무 미세한 존재로 느끼는 밤이다.
다음 날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자 식탁에 밥상을 차려 놓고 통째로 올라온 대게와 북어 콩나물국 등 보드카도 함께 놓여 있다
식사를 하며 독주가 맥주잔에 부어진다. 추운 지방의 음주 습관이라지만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오늘 백두산 전진도시 연길시로 가야 한다.
딱 한 잔 하겠다.
이때 인터폰 소리에 나진항에서 대게를 갖고 온 친구가 들어온다.
잘 오셨습니다. 부담을 털고 가야 홀가분할 것 같다.
이곳에 쌀 한 가마니 얼마나 하나 1kg에 3원이라고 한다
2.500원을 내놓으며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1킬로 3원이면 이곳에서 쌀 열 가마니 넘게 구입할 수 있는 돈입니다. 이 돈으로
전부 쌀을 구입하세요 그리고 10kg씩 나눠 포대에 담아 준비하세요 다음 나진항에 들어갈 때 강넹이 빵 대신 싣고 가세요 도로를 지나는
인민들
아이 어른 구분 없이 보는 대로 한 포식 나눠 주십시오 믿고 드립니다, 친구분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부탁합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제가 편한 마음으로 다녀올 것 같습니다
감사한 마음이라며 남쪽에서 온 친구분의 따뜻한 동포애까지 전달하겠다며 마지막 잔으로 건배한다. 이제 연길시로
가야 할 시간이다. 현관 앞에 택시가 대기하고 있다.
돌아오는 날 또 거나하게 한잔하자며 잘 다녀오라는 이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한다.
조선의 풍습과 넉넉한 정이 넘치는 북간도 조선족 동포사회
내 생애 잊을 수 없는 대접을 받았다,.
팔공산 자락에서...
이 정 우
백두산과 1만 리 한반도 둘레길 어느 구간이던 정보 지원 하겠습니다.
현지정보 및 교통 숙박 숙식등 상세한 정보 나누겠습니다
모두가 함께 하길 기대합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걸으면 우리길이 된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 승리한다
이정우 E_mail : kdjj80@hanmail.net
손전화 : 010 9477 8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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