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44/김성동서당]사물의 개념을 잡아주는 320자
‘언젠가는 제대로 읽어봐야지’ 하며 사둔 책을 발견하는 것은 나의 큰 즐거움이다. 그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김성동서당』(청년사 2005년 5월 펴냄, 각 180여쪽, 각권 9800원) 1, 2권이 그렇다. 발행연도를 보니 2005년, 17년 전인데, 이제야 보다니? 해도 너무 했다. 지금은 틀림없이 절판絶版되었을 터, 운이 좋다면 알라딘중고서점 등에서 구할 수 있을까. 김성동은 『만다라』를 쓴 소설가인데, 한문과 우리말과 글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만다라’는 영화로도 히트를 쳤는데, 환속 스님의 운수행보雲水行步 내용이었던 것같다. 최근엔 『국수』라는 화제의 소설을 쓴 것으로 기억한다.
한자 320자만 알면 사물의 이치와 개념을 확연히 알 수 있다는 『김성동서당』은 어떤 책인가? 예전에 한자漢字를 진서眞書라 했다. 진서 320자, 꼭 알아야할 글자들이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5대조도 아닌 6대조 할아버지(순조때 당상관 무신)가 직접 320자(흔히 천자문의 1000자가 아니다)를 골라 해서로 쓴 책자로 네댓 살 때 배웠다는 것이다. 당연히 5대조, 고조부, 증조부, 조부와 부친도 이 책자로 한자를 배웠을 것은 불문가지. ‘어섯눈을 뜨다’는 말을 아시는가? 사물의 대강을 이해하여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작가가 풀어내는 320자만 알게 되면, 우리가 날마다 마주치는 사물들의 이름과 여러 가지 현상의 개념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난 이상, 몇 십년을 살든 최소한 어섯눈은 뜨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청맹과니는 안될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해 쉽게 풀어쓴 기초한자집이라고 해도 되겠다. 성인을 위한 책이 아니라고 무시해서는 절대 안될 일이다. 어른들이 동화를 읽어서 나쁠 까닭이 있겠는가. 문제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순수성을 잃어가는 게 아니겠는가. 오히려 어섯눈을 뜨는 데는 이런 책이 훨씬 더 나을 수도 있겠다싶다.
어느새 한자와 한문문맹자가 되어버린 우리는 뜻글자(표의문자)인 한자와 한문을 모름으로써 아주 중요한 것을 잊거나 잃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종종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른이라도 이 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살 것인가’‘사람의 도리는 무엇인가’등 인성人性을 기르게 하는데 “딱”인 책이다. 6대조 할아버지도 후손들이 올바른 인성으로 ‘한 세상’을 살아가라는 뜻으로 320자를 골랐으리라. 작가를 비롯한 작가의 선조들도 어릴 적부터 이 책자로 ‘공부법’을 배웠으리라. 5대이면 최소 150년,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졌을 책자, 할아버지들의 숨결이 바로 들리거나 사랑스런 손길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하여, 6대조 할아버지가 쓴 그 글씨를 그대로 스캔하여 책에 실었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안 사실 하나만 적시하겠다. 지금 사람들은 사람 수를 셀 때 “한 명, 두 명……”또는 그냥 “하나, 둘, 셋……”이라고 하지만,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한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예전 사람들은 “한이, 둘이, 서이, 너이, 다섯이, 여섯이, 일곱이, 여덜이, 아홉이, 열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도 옛날 어른들이 이렇게 세는 것을 어릴 적에 들었다. 참 다행한 일이다. 여기에서 ‘이’는 ‘그이’ ‘저이’ ‘이이’처럼 ‘사람’을 나타내는 높임말이다. 인본사상(사람이 먼저다.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의 밑바탕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의 머리말은, 50여년 전 장죽長竹으로 놋재떨이를 두드리며 320자를 가르쳐주시던 할아버지의 말이 상기도 귀청을 두들긴다며 “배우고 익히면 군자가 되구, 배우지 않은즉 소인이 되는 법, 아무리 아름다운 옥이래도 다듬지 않구서는 그릇을 맹글 수 읎듯이, 사람으루서 배우지 않는다면 의義를 알지 뭇허너니…… 배운 사람은 논에 베(벼)와 같구 배우지 않은 사람은 피와 같은 법이니……”라고 끝을 맺는다. 아무리 인공지능시대라고 해도 베와 피를 구별하지 못하면 되겠는가?
하여, 그 320자를 한지에 졸필이지만 몽땅 써 벽에 붙여놓았다. 제법 그럴 듯하다. 참 취미도 가지가지다. 이런 일을 하며 되작되작 나 혼자 깊어가는 가을에, 익어가고 있다. 흐흐..
권말부록인 <우리말 사전>이 또 인상적이다. 가멸지다: 살림살이가 넉넉하다, 갑션무지개: 쌍무지개, 고갱이: 핵심, 고빗사위: 가장 종요로운 고비에서 아슬아슬한 순간, 능갈맞다: 얄밉도록 몹시 능청맞다, 띠앗머리: 동기간에 사이좋게 지내는 것, 뱀뱀이책: 교양서, 벼리: 일이나 글에서 뼈대가 되는 줄거리. 대강大綱, 부림짐승: 가축, 손곧춤: 합장, 숨탄 것: 모든 동물. 하늘과 땅한테서 숨이 불어넣어졌으므로, 쓰개질: 없는 일을 거짓으로 꾸며서 남을 못된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는 짓. 무함. 알음알이: 지식, 애젖하다: 가슴이 미어지게 안타깝다, 물몬: 사물事物, 얄보드레하다: 속이 환히 들여다보일 만큼 얇고 보드랍다, 야로: 남한테 숨기고 우물쭈물하는 속셈이나 수작. 흑막, 웅숭깊다: 도량(마음, 그릇, 틀, 생각)이 넓고 크다, 일떠서다: 기운차게 일어서다, 저저금: 저마다, 제가끔, 따로따로, 종요로운: 중요한, 짯짯이: 빈틈없이 꼼꼼하게, 채신없이: 말과 몸가짐이 가벼워 남을 대할 때 낯이 없이. 경솔하게, 톺다: 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다, 풀잎사람: 여느 사람, 서민, 백성, 민초民草. 한허리: 중심, 헤살질: 남의 일을 짓궂게 훼방하는 짓, 활찌다: 드넓게 펼치어져 있다, 한갓지다: 아늑하고 조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