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雞林歷史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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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역사기행 후기방 천년 대도호부의 역사와 위상을 품은 관아건축 ㅡ 강릉 임영관 삼문
浮雲 추천 0 조회 7 26.10.24 05:00 댓글 3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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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6.10.24 06:03

    첫댓글 강릉 임영관 삼문(江陵 臨瀛館 三門)은 고려 시대에 건립된 강릉대도호부 관아 객사(임영관)의 정문으로, 국보로 지정된 대한민국 고건축의 대표적 유산이다. 과거 '강릉 객사문'으로 불리다가 명칭이 환원되었다.

  • 작성자 26.10.24 06:03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목조건축물 중 유일한 관아/객사 관련 건축물이자 문(門) 건축으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등과 함께 고려시대 목조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 데 핵심적인 가치를 지닌다.

  • 작성자 26.10.24 06:04

    임영관은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처음 창건된 지방 관아 객사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객사의 주요 전각들이 대부분 훼철되고 강릉경찰서 및 학교 등이 들어섰으나, 이 삼문만은 원형을 유지하며 자리를 지켜냈고 이후 주변 관아지가 복원되었다.

  • 작성자 26.10.24 06:05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다.
    ​정면 3칸 모두에 커다란 널판문(판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도록 한 문간채 형식이다.
    ​서까래 구조가 그대로 노출되어 개방감과 조형미를 보여주는 연등천장 구조이다.

  • 작성자 26.10.24 06:06

    기둥의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고 위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배흘림(엔타시스)이 매우 확연하여, 착시 현상을 막고 뛰어난 시각적 안정감을 준다.

  • 작성자 26.10.24 06:08

    언뜻보면 배흘림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바로 그 느낌이 배흘림(엔타시스) 수법이 노리는 핵심적인 시각적 착시 교정 효과이다.

  • 작성자 26.10.24 06:09

    배흘림의 원리는 "원래 직선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곡선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의 눈은 높고 기다란 수직 기둥을 바라볼 때, 착시 현상 때문에 기둥의 가운데 부분이 오히려 안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것처럼(착시/착목 현상) 느끼게 된다.

  • 작성자 26.10.24 06:10

    만약 기둥을 위아래 두께가 똑같은 완전한 직선 원통으로 가공하면, 실제로 볼 때는 가운데가 잘록하게 파인 것처럼 보여 수량적으로 불안정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이를 보정하기 위해 기둥 높이의 3분의 1 지점을 일부러 배가 부르도록 오목하게 부풀려(배흘림) 가공한다.
    ​그 결과, 멀리서나 밑에서 전체를 올려다보았을 때 기둥이 오목해 보이지 않고 비로소 '바르고 매끈하게 쭉 뻗은 수직 기둥'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 작성자 26.10.24 06:11

    측면이나 밑에서 비스듬히 올려다볼 때, 배흘림을 과하게 의식하지 않으면 그저 "아주 곧고 듬직하게 서 있는 안정적인 기둥"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선을 기둥의 윤곽선(에지)에 두고 수직선과 비교해 보면, 기둥의 중앙부(약 1/3 지점)가 살짝 볼록하고 상단부로 갈수록 좁아지는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작성자 26.10.24 06:12

    ​"배흘림이 적용되었지만 과하게 티 나지 않고 그저 정갈하고 곧게 보인다"는 것은 고려시대 목수들이 착시 효과를 완벽하게 계산하여 기둥을 정교하게 다듬었다는 방증이다. 눈을 속여 가장 안정적인 착시 교정을 이끌어내는 고건축의 미학이 그대로 증명되는 셈이다.

  • 작성자 26.10.24 06:13

    임영관 삼문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그 자리를 지켜낸 만큼, 조선 시대의 지방 지리지와 일제강점기 학술 조사 기록, 그리고 현대의 해체·보수 공사 기록(묵서명) 등에 그 역사적 흔적이 다양하게 남아 있다.

  • 작성자 26.10.24 06:15

    ​강릉의 역사와 풍속, 관아 건물을 기록한 대표적 향토 지리지인 《임영지(臨瀛誌)》에는 임영관의 전체적인 규모와 함께 삼문의 존재가 명확히 수록되어 있다.
    "본부(本府) 객사로 임영관을 창건하였으니 태조 19년(936년)의 일이다. 전대청 9칸, 중대청 12칸, 동대청 13칸, 낭청방 6칸, 서헌 6칸, 월랑 31칸, 삼문(三門) 6칸이었다."

  • 작성자 26.10.24 06:15

    이 기록을 통해 당시 객사 단지 전체가 80여 칸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으며, 그 제일 앞단을 '삼문 6칸(정면 3칸, 측면 2칸)'의 체제로 호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작성자 26.10.24 06:16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복주(안동)까지 피난을 갔던 공민왕이 개경으로 복귀하던 중 강릉에 머물렀던 사실은 《고려사(高麗史)》 등에 기록되어 있다.
    ​지역 전승과 고문헌 기록에 따르면, 공민왕이 이때 강릉에 머물며 직접 '臨瀛館(임영관)'이라는 3자의 필적을 하사했고, 이 현판이 삼문 문루 상단에 걸리게 되면서 삼문은 단순한 문을 넘어 왕실의 권위와 은혜를 상징하는 문으로 위상이 격상되었다.

  • 작성자 26.10.24 06:17

    조선 시대 문헌 및 강릉부 기록에 따르면, 인조 5년(1627년) 임영관 대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 몇 차례 큰 불과 중수 작업이 있었다.
    ​객사의 전대청과 중대청 등 내부 전각들은 조선 중·후기(1718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다시 지어졌지만, 삼문은 화마를 피해 고려 말 조선 초의 골격을 유지하거나 최소한의 보수만으로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다.

  • 작성자 26.10.24 06:18

    1910~1930년대 일제에 의해 작성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와 고적 조사 보고서에는 임영관 삼문의 당시 사진과 수치 측정 기록이 세밀하게 남아 있다.
    ​당대의 사진을 보면 객사 내부 전각들이 강릉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개조되거나 철거되는 와중에도, 삼문은 학교의 담장 및 정문 역할을 하며 배흘림기둥과 판문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진 자료들은 해방 후 삼문이 국보로 지정되고 관아지를 복원하는 데 핵심적인 학술적 근거가 되었다.

  • 작성자 26.10.24 06:19

    2000년대 초반 진행된 임영관 삼문 해체·보수 공사 과정에서 지붕 가구 부재 및 상량 부위에서 조선 시대 보수 내력을 적어놓은 묵서(墨書, 먹으로 쓴 글씨)와 흔적들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영조, 정조 대 등 조선 후기에도 수차례 지붕 기와를 고치고(번와) 일부 부재를 보강하면서 고려시대 고건축의 뼈대를 훼손하지 않고 정성껏 유지해 왔음이 실증적으로 증명되었다.

  • 작성자 26.10.24 09:11

    지방 관아의 문간채에 불과한 임영관 삼문조차 정교한 주심포와 웅장한 배흘림으로 당당한 기품을 자랑하는데, 상국(上國)을 자임하고 황제국의 위용을 갖추었던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의 왕궁과 도성 건축이 얼마나 거대하고 화려했을지 상상해 보면 매우 흥미롭운 감흥이 일어난다.

  • 작성자 26.10.24 09:14

    개경의 왕궁(만월대)과 도시 전경을 직접 눈으로 본 인물이 남긴 매우 상세한 생생한 문헌 기록과 현대의 발굴 자료가 전해지고 있다.
    최선의 1차 사료인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1123년(인종 1년), 송나라 인종의 사절단으로 개경에 1개월간 머물렀던 서긍(徐兢)이 고려의 제도, 풍속, 궁궐, 건축 등을 세밀하게 기록하여 송나라 황제에게 바친 보고서다.
    서긍의 눈에 비친 개경 왕궁(만월대)의 모습은 조선의 경복궁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웅장함과 장려함을 보여준다.

  • 작성자 26.10.24 09:15

    ​조선 경복궁이 평지에 유교적 예제에 맞춰 일직선 배치(축선 구조)를 이룬 것과 달리, 고려 개경 왕궁은 송악산 기슭의 자연 지세를 따라 단을 높여가며 높다란 석축(축대)을 쌓고 건물을 올린 다단식 입체 구조였다.
    ​"궁궐의 제도가 산을 따라 높고 낮게 세워졌으므로 기단과 축대가 겹겹이 우뚝하여 그 모습이 매우 웅장하다."

  • 작성자 26.10.24 09:17

    ​왕궁의 으뜸 정전인 회경전(會慶殿)에 이르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거대한 문과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회경전은 궁궐의 정전으로, 그 기단(회경전대)의 높이가 무려 5장(丈, 약 15m)에 달한다. 동쪽과 서쪽의 계단(섬돌)은 붉은 칠을 하였고, 난간에는 청동으로 만든 꽃 장식(銅花)을 입혀 장식이 화려하다."
    높이 15m에 달하는 까마득한 돌축대 위에 거대한 정전이 올려져 있어,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의 중압감과 장엄함은 수평적인 조선 궁궐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 작성자 26.10.24 09:18

    "지붕 용마루는 꿩이 날개를 편 듯 잇닿아 있고, 기와는 청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져 빛난다."
    ​발굴 조사 결과 실제로 만월대 터에서는 청자 기와(청기와)와 용머리·봉황 모양의 대형 장식 기와(취두·잡상), 청동 장식 부재들이 대량 출토되었다. 기둥에는 검붉은 옻칠을 하고 문과 난간에는 동판과 금빛 장식을 도금하여 햇빛을 받으면 궁궐 전체가 찬란하게 빛났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 작성자 26.10.24 09:19

    고려는 본궐(만월대) 외에도 국왕의 거처나 정국 상황에 따라 수창궁(壽昌宮)과 연경궁(延慶宮) 등 수많은 별궁을 개경 안에 운용했다. 이 중 수창궁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즉위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14세기 충선왕 대 및 공민왕 대의 기록을 보면, 궁궐 일부를 중수할 때 "단번에 410여 칸의 전각을 고쳐 지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전체 전각의 집적도와 수많은 다층 누각(위봉루, 승평문 이중루 등)의 규모가 상당했다.

  • 작성자 26.10.24 09:20

    오늘날 개성에 남아있는 만월대 궁궐터는 건물 목조 부재는 홍건적의 침입(1361년) 때 모두 불타 없어졌으나, 건물을 받치고 있던 거대한 돌축대(회경전대)와 계단은 그대로 남아 있다.
    ​높이가 아파트 4~5층 높이에 달하는 웅장한 돌축대와 탁 트인 송악산의 경관을 보면, 그 위에 올려졌을 삼문(三門) 스타일의 거대한 대문들과 주심포 양식의 장대한 목조건축군이 얼마나 압도적이었을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 작성자 26.10.24 09:21

    임영관 삼문에서 느껴지는 그 당당하고 굵은 배흘림기둥과 단아하면서도 힘 있는 주심포 공포가 개경 성내에 솟아있던 수십, 수백 채의 궁궐 누각과 대전(大殿)들에 그대로 확장되어 적용되었다고 상상해 보면, 고려 건축이 가졌던 특유의 호쾌하고 화려한 '황제국 스타일'의 미의식을 그려볼 수 있다.

  • 26.10.24 09:40

  • 작성자 26.10.24 09:46

    공민왕 친필 '臨瀛館(임영관)' 현판 사진을 다시 확인해 보니 감회가 더욱 새롭다. 글씨의 세부적인 멋을 살펴보면 공민왕 필적의 당당함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 작성자 26.10.24 09:47

    첫 글자인 '臨' 자는 왼쪽 신하 신(臣) 자 부위와 오른쪽 부재가 어우러지며, 붓끝을 매섭게 내리꽂고 거침없이 휘두른 행서의 자유로움과 힘이 넘친다.

  • 작성자 26.10.24 09:48

    가장 복잡한 글자인 '바다 영(瀛)' 자는 삼수변(氵)과 오른쪽 부재의 강약 조절이 일품이다.
    ​붓을 멈추고 굴리는 운필의 획이 뭉개지지 않고, 흰 바탕 위에 검은 먹의 획이 매우 명확하게 뻗어 있어 왕실 글씨 특유의 품격이 잘 살아있다.

  • 작성자 26.10.24 09:48

    마지막 '집 관(館)' 자는 밥 식(飮/食) 변과 官(벼슬 관) 자의 조화가 균형감 있게 짜여 있어 현판 전체의 마무리를 든든하게 받쳐준다.

  • 작성자 26.10.24 09:49

    바탕판이 여러 장의 나무 판재를 이어 붙인 모습과 고풍스러운 먹 향이 느껴지는 필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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