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권세에서 예수님의 나라로!(콜로 1,13)
2사무 5,1-3; 콜로 1,12-20; 루카 23,35-43
그리스도왕 대축일; 2022.11.20.; 이기우 신부
1. 그리스도왕께서 심판하신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로서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한 해의 전례력 중에서 고유시기는 대림과 성탄, 사순과 부활시기로 나뉘어 예수님의 일생을 관상하도록 하는 한편, 이어지는 연중시기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도록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바와 일치합니다. 그런데 하나가 빠져 있습니다. 심판입니다. 사도신경의 순서대로라면, 부활대축일과 승천대축일 다음에는 성령강림대축일 전에 심판대축일이 와야 합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그 날이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전례는 장차 맞이할 죽음의 날과 온 세상이 완성될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잣대로 우리 개인들과 온 세상이 심판을 받고 상이나 벌을 받게 될 운명을 상기시켜 줍니다.
2. 심판을 준비하는 마음
교회는 연중시기의 마지막 달을 위령성월로 선포하면서, 우리들 각자의 죽음도 준비하도록 가르칩니다. 죽음만큼 하느님의 뜻이 공평하고 정확하게 나타나는 생애의 순간도 없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두 번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죽을 때를 미리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늘 죽음을 의식하며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이 생애의 남은 인생을 정성껏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죽음이나 심판은 벌이 아니며 사람 누구나에게 공평하고 엄정하게 주어지는 인생의 절차일 뿐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봉사하며 죽어가는 임종순간을 오랫동안 관찰해 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죽어가는 모습은 살아온 세월의 거울이다.” 하느님 앞에서 평소에 조심스레 살아오면서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온 이들은 죽음조차도 마치 더 좋은 세상으로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자신의 임종을 준비하는가 하면,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살았거나 이기심과 욕심에 따라 살아온 이들은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인데, 스위스 출신으로 미국에서 정신과 의사 겸 심리학자로서 임종하는 환자들을 수십 년 동안 관찰한 퀴블러-로스는 이 과정을 다섯 단계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것은 부정하고 분노하며 협상하다가 우울한 단계를 지나 마지막으로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었습니다.
3. 단계별 특징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선고받으면 그 충격으로 인하여 제일 먼저 보이는 반응은 그 상황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일반적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하기가 어렵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현실이 인지되면, 그 다음에는 “왜 하필 내가? 왜 하필 지금?” 등의 분노어린 질문을 던진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죽음이 임박했다는 상황을 인지하고 분노의 감정도 표출할 만큼 표출한 다음에는 죽음의 순간을 미루려는 절박한 협상의지가 나타나고 회개가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상도 막연하고 도무지 성립될 수도 없는 이 협상이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면 극심한 우울증 증세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당사자는 지내온 인생을 돌아보며 아쉬움과 후회를 표출한다는데, 이 단계에서 감정의 바닥을 치고 나서야 다음 단계가 온다고 합니다. 우울증 증세가 지나가고 아쉬움과 후회의 감정에 지치면,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싹이 틉니다. 이때가 병자성사를 받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병자성사는 이제껏 살아온 생애를 정리하게 해 주고 남은 생애를 하느님 안에서 봉헌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하게 해 주는 성사입니다. 세례성사로 시작된 우리의 영적인 몸이 드디어 완성되는 고유한 은총이 병자성사에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병자성사를 두려워하고 마냥 미루다가 아무런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지경에서 서둘러 치룹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4. 어둠의 권세에서 예수님의 나라로
성무일도의 끝기도에는 이러한 기도로 마치게 되어 있습니다: “전능하신 천주여,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즉, 평소의 잠자리를 작은 임종으로 간주하여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미리 연습하며 준비시키는 기도입니다. 교우 여러분, 죽음은 벌이 아닙니다. 그리고 미룬다고 미룰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생애 동안에 중요한 일은 모두 다 미리미리 준비하고 때로는 학습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인생의 가장 큰 삶의 순간인데, 죽음도 미리 준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죽음이 무엇인지, 죽음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가르치셨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이 그 해답입니다: “형제 여러분,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기를 빕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사는 동안에 목표로 삼아 노력했지만 늘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던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완전하고 확실하게 누리는 은총입니다.
5. 심판은 부활의 관문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는 아홉 달 동안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이 진화해 온 과정을 압축하여 겪습니다. 이것이 “개체의 발생은 종의 진화를 반복하는” 현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체와 의식을 진화시켜온 인류가 예수님의 강생으로 영성 진화 단계로 도약할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 각자도 똑같은 기회를 세례성사를 기점으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이미 2천 년 전부터 영성의 진화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지만 영성 진화로 견인되지 못한 의식은 진화가 아니라 퇴화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인간 개개인도 예수님을 하느님을 맞이하지 않고 영성을 진화시키지 못하면 결국 심판을 받은 후에 영원한 죽음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이 열어젖히신 영성 진화 단계로 도약하면 우리는 살아서도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사는 부활을 살 수 있는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지금 여기서 이미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바로 기쁜 소식의 요체입니다. 그래서 복음이요 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현세에서 화려하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영성의 진화 단계로 도약하기를 거절한 채로 이 심판을 거치면 그 생명은 영원한 죽음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오로가 콜로새 공동체의 교우들과 우리들에게 전해 주는 복음입니다.
6. 이제와 항상 영원히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공생활 중에 사도로 양성하시던 열두 제자에게도 심판의 역할을 부여하신 바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루카 22,28-30). 이 말씀은 그 동안 당신을 따라다니며 고생한 제자들에게 보상을 약속하시며 하신 말씀임을 생각하면, 그 심판의 사명이 얼마나 귀하고 막중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엄중한 사명을 위임받은 교회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시대의 징표를 식별해야 할 책임을 부여받고 있으며 또한 공권력과 공적인 책임을 수행한 이들에 대한 심판까지도 부여받고 있습니다. 법적인 식별이나 심판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식별과 심판입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관찰해 보면 어마어마한 악이 현실 권력의 힘을 틀어쥐고 온통 어지럽히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주권자로서 이러한 현실을 충분히 내다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현 집권당과 그 당의 후보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겨우 0.47%라는 근소한 차이라고는 하지만, 생각 없이 투표하는 유권자들을 이기지 못할 만큼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주권자들이 저들보다 적었고 그럴 만큼 유대가 야무지지 못했던 책임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는 사회의 공동선을 위하여 여와 야,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가려주어야 할 언론이 ‘기레기’니 ‘기더니’니 ‘언창’이니 하는 모욕적인 호칭으로 불릴 만큼 쓰레기가 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언론인들의 책임을 묻습니다. ‘기레기’란 기자+쓰레기의 준말로서 세월호 참사 이후 독자들이 붙여준 이름이요, ‘기더기’란 기자+구더기의 준말로서 박근혜 탄핵 이후에도 여전한 그들에게 국민이 붙여준 이름이며, ‘언창’이란 언론+창녀의 준말로서 현 시국에서도 더 한심하고 악착같이 기승을 부리는 그들에게 뜻있는 독자들이 수여한 이름입니다.
정당이나 언론은 사회 현실을 주도하는 듯 싶지만, 또 실제로 그네들은 그럴 의지를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정당은 주권자들이 선택하는 정치적 머슴이요, 언론은 독자와 시청자들이 소비하는 미디어 상품을 만드는 생산자입니다. 그 이상이 아닙니다. 사회 현실을 이끌어서 주도할 책임과 권한은 주권자이면서 소비자인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도 올바른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현재에서든 최후의 순간에서든 심판이 수행하는 기능은 현실의 더 나은 선택을 기대하는 데 있습니다. 이제와 항상 영원히 심판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더 나은 현실을 앞당길 수 있도록 깨어있는 의식으로 의롭게 연대하며 거룩하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왕께서 심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