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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 초기 여성 사역의 개척자들로 불리는 하디 부인, 애니 엘러스, 에비슨 부인 등의 말년 모습(왼쪽부터)으로
사진은 1930년대 초반 촬영됐다. 이용민 박사 제공
자기 나름대로의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저 멀리 떨어져 있었던 어떤 특별한 현장으로부터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낯선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한번 가보자! 그렇게 왔던 조선이었다.
이 현장으로부터의 목소리를 ‘현장 동력(Contextual power)’이라고 한다.
하나의 특정한 역사 또는 어떤 인물이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찾지 못할 경우에 적용시켜 볼 수 있는 명제이다.
애니 엘러스가 조선에서 보냈던 파란만장한 선교사로서의 삶을
납득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현장 동력은 조선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했다.
처음에 그녀는 조선인들이 나무와 돌을 숭배하는 것밖에 모르는
야만적이고 무지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선인들과 만나면서 그들이 지닌 고대 문명과 높은 수준의 문화,
그리고 다양한 예술적 재능에 대해 알게 되었고,
조선 사람들이 지닌 섬세함과 깊은 인격, 자존감에 겸손함까지 갖춘 모습을 발견했다.
엘러스는 자신이 지녔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매우 부끄러워했다.
그녀는 결국 조선인들을 존중하게 됐고, 누구보다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현장 동력을 통해 전해진 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이 땅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새롭게 발견해 나갔던 그녀의 인생 역정 안에는
자신의 미래와 사명을 위해 스스로 설정한 수많은 계획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79년 일생 중 50년 동안 그녀는 갖고 있던 재산 모두를 바쳐 조선인들을 섬겼다.
그리고 소리 없이 이 땅에 잠들어 있다.
마지막회에서는 애니 엘러스가 남긴 실제적 유산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의 우리가 직접 보고 만지고, 확인할 수 있는 유산들이 너무 많다.
따라서 그녀가 남겨준 유산들의 목록을 일일이 점검하기보다는
그러한 유산들을 직접 찾아볼 수 있는 한 가지에 더욱 집중하고자 한다.
다양한 자료를 남기다
우선 그녀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글들이 있다.
엘러스가 남긴 대표적인 글들은 다음과 같다.
‘My First Visit to Her Majesty,
The Queen’(The Korean Repository, 1895)
‘Personal Recollections of Early Days’(The Korea Methodist News Service, 1934)
‘Early Personal Recollections’(The Korea Mission Field, 1935. 4)
‘Early Memories of Seoul’(The Korea Mission Field, 1938. 2).
이 글들은 애니 엘러스가 조선에서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이 직접 기록한 기사이기 때문에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에 도착한 이후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의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들이 있다.
18편 정도의 편지들을 통해 그녀의 초기 선교 사역을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손으로 쓴 필기체이기에 읽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정신여자고등학교에서 이 편지들을 인쇄체로 발간했기 때문에
접근이 용이한 편이다.
정신여자고등학교 사료연구위원회가 출간한
‘한국에 온 첫 여의료선교사 애니 엘러스’(2009) 등이 대표적이다.
그 다음으로 애니 엘러스와 남편 번커가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본부에 보낸 문서자료들이 있다.
여기에 들어있는 애니 엘러스의 편지들을 통해
기독교조선감리회 소속 선교사로서의 그녀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밖에 ‘정신백년사’ ‘이화 100년사’ ‘한국기독교의료사’ ‘한국간호역사자료집’ ‘배재학당사’ ‘대한기독교서회백년사’ ‘대한성서공회사’ ‘동대문교회백년사’ ‘용두동교회100년사’ ‘우이교회100년사’ ‘경신사’ ‘한국감리교 여선교회의 역사’ 등의 자료를 통해
그녀의 면면을 살필 수 있다.
문서 자료를 자세히 소개하는 이유는 그녀를 포함한 내한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들을 직접 찾아보기 위한 안내라고 할 수 있다.
또 필자가 아직 못 다한 말들을 대신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우리가 상속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들을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애니 엘러스가 남겨준 유산들,
특히 그녀의 남편 번커와 함께 남겨준 한국 기독교 역사의 유산들은 오늘의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고 밀접한 것들이다. 그러다보니 일부러 찾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그들의 유산이라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할 수가 있게 된다.
엘러스의 남편 번커는 원래 한국으로 올 계획이 없었던 사람이다.
처음에 헐버트 길모어와 함께 선발된 사람은 발렌틴(Valentine)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갑신정변으로 출발이 연기되는 동안 그의 마음이 바뀌었고,
그 대신 번커가 선발되었던 것이다.
요즘 많은 한국교회 신자들이 신앙 유산을 찾기 위해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방문한다. 그리고 묘원 한복판에 누운 번커 부부의 묘지와 묘비를 스쳐 지난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유산들을 찾기 위해서는 양화진으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조선이라는 무대 위에서 조선인들이 애니 엘러스와 같은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의 교회,
조선의 학교, 조선의 병원 등으로 이어지는 장면들을 따라 오늘의 생생한 유산으로 흐르고 있는 자기 자신의 신앙 안에서 스스로 직접 찾아야 할 것이다.
마침 이들 부부에게는 자녀가 있었다는 보고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그들의 실질적인 유산을 상속받은 자녀들이지 않을까 싶다.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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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엘러스와 번커가 마련한 신혼집 인근에 남은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애니 엘러스 인생 항로의 연속적인 급변침은 조선에 오는 것으로 시작됐다.
조선에 오기 전엔 전혀 계획치 않았던 일이 또 한 번 그녀에게 다가왔다.
번커와의 결혼이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엘러스는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 새롭게 마련하는
여성전문병원 담당자이자 명성황후의 주치의 역할을 감당키 위해 이곳에 왔다.
따라서 그녀는 결혼한 이후에도 자신을 대신할 후임이 올 때까지 한동안 일에 매진하였다. 번커도 마찬가지로 육영공원 교사로 왔기 때문에 결혼 후인 1894년 2월까지 자신의 일을 했다. 결혼 이후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일단 이렇게 일단락이 됐다.
하지만 결혼 이전부터 그녀의 사명은 남편과 맞닿는 면이 있었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엘러스의 경우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라는 분명한 소속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서울의 선교사들 가운데 아무도 그녀의 결혼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결혼 이후 소속에 대해 문제를 삼는 이들은 있었다.
반면 번커는 처음부터 어느 특정 교단 소속이 아니었기에
이 점과 관련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여기에 애니 엘러스와 번커가 새로 꾸린 보금자리를 중심으로
특별한 사역을 시작할 수 있던 근본적 이유가 있다.
이 역시 둘 중 어느 누구도 계획해 놓지 않은 일이었다.
결혼 이후 엘러스의 계획은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 소속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후임이 올 때까지 제중원 여성병원에서 의료사역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명성황후 시의로서 그의 건강을 돌보는 것과 조선 여자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키 위해 어렵게 설립한 여학교를 성공적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이와 함께 남편 번커도 육영공원 교사 활동이 종료되면 함께 교단 본부 소속 선교사가 돼 같이 교육사업을 전담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미국북장로회는 물론 북감리회에서도
선뜻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단과 교단 사이에 놓여 있는 특별한 사명
1884년부터 1889년까지 호주 장로회가 들어오기 전까지
조선에는 미국북장로회와 북감리회 두 개 교단 소속 선교사들이 주로 활동했다.
게일의 경우처럼 캐나다 토론토대학 YMCA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개별적인 활동을 했다. 그 뒤로 1890년 영국성공회, 1892년 미국남장로회,
1895년 미국남감리회가 들어왔다.
이 무렵은 번커가 기울어가는 육영공원을 지켜보려 노력했지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임했던 시기였다.
책임감이 강했던 번커는 1888년 그보다 학교를 먼저 사직하고 떠난 길모어와
1891년 12월까지 함께 버틴 헐버트가 떠난 뒤에도 끝까지 남고자 했다.
그런 번커가 부인 엘러스과 함께할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교단과 교단 사이의 변경지대에 놓여 있었다.
번커에게는 일찍부터 교단과 교단 사이에서의 화합과 협력을 위한 사역이 주어졌다.
1886년 11월 6일 토요일 밤, 서울유니온교회를 운영키 위한 임원진이 선출됐다.
유니온교회는 1885년 6월 21일 주일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예배를 위해
시작되었다.
임원으로는 담임목사에 아펜젤러, 서기 겸 회계에 헤론, 이사에 스크랜턴, 언더우드,
번커가 선임됐다.
유일하게 번커만 교단 소속 선교사가 아니었다.
유니온교회는 애니 엘러스가 노춘경의 세례에 대해 이야기 했던 바로 그 교회다.
엘러스와 번커는 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교단 간 연합에 대한 필요성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조선 선교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건이었다.
1892년 6월 27일 월요일은 특별한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윌리엄 제임스 홀과 로제타 셔우드의 결혼식은 두 번에 걸쳐 진행됐다.
윌리엄 홀이 캐나다인지라 둘은 스크랜턴 부부, 존스와 벵겔이 참석한 영국 공사관에서
한 번,
미국인 로제타 셔우드를 고려해 미국 공사관에서 또 한 번의 식을 치러야 했다.
두 번째 결혼식에서 번커와 올린저가 함께 주례를 베풀었다.
로제타 홀의 일기에는 이 날 사용한 말씀이 적혀 있는데 해당 구절은 히브리서 13장 4절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였다. 번커가 미국북감리회 소속으로 가기 전 무소속 시절이었다.
1890년대 국제적인 정세 속에서 비극적인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던 조선에 대해 번커와 엘러스는 남다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선교 초기 조선의 선교사들은 대체로 이들과 같은 입장이었다. 곧 조선과 조선인들에 대해 온정적인 시선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에서의 10년 많은 변화
남편 번커와 조선에서 십년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애니 엘러스는 애니 엘러스 번커로,
의료선교사에서 교육선교사로, 선교사에서 선교사이자 선교사 아내로, 미국북장로회 소속에서 미국북감리회 소속으로 정체성 자체가 많이 바꿨다. 그 과정에서 엘러스는 많은 시간을 일종의 공백기처럼 보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은 자칫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지만 엘러스는 오히려 남편과 특별한 사역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처음부터 그녀나 남편 번커가 조선의 선교 현장에서 큰 의미가 없던 교단에 소속돼 활동하기엔 적절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 교단 간 연합의 현장에 그들이 늘 함께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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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엘러스는 1886년 7월 4일 아침, 조랑말을 타고 제물포에서 서울로 들어왔다.
날이 저물어 도성 문이 닫히기 직전이었다.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된 번커(D. A. Bunker), 헐버트(H. B. Hulbert),
길모어(G. W. Gilmore) 부부가 미국에서 배를 탔을 때부터 동행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이 일행이 도착하는 정확한 시간이 미리 전달되지 않아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서울로 가는 첫 길은 무덥고 힘들었다.
비록 자신의 계획을 전면 수정하여 의사 학위도 뒤로 미룬 채 떠나온 아쉬운 길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필요로 했던 곳이라 부푼 기대를 한껏 지니고 있었다.
엘러스가 도착할 당시의 서울은 500년 역사의 조선을
확고하게 지탱하고 있는 중심지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성 밖의 간선도로 길목과 한강변 주변으로는 전국적 단위의 시장들이 형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활기를 띠고 있었다.
특히 일본에 이어 미국 중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과 조약을 각각 체결하여 정동을 중심으로 서울 곳곳에는 외국인 거류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외국인의 활동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면서 본격적인 선교사업도 시작되었다. 제중원으로 시작된 미국 북장로회 서울 선교지부, 그곳이 바로 엘러스의 정확한 목적지였다. 그녀가 오기 전인 5월 11일에는 고아원도 개원되었다. 의료와 교육이 병행되고 있었다.
선교사는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다
엘러스는 서울에 도착하고 나서 2주일이 지났을 때 한국 선교를 전체적으로 낙관할 수 있을 만큼의 고무적인 행사에 참여하였다. 7월 18일 저녁 외국인들만 모이는 것으로 허락된 유니온교회에서 신자 노춘경에 대한 한국인 첫 번째 세례식이 거행되는 자리였다.
그 말고도 세례를 받고자 하는 한국인들이 여러 명이 더 있다고 하니
선교에 대한 전망은 매우 밝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당시 알렌과 헤론, 그리고 언더우드 등
서울 선교지부의 선교사들은 첨예한 갈등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협력이 아닌 불화의 상황은 젊은 그들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한국 사람들보다 더 ‘빨리 빨리’를 외쳐대고 있었다.
엘러스도 이러한 대립과 갈등 상황으로 인한 곤란한 지경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이는 알렌이 1887년 11월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으로 가면서 해소되기 시작해
헤론이 순직한 1890년 7월이 되어야 완전히 소멸하였으니
엘러스의 초기 사역기간 내내 그녀는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을 향하는 여정에서 품었던 그녀의 기대는 크게 무너져 내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가 의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부각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이미 다 알린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 문제는 그녀의 입장에서 몹시도 괴로운 일이었다.
선교사는 천사가 아니라 결국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실감했던 시기였다. 하루라도 빨리 다시 돌아가 남은 공부를 마치고 예전의 계획이었던 테헤란의 병원에 가서 마음껏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그녀의 솔직한 바램이었다.
제중원 여성병원에서의 18개월 동안 그녀의 가슴 속에는 후회와 실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었다.
그녀는 선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선교에 관한 업무를 결정할 수 있는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 제중원과 관련된 일은 알렌 및 헤론과 동등한 권한을 갖고 있는 이사였다.
무엇보다 엘러스는 자신이 의사가 아니라는 선교사들의 우려를 불식할 만큼 실제로 환자들을 진료하는 과정에서 탁월한 의술을 보여주었다.
또한 명성황후와의 만남을 통해
왕비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 주치의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왕비는 그녀보다 아홉 살 위였다.
엘러스가 볼 때 왕비의 얼굴은 미소를 지을 때 아름다웠다.
왕비는 지체 높은 여인으로 친절함을 담은 인격을 소유했으며
강한 의지와 능력을 가진 인상을 주었다.
엘러스는 언제나 왕비로부터 가장 친절한 말과 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왕비를 엘러스는 크게 존경했다.
왕비는 다리에 신경통이 있었고 불면증에 눈병이 심한 편이었다.
감기와 복통에도 자주 걸리고 빈혈도 있어 건강 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엘러스는 이러한 왕비를 정성껏 보살폈다.
먼저 안색을 살핀 후 맥박과 체온을 측정했다.
처음에는 허락 없이 왕비의 몸을 진찰하는 바람에 왕비가 놀란 일도 있었다.
그녀는 자주 궁궐에 들어가 왕비를 진찰했고 왕비의 건강도 조금씩 좋아졌다.
그렇게 엘러스와 명성황후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제중원 여성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진료했고
그 결과도 좋은 편이었다.
그렇게 지내는 사이에 다른 여의사가 한국에 오게 되었다.
1888년 1월 6일 왕실로부터 명성황후 주치의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2품 정경부인의 직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녀는 제중원 여성병원의 일을 새로 부임한 여의사 릴리아스 호튼에게 인계하고
의료사역을 그만두었다.
새로운 길을 가다
애니 엘러스에게 새롭게 주어진 길은 의료 대신 교육 사역이었다.
그녀는 1888년 3월 12일 자신의 집에서 15세의 학생 두 명으로
‘정동여학당’이라는 여학교를 개교하였다.
공식적으로 한국 선교부에 등록된 서울 선교지부의 여학교였다.
그녀는 매일 이들을 가르쳤다.
의료 사역을 내려놓고 나서는 거의 모든 시간을 여학교 사업을 위해 사용하였다.
그리고 11월에 서울로 들어온 메리 하이든에게 여학교의 당장직을 넘기고 자신은 보조의 역할을 맡았다. 이로써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주어진 그녀의 사명은 일단락되었다.
애니 엘러스에게는 서울에 와서 얻게 된 매우 의미 있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명성황후로부터 결혼선물로 받은 금팔찌였다. 그녀는 이것을 항상 자신의 왼쪽 팔목에 차고 있었다. 평소의 소원대로 조선의 땅에 묻히게 된다면 그것과 함께 묻히고 싶어 했다.
“앞으로도 조선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왕비의 당부를 떠올리며 남편과 함께 다른 선교부의 일원이 되어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을 무렵, 비운의 왕비는 궁궐 한 구석에서 시해되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새롭게 주어진 길은 조선을 떠난 다른 곳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엘러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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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가 펴낸 찬미가 제1장. 독립문 정초식에는 윤치호가 쓴 가사에 번커가 곡을 붙인 애국가가 불렸다.
애니 엘러스와 번커는 내한 선교사들 가운데 조선 땅에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킨 최초의 선교사다.
또한 선교사로서 가장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애니 엘러스와 번커 부부의 조선 사랑’이란 주제로
이들의 선교활동 몇 가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의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사업
애니 엘러스와 번커 부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역 중 하나는 조선의 젊은이를 위한 교육사업이었다. 이들은 선교 초반부터 교육사업에 열성을 보였다. 엘러스는 의료 활동을 하는 동시에 젊은 여성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고, 번커는 조선의 양반 자제들을 위한 육영공원을 책임지고자 끝까지 애썼다. 엘러스는 정동여학당을 하이든에게 인계한 뒤에도 계속 관계를 맺었으며 이화학당에서는 재봉과 자수 등을 가르쳤다. 또 새로 생긴 간호학교에서는 의학 관련 과목들을 가르쳤다. 특히 엘러스는 선교 초기부터 성경공부반을 개설해 젊은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신앙교육에도 힘썼다.
육영공원의 폐쇄로 배재학당으로 가게 된 번커는 당국과 협의해 배재학당에서 조선인 관리들을 교육하는 방식으로 육영공원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는 배재학당이 감리회 소속 학교에 머물지 않고 조선의 젊은이들을 위한 대표적인 학교로 발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05년 이후 번커는 배재학당을 연합학교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1911년부터 경신학교의 언더우드와 배재학당의 번커를 중심으로 한 대학부의 통합으로 이어졌고, 훗날 연희전문학교가 탄생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 번커는 초교파 학교로 설립된 피어선성서학원 교수진으로 참여해 평신도를 지도하는 일에도 힘썼다. 번커 부부는 은퇴를 앞두고 그동안 자신들이 소장한 책들을 에비슨에게 기증했는데 이 책들은 1932년 5월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이 확장됐을 때 에비슨 문고로 등록됐다.
조선의 왕비와 왕을 위한 활동
엘러스는 약 8년 동안 명성황후의 시의 역할을 맡았다. 번커가 육영공원을 나온 뒤 엘러스와 함께 유럽과 아시아를 여행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줄곧 조선의 황후를 돌보았던 셈이다. 1895년 10월 8일의 을미사변이 나기 2주전인 9월 25일 명성황후를 본 것이 그의 마지막 알현이었다. 엘러스는 사변 후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며 황후의 빈전을 지켰으며 홀튼과 함께 국장에도 참례하였다. 이 사건은 평생 그녀의 기억에 남아 조선을 향한 긍정적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을미사변 직후 고종은 심각한 불안에 시달렸다. 그 역시 언제 시해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고종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선교사들이 나섰다. 번커를 포함한 선교사들은 불침번을 서며 고종의 침소를 지켰다. 애니 엘러스는 독살의 위협 때문에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못하던 조선의 왕을 위해 홀튼과 함께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선교사들은 불안에 떠는 고종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자 했다. 11월 28일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이어하려고 했던 이른바 ‘춘생문 사건’은 실패로 끝났지만 선교사들이 왕을 보호하고자 노력한다는 진심은 조선 사람들에게 전달됐다.
1896년 11월 21일 5000여명의 인파가 모인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은 애국가를 크게 불렀다. 이 날 불린 애국가는 모두 네 가지로 윤치호가 쓴 것이었다.
“우리황상폐하 천지일월같이 만수무강 산높고물고은 우리대한제국 하나님도우사 독립부강 길고긴왕업은 용흥강푸른물 쉬지않듯 금강천만봉에 날빛찬란함은 태극기영광이 비치는 듯 비단같은강산 봄꽃가을달도 곱거니와 오곡풍등하고 금옥구비하니 아세아낙토가 이아닌가 이천만동포는 한맘한뜻으로 직분하세 사욕은 버리고 충의만앞세워 님군과나라를 보답하세.” 이 가사에 곡을 붙인 사람은 다름 아닌 번커였다.
옥중 전도 이야기
번커는 한성감옥서에서 전도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낼 때까지 끈질기게 관련 당국을 설득했다. 그곳에 자신의 제자들이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다 넒은 차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인권선교를 하기 위함이었다. 1902년 12월 28일, 성탄을 기념해 감옥에서 최초로 예배가 드려졌다. 이보다 전부터 감옥서에는 수감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무료 도서실이 개방돼 있었다. 대한성서공회와 대한기독교서회는 이곳에 성경을 비롯한 각종 신앙서적을 공급했다.
현재 한성감옥서 도서실 도서대출부가 남아있어 누가 언제 무엇을 빌려 읽었는지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옥중에서 개종하기도 했으며 출감 이후 대거 교회로 들어와 한국 기독교 역사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약했다. 수감자 이승만 신흥우 등은 배재학당 출신이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감옥서 내에 학교가 만들어졌다. 이 학교에서는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한글과 성경 등을 가르쳤다. 이는 젊은 애국지사들에게 기독교의 영향을 불어넣은 계기가 되었다. 이상재 이원긍 유성준 이동녕 이준 홍재기 등이 감옥 내 학교의 수강생들이다.
엘러스는 남편을 따라 수감된 여죄수를 대상으로 옥중전도를 했다. 엘러스는 이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면서 예수의 사랑에 대해 전했다. 추수감사절에는 음식 반입이 허락되어 수감자들과 함께 먹기도 하고 기도도 드렸다. 수감자들은 매주 찾아오는 엘러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예수를 믿겠다고 결심한 사람들도 있었다. 애니 엘러스와 번커의 조선 사랑을 잘 보여주는 사역은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가장 낮은 곳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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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 속에 열정적인 에너지를 전파한‘애니 엘러스(Annie Ellers)’ - |
역사 속의 명성황후는 긍정적으로 때론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 받는다. 마리 앙투르와네트에 비유된 악녀? 혹은 진취적인 여장부 같은 리더십의 인물? 서로 다른 견해지만 명성황후는 조선을 사랑한 국모이었기를 간절히 믿고 싶다.
표면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명성황후에겐 외국인 젊은 여의사가 황후의 옥체를 처음으로 손을 대고 치료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녀를 치료했던 그 여인은 황후와 매우 돈독한 관계를 이어갔고, 황후가 전달한 금팔찌를 사망할 때까지 몸에 지니고 있을 만큼 절대적 우정과 신의를 나누었다. 그녀는 황후를 제2의 어머니로 생각하며 황후의 사해직전까지 각별한 사이를 유지해갔다.
그녀에게는 아마도 명성황후의 죽음이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충격은 또 다른 에너지로 발산 되었고 보이지 않는 곳곳에 전파되어져 나갔다. 그 에너지는 지금까지 연장선으로 이어져서 각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 수혜를 입은 자들이 모여 공연작품으로까지 만들어지게 되었다.
‘애니 엘러스(Annie Ellers)’그녀의 이름은 비록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제중원을 통한 의학계와 정신여학교를 통한 교육계, 그리고 종교계까지 크게 드러내지 않는 고요함 속의 열정적 에너지를 전파한 인물이다.
그녀는 미국 미시건주에서 태어났으며, 일리노이에 소재한 록포드대학을 졸업하였다. 의과대학에서 선교에 필요한 의학을 수학하던 중, 한국(조선)에서 선교사이자 고종 황제의 어의(御醫)로 활동하던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 安連)의 요청을 받아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선발되어 1886년 7월4일 한국에 오게 되었고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 평가되는 제중원(濟衆院)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애니 엘러스는 한국에서 40년 간 선교사로 활동하였으며, 명성황후의 주치의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명성황후의 옥체를 보전하는 공로가 인정되어 정3품의 벼슬을 받았고, 이후 1887년 서울 중구 정동에 고아 여아를 데리고 교육한 것을 시작으로 정동 여학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정신(貞信)여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재임하였다. 1926년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남편인 벙커(Bunker) 씨가 죽음을 맞이하여 그의 유언에 따라 남편의 유해를 가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소래 인근 지역에서 조용히 봉사 활동하였다가 1938년 10월 8일 사망하여 양화진 외국인선교인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삶을 살았던 애니는 사실 조선 땅에 머무르길 바라지는 않았다. 그녀는 본국으로 돌아가 의사공부를 마치길 원했고 자신을 대신한 여자의료사가 빨리 오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뜻대로는 되지는 않았다. 기다림에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녀는 조선에 남게 되고 그로인해 그녀는 이곳을 더 알고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가 이루어낸 결과물 중 하나가 여학교를 설립한 일이다. 한 명의 여자 고아아이를 가르치는 것을 시작으로 아이들이 모여지고 그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며 점점 학교의 형태가 갖춰지며 수많은 인재들이 양성 되었다.
조선에서 비전을 키워가던 그녀는 살아가면서 명성황후와의 만남을 잊지 못했다. 황후의 모습이 조선여인의 강렬한 첫인상이었고, 함께 나누며 의지했던 그들의 소중한 우정은 결국 조선의 여인들을 돕고 계몽하는 적극적인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의지는 제중원에서도 교육과 구제를 위해서도 자신의 사재를 다 털만큼 맘과 정성을 다해 조선의 여인들을 섬겼다. 그의 남편 벙커도 그와 함께 이 땅의 교육과 사랑을 전파하는 일을 쉼 없이 애니 엘러스와 진행했다.
그 남편인 벙커는(Dalzell A. Bunker) 오하이오주 오베린 대학(Oberlin College)을 졸업하고 유니온신학교 또한 졸업하였다. 그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교육공원(황실대학, Royal College)의 교수로 고종황제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 후 1895년 2월부터 한국 정부와 협정을 맺고 정부가 추천한 200명의 학생을 받아 벙커가 책임을 맡아 교수하여 배재학당 학감이 되었고, 제3대 배재학당장이 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지원을 하며, 사후 한국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을 할 만큼 이 땅과 조선인들을 사랑했다. 그의 사후 유해는 그가 바라는 대로 돌아와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Until the day dawn the shadows flee away(날이 새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라는 어구가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바람직한 캐미가 되어 훗날 많은 인재들이 성장하고 교육하는 현장인 학교로 지속적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정신학원, 배재학당). 그들에게 특히 애니 엘러스를 통해 일어났던 에피소드들이 요 근래 조금씩 부각되면서 그 수혜를 입은 학교의 졸업생들이 중심으로 모여 인물에 대한 연구와 나아가서 관객과 호흡 할 수 있는 공연 프로젝트로 진행되어 가고 있다.
무아모하닷사댄스프로젝트는 이 사실들을 근거로 인물의 정서와 에피소드들을 나열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풀어가고 있다. 테이블작업부터 시작하여 역사적 사실들을 토대로 에피소드들을 하나하나 나열하여 갔다. 텍스트 중심이 아닌 단츠떼아터 장르를 이해하고 접근해가기 위해 하나의 실제 사건들을 나누고 거기서 일어나는 상황들에 따른 정서를 찾아 나갔다. 그녀에 대한 접근을‘역사적으로 큰일을 했다’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춰 진행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작품을 풀어가며 마음속으로 다가오는 건 그녀 또한 여린 여자였고, 의지할 곳이 필요했으며,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았고, 사랑도 받았으며, 허무함을 느꼈고, 두려움 속에 현실들을 감당해가야 했을 것이라는 인간‘애니 엘러스’가 겪은 한 여성으로의 희·로·애·락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용극‘애니 엘러스’는 한 인간의 삶을 소재로 선택하기엔 그녀에 드라마틱한 삶의 여정에 따른 정서의 변화가 각 씬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가 되었다. 그녀의 공적을 기리는 작품이 아닌 그녀의 손으로 쓴 번역 된 편지들, 그리고 그 상황에 따른 사건들 안에 상황들을 유추하며 감정의 변화를 찾아가는 과정은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간 ‘애니 엘러스’에 대한 궁금증과 이해를 위해 많은 생각과 상상을 할 수 있어서 작업을 하는 동안 인간의 삶을 통해 그 당시 역사를 찾아보게 되고 역사 속 인물들을 살펴보며 공부하고 토론하고 끊임없는 질문들이 나열되어가는 당위성을 찾는 집요한 작업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의 조선인들에게 보였을 젊은 여의사, 교사인‘애니 엘러스’ 그리고 그녀가 바라보며 느꼈을 조선의 여자들, 그리고 늘 옆에서 함께 한 벙커의 눈에 비춰진‘애니 엘러스’, 각각 그들의 시각 속에 펼쳐진 당시의 조선의 상황들…. 이미 역사 속에 흘러간 과거의 사건들이 다시 언급되어지고 작품으로 재해석되고 만들어지는 과정을 접하면서 그녀의 보이지 않는 엄청난 에너지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얼마 후 그간 애쓰고 함께 한 무용수, 배우들을 통해 무대에 펼쳐질 인간‘ 애니 앨러스’의 이야기… 그 안의 에피소드들이 관객에게 진지하게 다가가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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