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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 교명 변화와 3·8만세 운동 참여
부르엔 선교사의 부인인 마르다 스캇 부르엔(한국명 부마태) 여사는
선교사업으로 실시 중이던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글과 성경을 가르치던 바느질반을 인수해 ‘신명여자소학교’를 설립했다.
이때가 1902년 5월10일이다.
이날은 영남지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의 시작일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907년 3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당시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타 지역 여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았기에
중학교 기관이 필요했고,
1907년 10월15일 대한정부의 교육령에 의해 상급학교인
‘신명여자중학교’로 인가를 얻어 그해 12명의 학생을 모집해 10월23일에 수업을 개시했다.
이후 한일합병으로 인해
중학교라는 이름을 쓰지 말라는 지침으로 인해 ‘신명여자학교’로 재등록 인가가 나왔다.
이 와중에 미국 선교본부로부터 ‘신명여자중학교’의 설립이 승인됐다.
이후 1944년 대구남산고등여학교로 변경이 됐고,
광복 후 신명여고와 신명여중으로 환원됐으나 재단분규로
신명여고와 성명여중으로 교명을 전환했고
2004년 남녀 공학이 되면서 지금의 ‘신명고등학교’가 됐다.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 운동은 대구에서는 같은 해 3월8일에 일어났다.
이날 신명학교의 재학생, 졸업생 및 교사들은 거리로 뛰어나가 계성,
대구고보의 학생, 성서학당의 수강생, 남성정(현 제일) 교회와 신정(현 서문)교회의
교인들 기타 1천여 명의 시민들과 합세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신명학교가 거교적으로 3·8만세 운동에 참여한 것은
첫째로 독립운동을 하나의 신앙처럼 여겼던 개신교 계통의 학교로서
1919년 이전에 이미 이만집, 김영서, 권희윤, 신태근 등과 같은
교사들로부터 항일 민족주의의 사상적인 감화를 받을 수 있었다.
둘째로 2월 하순경, 서울의 이갑성으로부터 3·1운동에 참가를 권유받은 당시
남성정(현 제일)교회의 이만집, 김태련 등이
이 사실을 신명학교의 교사 이재인, 졸업생 임봉선, 이선애 등에게 알려왔다.
또 한편으로는 평양에서 만세 운동을 목격한 숭실학교학생 김무생과
김천교회의 전도사인 박재원 등이
신명학교를 내방해 여학생 궐기의 필요성을 역설한 사실이 계기가 됐다.
3월8일 신명학교의 전교생 50여 명 중,
최정술을 비롯한 일부 학생은 데모의 시발지인 큰 장터에서
이영현을 비롯한 통학생 및 저급학년 10여 명은 동산교를 조금 지나서,
그리고 30명 정도의 기숙사생들은 대부분 남성정파출소 앞에서 각각 데모대와 합류했다.
하지만 이들은 달성군청 앞에 이르렀을 때
일본의 경찰·헌병·군인들로부터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고 거의 전원이 구속되고 말았다.
이때 만세를 불렀던 학생들 즉
강점순, 김귀조, 곽춘학, 염향이, 추동암, 강태덕, 견갑련, 김남출, 김달희, 김복조, 김옥향, 이봉선, 이순이, 백일화, 최순희, 최정술, 홍순범, 김일애, 이영현, 백갑덕, 장희조, 강성희, 김학진, 서분이, 손원연, 송숙이, 주금경, 차영숙, 천선희
외 10여 명은 대개 2주간 정도 구류됐다가 나이 어린 여자란 점이 참작돼 석방됐다.
하지만 졸업생 교사 및 신명의 연고자들은 전원 재판에 회부돼
다음과 같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신명고교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기에
대구지역 근대 여성운동을 이끄는 중요한 배움의 산실로 성장했고,
어두운 시대를 밝혀 나가는 시대의 등불과 같은 역할을 감당했다.
신명고교 50~52회 졸업식.
1949년 신명고교 본관 건물◆신명 그 이름, ‘어둠을 깨뜨리는 학문의 횃불’
교명 ‘신명’의 ‘신(信)’은 ‘믿음의 토대 위에 학교를 세운다’이고,
‘명(明)’은 ‘빛’을 의미한다.
이에 ‘신명’은 ‘어두움을 깨트리는 학문의 횃불’이다.
더불어 신명여고의 교훈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인데,
이는 성경 마태복음 5장 13절~16절의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구절을 교훈으로 삼은 것으로,
지식적 교육 만이 아니라 믿음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깨우치고 크리스토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구자가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교훈 아래 초창기에는 정의와 민족 각성에 교육이념을 두고 교육했고 3·8만세 운동은 대표적인 건학이념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972년 개교 65주년 기념사업으로 교정에 ‘신명 3·1운동 기념탑’을 건립해 3·1정신을 지금까지 기리고 있고, 2007년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신명고교 역사의 재정립, 자료보관 및 전시를 위해 동창회의 도움을 받아 역사적인 ‘신명 역사관’을 개관했다.
이후 신명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신명 역사관 내에 신명 3·1운동 역사를 재조명하는 리뉴얼 공사를 한 뒤 지역의 근대골목투어와 연계해 신명고교의 역사를 지역민에게 알리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교사로 재직하다가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차보석 선생의 유족은 ‘건국훈장 애족장 훈장’을 학교 역사관에 기증하는 역사적인 행사가 5월25일 교내에서 열려 재학생들에게 큰 자부심을 느끼게 해줬다.
유구한 역사를 바탕으로 신명은 많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글로벌 인재육성을 위해 ‘영어중점 교과교실제’ 운영, ‘일본 및 중국 학교와 국제교류’를 활발히 진행 중이다.
또 교육과정 다양화의 일환으로 음악적 재능과 흥미를 가진 일반고 학생을 위한 예술교육인 ‘음악(클래식)중점학급’을 대구에서 유일하게 운영해 개인별 맞춤형 진로 교육을 통해 좋은 성과를 이뤄내고 있다.
이 밖에도 다양한 교육과정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학생 트랜드에 맞춘 ‘교내도서관 리모델링사업’, 자연체험 및 생태학습이 가능하고 학생들의 정서적 안정을 누릴 수 있는 ‘부르엔 동산 조성’과 복합 수업이 가능한 교실과 최신 과학실을 보유하고 있는 ‘김영화관’ 개관은 지역학교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1920년대 당시 재학생들이 신명고교 운동장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신명고교 당시 재학생들이 과학실험실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동문들의 활약과 든든한 지원군
대구의 음악은 1901년 파커선교사가 미국에서 부산을 거쳐 사문진 나루터로 들여온 ‘대구의 두 번째 피아노’를 신명학교에 기증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부르엔 여사는 ‘소리의 계몽을 통해 신여성을 배출했으며 그들의 음악은 근대라는 시대정신의 초석’이 됐다고 말했다.
1920년대 후반 활약한 영남지역 최초의 소프라노 추애경은 신명고교 출신이며 이후 많은 음악가가 신명고교에서 배출됐다.
신명의 음악은 ‘신명찬양대’로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했는데, 1913년 학교 본관 낙성식에서 축가를 부르면서 신명합창단이 시작됐고 최근에는 전국합창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명성을 떨치고 있다.
1924년 신명합창단을 모태로 대구 최초의 혼성합창단이 창단됐고, 지도를 맡은 한국 근대음악의 대부 박태준은 가곡, 성가곡, 다양한 서양음악을 소개하고 대구를 음악도시로 키웠다.
신명 음악의 전통을 이어받기 위해, 신명합창단 100주년을 기념해 2012년 6월18일 동문합창단 ‘SM 코러스 청라’가 창단돼 현재까지 연주회와 봉사활동 등 음악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음악뿐만 아니고, 광복 이후, 미술, 육상, 농구, 배구부(1976년 전국 우승), 사격부(1981년, 1984년 전국 우승)는 대구와 영남에서 연전연승해 전국 우승도 했으며, 무용반과 산악부도 전국 우승해 학교의 이름을 빛냈다. ‘육상’과 ‘무용’은 지금까지 학교의 교기로 육성하고 있으며 매년 전국 대회와 대학 주관 대회 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1956년 2월, 재학생 중에서 특기자를 양성하는 의미로 동창회에서 2만환의 장학금을 모교에 기탁하면서 동창회에 장학부를 만들기로 하고 여귀옥 동문을 장학부장으로 선출한 것이 동창회 장학회의 출발이었다.
이후 장학부의 주관 아래 각종 장학제도를 추진해 오던 동창회는 개교 95주년을 맞이해 장학금 지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신명동창회 장학회’를 발족해 후배들을 지원하다가 2009년 초 최종덕 고문과 석정달 전 동창회장을 중심으로 많은 동문이 참여해 ‘재단법인 신명총동창회장학회’가 설립됐다.
현재까지 12년간 2억7천만 원의 장학금과 연구비 및 교육활동 지원금을 지급했다.
‘권정순 장학재단’은 소외된 이웃사랑과 장학사업에 열정을 바친 고 권정순 동문(60회)의 뜻을 기리기 위해 동해금속 계열사와 서동해 회장의 개인 출연금을 합한 80억 원을 기본 자산으로 출연해 설립한 공익법인으로, 2009년부터 지금까지 11억4천만 원의 발전기금을 지원했고, 올해에도 재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예정이다.
‘우송재단’은 김학봉 우송(愚松) 회장(부인 고 여정옥 동문, 1935년 입학)이 이웃사랑을 실천하고자 사재 100억 원을 출연해 설립한 공익법인으로, 2014년 9월부터 총 2억4천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김대곤 우송재단 이사장(부인 김영화 54회)은 올해도 10명의 학생들에게 개인 당 300만 원씩 총 3천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할 예정이다. 특히 2018년 4월에는 ‘김영화관’ 증축사업으로 2억5천만 원을 기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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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브루엔 선교사(부해리, 1974 ~ 1959)는 대구 지역 개척 선교사 3인방 중에 한 사람이다.
대구 남산교회를 개척하고, 경북 서부 지역에서 42년간 복음을 전하면서 55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김천 지역의 황금동 교회, 김천 감문의 대양교회 등등
자전거를 타고 전도여행을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인 마르다 여사는 대구 최초 여학교인 신명여고를 설립하였다.
그는 미국 뉴저지에서 목사님의 자녀로 출생하여 1896년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1899년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학생 시절 무디의 학생 자원 운동(SVM)에 참여한 후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가 선교지로 한국을 선정하는 일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다.
선교지를 결정하는 시기에 아버지 친구의 아들인 존슨이 생각이 나서, 존슨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때마침 존슨도 대구에 사역할 동역자로 브루엔이 생각이 나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두 편지가 동일한 날자에 배달이 된 것이다.
이 상황을 듣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감동한 브루엔은 주저 없이 대구행 선교사로 지원한 것이다.
그는 1899년 9월 북장로교 선교사로 서울에 도착하였다.
25세의 청년은 머나먼 이국 땅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는 곧바로 존슨이 사역하는 대구 선교부에 부임했다.
당시 마르다와 약혼하였으나 혼자서 먼저 왔고, 약혼녀 마르다는 3년 후 한국에 왔다.
그는 대구에 도착한 후 처음에는 존슨의 의료사역을 보조하였다.
그리고 1901년부터 경북 서부 지역을 순회 전도하며 복음을 전했다.
김천 21개 교회, 선산 10개 교회, 달성 7교회, 칠곡 5개 교회, 상주 5개 교회, 성주 3개 교회, 고령 3개 교회,
군위 1개 교회 등 55개 교회를 설립하였다. 특별히 자전거를 타고 전도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1903년 아담스의 후임으로 대구 제일교회 2대 담임 목사로 시무했고,
1904년에는 대구 성경학원을 맡아서 운영했다. 그리고 1913년 12월에는 경상 노회장으로 활동했다.
1915년에는 대구 제일교회에서 대구 남산교회를 분리 개척하였고, 1920년까지 담임 목사로 헌신하였다.
그는 나환자 선교위원이 되어 한센병 환자를 돕기로 하고,
1917년부터 나환자 요양소 부지를 확보하고 병동과 예배당을 짓고 구제사업을 펼쳐 나갔다.
* 나환자 선교위원으로는 어빈, 빈튼 그리고 브루엔이 활동하였다.
또한 부루엔은 1900년 3월 대구에 야구를 보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루엔 부인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야구 방망이와 공으로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이다.
대구에서 경북고, 대구상고 등 고교 야구의 명문이 많이 생겨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 후 1941년 브루엔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 땅을 떠나 필리핀으로 갔다.
그리고 1944년 선교사 사역을 은퇴하고 캘리포니아 산타클루즈에서 거주하다가 1959년 3월 84세로 별세하였다.
그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잘하였고, 한번 만난 사람은 얼굴을 메모하여 잘 기억하였다고 한다.
또한 성품이 온화하여 한번도 화를 내지 않았고,
한국인을 대할 때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는 따뜻한 선교사였다고 주변 사람들은 회고한다.
부인 마르다 브루엔(부마태, 1875~1930)은 약혼자가 한국으로 떠난 지 3년 만인 1902년 2월 결혼하고
그해 5월 남편의 선교를 도우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그녀는 부임 후 대구 선교 지부 내 주택에서 소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1907년 10월 대구 최초 여성 학교인 신명여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녀는 신명학교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또한 1916년 남산교회 부인 주일학교와 농촌교회 여 전도회를 조직하고, 부인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30년 10월 유방암으로 5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는 28년간 헌신한 대구를 뒤로하고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구내 《은혜의 동산》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매우 탁월한 여성이었으며 우애가 있는 가정을 만들고
이웃과 사회에서 인간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고 동료들은 추모했다.
브루엔은 마르다와 사별 후 1934년 부인의 친구인 동산의료원 간호사 클라라 헤드버그와 재혼하였다.
클라라는 브루엔의 유고를 정리하면서 편지 등 그의 기록을 정리하여 후에 책으로 출판토록 하였다.
그녀는 1941년 브루엔이 이 땅을 떠날 때 함께 떠났다.
* 클라라(하복음)는 1923년 내한하여 동산의료원에서 18년간 간호사로 헌신하였다.
그녀는 간호 책임자로 근무 중 병원내 간호부 양성소를 설립하여 많은 간호사를 양성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