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300만의 소국(小國) 우루과이.
그러나 축구에 있어서 만큼은 소국(小國)이 아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과 1928년 암스텔담 올림픽에서 연이어 금메달을 획득했고, 1930년
자국에서 개최된 제 1회 월드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에게
4대2로 승리)
20년 후인 1950년 월드컵에서는 주최국인 브라질을 2대1로 누르고 또 다시 우승.
그에 걸맞게 우루과이는 세계적 스타플레이어들도 많이 배출했다.
1930년 월드컵 MVP 페드로 세아(당시 우루과이 최고의 스트라이커), '신기의 발재간'을 자랑했던
미드필더 호세 안드라데(당시 우루과이 유일의 흑인선수), 1950년 월드컵 MVP 판 알베르토 시키아피노(이태리 대표로써도 4시합 출전 경험이 있음), 80년대를 풍미했던 ‘준족의 윙’ 안토니오 알자
멘디. 그리고 90년대 '골의 시인' 루벤 소사 등.
이들보다 한 수 위로 평가 받는 선수가 엔조 프란체스콜리다.
1961년 우루과이 수도인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콜리는 우루과이를 대표하는 양대 클럽인
페냐롤과 나시오날이 아닌 몬테비데오 원더레즈라는 작은 클럽 유소년팀에 들어가 축구를 시작(74년)했다. 원더레즈에서 9년여 간 실력을 쌓은 프란체스콜리는 83년 21세의 나이로 아르헨티나의 명문 리버 플레이트로 이적했고, 아울러 우루과이 대표팀에도 선발이 되면서 그 해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했다. 그 대회에서 프란체스콜리는 대 브라질戰에서 대표팀 데뷔 첫 골을 터뜨리는 등 맹활약을 하며 팀 우승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83년 코파 아메리카를 통해서 남미 전역에 이름이 알려진 프란체스콜리는 리버플레이트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발휘하며 이적 1년 만인 84년에 남미 최우수 선수상까지 수상했다. 그 이듬 해인 85-86시즌에는 리버플레이트를 아르헨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세계적 선수로 성장한 프란체스콜리는 큰 기대를 모으고 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했다.
서독-덴마크-스코틀랜드와 같은 조에 편성된 우루과이는 조별 예선 첫 게임인 서독戰에서 '준족의 윙' 알자멘디가 선제골을 터뜨리며 기선을 잡았으나 경기 종료 6분을 남겨놓고 서독의 스트라이커인 알로프스에게 통한의 동점골을 허용하며 1대1 무승부를 이루었다.
두 번째 게임 상대는 월드컵 첫 출전국인 덴마크.
경기 전 예상은 우루과이의 우세였으나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우루과이는 덴마크의 파상공세를 막아내지 못하며 6대1로 대패를 당했다. 이 날 우루과이는 덴마크의 힘 좋은 스트라이커인 ‘버펄로’
엘케어 라르센(스타 클래식 34)에게 헤트트릭을 허용하는 등 시종 고전을 면치못했다. 우루과이는
덴마크의 완벽한 3-5-2 포메이션에 철저하게 말려들었다. 우루과이의 1골은 프란체스콜리의 페널티킥
득점이었다.
세 번째 게임에서 스코틀랜드와 0대0 무승부를 기록한 우루과이는 가까스로 조 3위로 16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16강전 상대는 대회 최강팀 아르헨티나였다.
당시 우루과이 전력 갖고는 아르헨을 잡을 수 없었다. 예상대로 우루과이는 아르헨에게 1대0으로 패하며 귀국 길에 올랐다. 사실 우루과이는 86년 월드컵에서 8강 이상을 노렸다.
그렇지만 프란체스콜리와 알자멘디 두 명의 스타 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86년 월드컵 후, 프란체스콜리는 프랑스 라싱 파리로 이적해 3시즌을 뛰었고, 이후 라싱 파리의 재정난으로 인해 89-90시즌 마르세유로 팀을 옮겼다. 프란체스콜리는 마르세유에서 한 시즌(89-90)밖에 뛰질 않았지만 28시합/11골을 기록하는 등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프랑스 축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당시 마르세유에는 쟝 피에르 파팽(스타 클래식 29)과 잉글랜드의 크리스 와들(MF)도 소속되어 있었다.)
프란체스콜리는 90년 이태리 월드컵에 대표팀 주장으로 참가했다.
우루과이는 4년 전 대회 때보다 전력이 강했다. SERIE-A 제노아 트리오인 호세 페르도모, 루벤 파스, 카를로스 아길레라 등 유럽 무대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이 예전 보다 많아졌고, 무엇보다 '골의 시인' 루벤 소사(스타클래식 20)가 가세하면서 공격진에 엄청난 무게가 실렸다.
스페인-벨기에-한국과 같은 조에 편성된 우루과이는 스페인과의 조별 예선 첫 게임에서 경기 내용 상으로는 스페인을 압도했으나 결과는 0대0 무승부였다. 이 날 루벤 소사가 천금 같은 페널티킥을 실축하고 말았다.
두 번째 게임에서는 벨기에의 에이스 스트라이커 얀 클레망스를 잡지 못하며 3대1로 완패하고 말았는데 우루과의 수비진은 4년 전 대회 때 덴마크의 엘케어 라르센에게 당한 것과 같이 클레망스에게도 당한 것이다.(엘케어 라르센과 얀 클레망스는 비슷한(체격이 크고 힘이 좋은)타입의 스트라이커다.)
우루과이는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아시아 최강인 한국과 맞붙었다.
우루과이는 전반전부터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그렇지만 한국 GK 최인영의 경이적인 선방에 막혀 좀처럼 골을 터뜨리지 못했다. 그러나 후반전 중반 루벤 소사와 교체되어 들어간 다니엘 폰세카가 종료 직전 헤딩 결승골을 터뜨리며 극적으로 16강 진출을 결정지었다.(이 날 매너 좋기로 정평이 난 프란체스콜리가 한국의 스토퍼 윤덕여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받는 모습이 카메라에 비춰지면서 한국 팬들을 분노케 했다. 필자 역시 당시 프란체스콜리의 그 야비한 행동에 큰 실망을 했다.)
16강전 상대는 주최국 이태리였다. 대회 개막 후 이태리는 참가국 중 가장 안정된 전력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우루과이로써는 벅찬 상대였다. 결국 후반전 스킬라치와 세라나에게 실점하며 2대0으로 완패했다.
이태리 월드컵 후, 프란체스콜리는 마르세유를 나와 이태리 SERIE-A 카리아리에 입단해 3시즌(90/93)을 뛰고, 토리노(93/94)에서도 1시즌을 뛰었다. 그리고나서 94년에 친정팀인 리버플레이트로 복귀했는데 리버플레이트 서포터들은 프란체스콜리의 복귀를 대환영했다. 그들은 프란체스콜리를 우루과이
출신 선수가 아닌 모국의 선수로 생각할 정도였다.
(리버 플레이트 시절의 프란체스콜리)
프란체스콜리는 이에 부응하 듯, 복귀 후 팀을 세 차례나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96년 12월엔 남미
대표로 도요타컵에도 출전했다.
(도쿄 요요기 국립경기장에서 펼쳐진 96년 도요타컵은 리버 플레이트VS유벤투스戰이었는데 당시 리버플레이트 감독이 라몬 디아스(스타 클래식 66)였고, 주장이 프란체스콜리였다. 그리고 10번이 오르
테가였다. 리피 감독이 이끄는 당시 유벤투스는 지단, 복시치, 유고비치, 델 피에로 등이 포진해 있었는데 이 날 리버플레이트는 후반전 델 피에로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면서 1대0으로 패했다.)
97년 리버 플레이트에서 현역 생활을 마감한 프란체스콜리는 현역 시절 코파 아메리카 3회 우승 및
남미 연간 최우수 선수상 2회 수상했다.
별명이 '왕자'인 프란체스콜리는 예술적인 스트라이커로도 불리었다.
그는 테크닉, 패싱력, 드리블, 슛, 프리킥에 이르기까지 공격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갖춘 역대 우루과이 최고의 판타지스타다.
프란체스콜리는 전형적인 스트라이커가 아닌 공격형 미드필더를 겸하는 선수였는데 특히
양발을 자유자재로 쓰는 페인팅이 일품이었다.
그의 우아한 플레이는 팬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선수들까지 매료시켰다.
90년대 우루과이 최고의 스타인 알바로 레코바는 '내 플레이 스타일은 프란체스콜리를 통해서 배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은 아들에게 'Enzo'라는 이름을 지어주기까지 했다. 이 외에도 많은 선수들이 프란체스콜리를 동경(憧憬)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2004년 펠레 선정 [FIFA 100]에도 엔조 프란체스콜리 이름이 들어가 있다.
엔조 프란체스콜리 우리알테(Enzo Francescoli Uriarte)
국적: 우루과이
나이: 1961년생
포지션: FW/MF
신장: 180cm
소속팀: 원더레즈(74/83)-리버 플레이트(83/86)-
프랑스 라싱 파리(86/89)-마르세유(89/90)-
이태리 카리아리(90/93)-토리노(93/94)-
리버 플레이트(94/97)
우루과이 대표팀 데뷔: 1983년
A매치 기록: 73시합/17골
월드컵 출전: 86년, 90년 대회
주요 타이틀 및 개인 타이틀
83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
85-86시즌 아르헨 리그 우승(리버 플레이트)
87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
89-90 시즌 프랑스 리그 우승(마르세유)
95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
84년 남미 연간 최우수 선수상(리버 플레이트)
95년 남미 연간 최우수 선수상(리버 플레이트)
지단이 자기의 우상이라고 말했으면..더이상의 설명이 뭐가필요할까요..
우루과이의 최고의스타... 현재 이분의 이름을따서 지단이
자신의 아들이름이 엔조라고 지은것......
첫댓글 그래서 지단 첫째아들 이름도 엔조
아 ~~
재생하지 않은 첫화면보고 이거 뭐 야구선수인가 생각 ㅋㅋㅋㅋ
아놔 나도 ㅋㅋㅋ
ㅋㅋㅋㅋ
그래서 엔조 지단이구나..
플라티니 아니였구나 ㅋ
엔조 ㅋㅋ
장 피에르 파팽인줄 알았는데;;
역시 ㅋㅋㅋ 근데 우루과이 태생 선수였군요..
오호...알찬 정보를 얻어갑니다 ㅎㅎ
플라티니인줄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