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4 대림 제3주간 수요일(루카 7,18ㄴ-23)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복음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8ㄴ-23
그때에 18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을 불러
19 주님께 보내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하였다.
20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2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2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23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을 불러 주님께 보내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하였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루카 7,18ㄴ-20)”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이 정말로 메시아일까?” 라고
세례자 요한이 의심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만일에 정말로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의심했다면,
복음서의 내용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생깁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29ㄴ-31).”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2ㄴ-34).”
여기서 두 번이나 나오는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자기가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한 일은 인간의 지식으로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서 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만일에 정말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알려 준 하느님의 계시를 의심한 것이고,
하느님의 계시를 의심했다면, 예언자의 자격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원래 ‘신앙의 증언’이라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의심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만, 즉 ‘확신’에 가득 찬 상태에서만
‘신앙의 증언’을 할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고 있다면, 증인 자격이 없고,
그런 사람의 증언은 증언으로서의 효력도, 가치도 없습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일은,
요한 자신의 의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제자들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해석합니다.
(요한이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또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한 것은 아닌데,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신 것으로 오해했고, 그래서 예수님께
“언제 심판하시렵니까?” 라고 물은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해석도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이 증언에는 ‘예수님은 심판자’ 라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어린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말에는 ‘예수님은 구세주’ 라는 뜻만 들어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3장과 루카복음 3장에 예수님을 심판자로 소개하는 것 같은
요한의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심판자로 소개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심판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1-23)”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직접 보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
복음서 저자는 왜 뒷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복음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는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신 말씀에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ㄴ-19).”
이 말씀은,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신 말씀이고,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고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메시아의 구원 활동’이라는 것을
너희가 믿는다면, 너희는 내가 메시아라는 것도 믿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실제로 당신이 하시는 일을 설명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메시아의 구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구원’이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얻어 누리는 것인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지금 이곳에서 그 구원을
미리 체험하게 됩니다.
장애와 질병을 고쳤을 때, 어떤 슬픔과 고통과 억압에서 해방되었을 때,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을 때, 그럴 때에 구원을 체험하게 되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그 ‘힘’은 예수님에게서만 옵니다.
신앙인은 바로 그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믿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입니다.
[출처] 대림 제3주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첫댓글 믿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