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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돌개
무수천 암장
애월.,무수천 계곡
무수천
............애월읍(涯月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읍.
동남쪽에 한라산 줄기가 뻗어 있으며,
서북쪽으로 점차 낮아져 남해와 접한다.
곳곳에
노로오름(1,070m)·
한대오름(914m)·
큰오름(830m)·
괴오름(651m)
등이 분포하며,
남부에 기생화산이 많다.
취락 지역은
주로 300m 이하의
저지대에 분포하며,
일주도로가 나 있다.
농산물로
브로콜리·양배추·양파·
무·마늘·취나물·부추 등
수산업은 상대적으로 미약.
지역 문화재
전통 노동요인 진사대소리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7호)
귀리겉보리 농사일소리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8호)
납읍민속박물관, 금산공원,
어음리 빌레못동굴, 무수천계곡
광령2리 제주조각공원 신천지미술관.
행정구역
애월리·곽지리·
금성리·봉성리·
어음리·납읍리·
상가리·하가리·
고내리·용흥리·
신엄리·중엄리·
구엄리·하귀1리·
하귀2리·상귀리·
수산리·소길리·
장전리·유수암리·
고성리·광령1리·
광령2리·광령3리
등 24개리가 있다
(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 26개리).
읍사무소 - 애월읍 일주서로 6322.
면적 202.16㎢, 인구 32,649(2017).
............................................
........곽지리 유적(郭支里遺蹟)...........
'청동기~철기'시대 사이.,조개더미 유적.
제주시에서 서쪽으로 20km쯤 떨어진 해안
일주도로변 해발 30m 완만한 비탈지대 위치.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 유적.
유적 가까이 제주시 삼양동, 용담동,
오라동, 애월읍 광냉리, 귀일리 등에
고인돌은 곽지리유적을 남긴 사람들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음을 대변하고 있다.
1973년에 처음 발견하여
1979년 12월과 1984년 8월
'제주대학교 박물관' 측에서
두 차례에 걸쳐 유적을 발굴.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있는
대규모 유적지로 드러났는데,
크게 3지구로 나뉜다.
유적 층위는 단순한 편으로
거의 겉흙층(두께 20~30cm)
아래의 제2층에서 유물들이 나왔다.
(조가비, 검은 부식토층, 두께 60~80cm)
제3층(흑갈색 부식토층, 두께 30~60cm)
제4층(황갈색 모래층, 두께 20~40cm)은
유물도 많지 않고 두 층 사이에는 시기도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을 보면
골아가리그릇·구멍무늬그릇·
항아리·김해토기 등 질그릇과
그물추·가락바퀴 등 흙제품이 많다.
도끼·공이·돌칼·끌·자귀·홈돌·
갈돌·갈판·그물추·숫돌 등 석기,
칼자루·송곳·뿔연모 등 뼈뿔 제품과
손칼·끌 등 철제 연모, 그밖에 많은
짐승뼈와 조가비 등 자연유물들이 있어
당시의 풍부한 문화내용을 알려주고 있다.
질그릇은 대체로 두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3층과 4층에서는 주로 골아가리그릇·구멍무늬그릇·
덧띠질그릇·검은간그릇·갈색간그릇 등이 있어
청동기시대의 성격을 띤다.
2층에서는 입술이 밖으로 벌어진 항아리와
김해토기가 특징으로, 경상도지역의 철기시대
초기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유적에서 출토된
뼈뿔연모에 대한 분석과
조가비, 짐승뼈 등 자연유물에
대한 분석이 진행되면
유적의 종합된 성격이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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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드 애월(涯月).
'물가 涯, 달 月
'물가의 달'
명월포
明月砲.
조선시대.,명월진
고려 말.,목호의 난 /명월포.,최영 장군 함대
명월성지(명월산성)
.............명월성지( 明月城址)...............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9호. 명월진성은
둘레가 3천 20척, 높이가 8척이었으며, 동쪽과
남쪽 및 서쪽에 각각 성문이 있었다. 성안에는
수량이 풍부한 샘이 있었고, 건물로는 객사·별창·
군기고 등이 있었으나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명월포는 1270년(고려 원종 11) 삼별초의 별장(別將)
이문경(李文京)이 고려에서 파견된 관군을 진압하고
탐라를 점령할 때 상륙한 곳이며, 김방경(金方慶)이
삼별초를 정벌할 때도 그 일진이 이곳으로 상륙하였다.
더욱이 1374년(공민왕 23)
목장을 관리하기 위해
몽고에서 파견된 몽고인
목자[牧胡]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최영 장군이
상륙한 곳도 명월포였다.
이곳에는 원래 성이 없었으나
1510년(중종 5)에 장림(張琳) 목사가
이곳은 비양도(飛揚島)로 왜선이
가까이 댈 수 있는 곳이라 하여
그 대비책으로 목성을 쌓았는데,
1592년(선조 25)에 목사 이경록(李慶祿)이
이를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며,
1764년(영조 40)에는
어사 이수봉(李壽鳳)이 조정에 건의하여
진장(鎭長)을 조방장(助防將)에서 만호(萬戶)로
승격시키고 제주인으로 선발하여 임명하도록 하였다.
정조 때 제주를 다녀간 어사
박천형(朴天衡)의 서계(書啓)에
“명월진은 서북쪽이 바다에 임하였고
진 앞에는 배를 정박할 만한 곳이 없으나
진의 서쪽 3리쯤에 독포가 있어서 어선이나
상선이 와서 정박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또 제주와 대정(大靜) 사이에 위치하여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9진 중 으뜸이다. 성지가 광활하고
백성들이 부유하며 샘물과 창고도 있어
충분히 자급할 수 있으므로 서남쪽
거진(巨鎭) 중의 하나이다.”라고 하여
제주의 9진 중 명월진 만이
구색을 갖춘 것으로
평가하였다
..............
항파두리
............항파두리..............
항파두리·항바두리라고도 한다.
진도의 싸움에서 패한 삼별초(三別抄)는
1271년(원종 12) 5월, 장군 김통정(金通精)의
영도 아래 제주도에 들어와 이 곳에
내외 이중으로 된 성을 쌓았다.
내성은
사각형의
석성을 쌓았으며,
외성은 언덕과 계곡을 따라
타원형의 토성을 쌓았는데,
그 길이가 15리에 이르러 성안의
면적은 약 30만평이나 되었다.
성에는 4대문을 설치하고
성 안에는 대궐을 비롯하여
관아·병사·군기고·후망소(堠望所)·
옥사·훈련장 등을 시설하였으며,
우물과 저수지도 마련하였다.
김통정은 이 항파두성 외에도
명월(明月)과 애월(涯月)에는
목성(木城)을 축조하고,
조공포(朝貢浦 : 제주시 외도 포구)·
귀일포·애월포·명월포·조선포 등에는
군항시설을 갖추었으며,
적의 상륙이 예상되는
해안 300리에는 이른바
환해장성을 쌓기도 하였다.
삼별초는 이 항파두성을 본거로
내륙지방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몇 차례 승리하였으나,
1273년 여·원연합군에
대패하여 전멸하고 말았다.
항파두리유적지대에는
당시에 쌓았던 토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돌쩌귀·기와·자기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밖의 당시의
시설이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1976년 9월 항파두리항몽유적지(缸波頭里抗蒙遺蹟址)
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396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으며,
1978년 유적지정화사업을 벌여 이곳에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를
비롯한 관리사·전시관·휴게소 등을 설치하였다. 현재는 북제주군의
관리 아래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보존되고 있다. →제주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제주 애월읍.,항몽유적지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濟州缸波頭里抗蒙遺蹟址)
1273년 항몽유적지
113만 5,476㎡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고려시대 최후의 항몽유적지(抗蒙遺蹟址)
제주도 기념물 제28호. 현재 15리에 이르는 토성(土城)과
삼별초 군사들이 궁술훈련 때 과녁으로 사용했던 ‘살맞은 돌’,
성의 건물 문지였던 ‘돌쩌귀’, 김통정(金通精) 장군이 성 위에서
뛰어내린 발자국이 파여서 샘이 솟는다는 ‘장수물’, 삼별초 군대가
급수로 이용한 ‘옹성물’·‘구시물’, 옥터 등이 남아 있다.
이 유적지는 1977년 호국정신을 함양하고
총화단결을 다짐하는 뜻에서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석성(石城)인 내성(內城)이
위치했던 9천여 평의 경내에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를
세우는 등 성역화되었다.
진도에서 대몽항쟁을 전개하던
삼별초 군대가 제주에 들어온 것은
1270년(원종 11) 11월 3일 이문경(李文京)
부대의 제주 명월포(明月浦) 상륙이었다.
이문경 부대는 이미 제주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던 관군(官軍)과
송담천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함으로써
제주도 내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어 1271년(원종 12) 5월
김통정은 진도의 용장성이 무너지자,
남은 삼별초 군대를 거느리고 제주도로 들어와
이문경 부대와 합세하여 대몽항쟁을 위한
본격적인 방어 시설을 구축해 나갔다.
이 항몽유적지는
1273년(원종 14) 4월
고려 김방경(金方慶)과
원장(元將) 흔도(忻都)가 이끄는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에 의해
삼별초가 토벌되기까지
대몽항쟁의 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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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항몽유적지
애월.,항몽유적지 토성
몽상드 애월
애월 해안도로
애월 장전.,충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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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읍.
동남쪽에 한라산 줄기가 뻗어 있으며,
서북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남해와 접한다.
곳곳에 노로오름(1,070m)·
한대오름(914m)·큰오름(830m)·
괴오름(651m) 등이 분포하며,
특히 남부에 기생화산이 많다.
취락은 주로 300m 이하의
저지대에 분포하며, 일주도로가 있다.
농산물로 브로콜리·양배추·양파·무·마늘·
취나물·부추 등이 나며, 수산업은 미약하다.
지역 문화재로
전통 노동요인 진사대소리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7호)
귀리겉보리 농사일소리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8호)
납읍민속박물관,
금산공원,
어음리 빌레못동굴,
무수천계곡은
연중 많은 관광객,
광령2리 제주조각공원
신천지미술관이 있다.
행정구역은 애월리·곽지리·금성리·
봉성리·어음리·납읍리·상가리·하가리·
고내리·용흥리·신엄리·중엄리·구엄리·
하귀1리·하귀2리·상귀리·수산리·소길리·
장전리·유수암리·고성리·광령1리·광령2리·
광령3리 등 24개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26개리).
읍사무소 소재지
애월읍 일주서로 6322.
면적 202.16㎢, 인구 32,649(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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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못
7~8만년전 구석기인 거주지,
세계 최장의 동굴.,빌레못동굴.
제주 어음리 빌레못동굴
제주조각공원(신천지 미술관)
...........외돌개...........
서귀포시 서홍동 에 위치
(2011 6/ 30 대한민국 명승 제79호.
외돌개 - 높이 20m, 폭 7~10m로
화산이 폭발하여 분출된 용암지대에
파도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돌기둥이다.
수직 해식절벽이 발달한 주변 해안과 해식동굴이
함께 어우러져 특이한 해안 절경을 연출하는 명승지.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를 기다리던 할머니가
돌로 굳어 외돌개가 되었다."
- 할망바위 전설 -.
고려 말, 탐라에 살던 몽골족의 목자(牧子)들은
고려에서 명에 제주마를 보내기 위해 말을 징집.
그러자, 이에 반발해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났다.
"최영 장군은 범섬으로 도망간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외돌개를 장군의 형상으로 치장시켜 놓고 최후의 격전.
목자들은 외돌개를 대장군으로 알고 놀라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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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설문대할망에게는
오백명의 아들이 있었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
설문대할망은 아들들에게
양식을 구해 오라고 하고
아들들이 돌아오기 전에
죽을 끓였는데 솔이 커서
죽 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양식을 구해
돌아온 아들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죽을 맛있게 먹었다
마직막으로
막내 아들이 죽을 먹으려다
어머니의 뼈를 발견하고
어머니의 고기로 만든 죽을 먹은
형들과 살수 없다며 집을 뛰쳐 나갔다
집을 나온 막내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굳어져 외돌개가 되었단다,
........
........
차귀도 앞바다에
서있는 기암괴석을
설문대할망의 막내아들
이라는 전설도 있다.
고기잡이 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다 못해 할머니가
외돌개바위로 변했는데
나중에 할아버지 시신이
바위로 변한 할머니를 찾아와
옆으로 보이는 작은 바위섬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설화에 의하면,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제주도를 강점했던
묵호의 난을 토벌할 때
외돌개 뒤에 있는 범섬이
최후의 격전장 이었는데
전술상 이 외돌개를 장대한
장수로 치장시켜 놓았다,
그러자,
묵호들이 이를 대장근이
진을 치고 있는 것으로 오인
모두 자결하였기에 외돌개는
장군석으로도 불리운다.
..........
..........
이와 같은 전설들로 미루어볼때
외돌개는 '목호의난'과 관련이 깊다.
고려말 목호들은 범섬전투에서 패한 후
패잔세력은 차귀도 앞바다로 탈출한 것일까?
'당시, 그들은 어디로 떠난 것일까?'
명월포
................목호의 난..............
1374년 명나라가 북원(北元)을 물리치려고
제주마 2,000필을 요구해옴에 따라 고려에서는
문하평리 한방언을 제주에 보내 말을 취하게 했더니,
목호들은 "세조황제가 방축한 말을 원나라 적 명나라에
보낼 수 없다"며 말의 공출을 거부한 후 300필만 내놓았다.
이에 명나라 사신 임밀과 채빈이 2,000필이 안 되면
돌아갈 수 없다고 하자 공민왕은 할 수 없이 최영 등을
파견해 목호를 토벌했는데 이때 동원된 토벌군의 규모는
전함 314척 예졸 2만 5,600명, 지나치다 할 정도로 대규모.
이는 당시 목호를 중심으로 한 제주세력이
그만큼 강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최영은 군사를 거느리고 제주에 들어가
반란군 및 주동자 3명을 처단해 난을 평정.
한편, 제주가 평정된 뒤 고려는
나머지 말 1,700필을 채우고자
서둘렀으나 명나라 사신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말 200필만 가지고 돌아갔는데
(300필 중 허약한 말 100필은 제외),
일행이 개주참에 이르렀을 때 호송을 맡았던
김의(金義)가 갑자기 채빈을 죽이고 임밀을 생포해
200필의 말을 가지고 북원으로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고려와 명나라 관계는 경색.
이후에 복잡한 외교문제가 발생했다.
................................................
......북원(北元, 1368년 ~ 1635년)......
명나라의 주원장에게 밀려 몽골 고원의
초원지대로 돌아간 이후 원나라를 부르는 말.
1368년 원 순제(토곤 테무르)는
대도(大都)를 버리고 만리장성
북쪽의 상도(上都)로 패주했다.
1370년 토곤 테무르는 응창(應昌)에서 훙거.
이로써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토곤 테무르의 아들인 원 소종(元昭宗)은
외몽골로 들어갔고 1372년 명 원정군을 격파.
그러나, 코케 테무르가 죽고, 나하추가 명에 항복.
북원 세력은 더욱 쇠퇴하고, 1388년 '브이르 노르'
동북에서 명군에게 대패하였으며, 소종 뒤를 이은
동생 토구스 테무르도 투울강 기슭에서 살해되었다.
이로서 쿠빌라이 가문은 단절되었다.
................................................
.......황우지해안......
바다물이 들어왔다가
암석해안에 갇혀 있어
천연수영장이 된 곳이다.
.
제주도 대표적인 관광명소 중 하나.
외돌개에서 약 5분 도보거리에 있다.
,
평소 많은 관광객들이 들락거리지만
검은 현무암이 마치 요새처럼 둘러쳐져
마음먹고 찾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올레 7코스 시작점 표식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황우지해안
전적비가 서 있는 바닷가 절벽에 닿는다.
황우지해안은 예전에 무장공비가
침투해 전투를 벌린 곳이기도 하다.
...............................................
.애월 '무수천 & 외돌개 해벽' 비경지
.
.
무수천.
.
제주시 애월읍 무수천길 일대
서부산업도로 진입로에 있는., 무수천.
복잡한 인간사 근심을 없애준다는.,비경지.
무수천 비박
2017.01.26 무수천암장 개념도
무수천 암장.
무수천 단산암장.
억겹이 빚은 탐라의 속살.,무수천.
.................무수천계곡..................
제주시 애월읍 무수천길 (애월읍) 일대
제주시에서 서부산업도로 진입로에 위치.
복잡한 인간사 근심을 없애준다 하여 "무수천"
양쪽 바위벽과 흐르는 물을 따라가 보면
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있어 아늑한 분위기.
.
무수천은 외대천으로 흘러가면서 기암절벽과
마주쳐 작은 폭포와 호수를 이루는데 해골바위 등
기묘한 갖가지 형상의 바위들이 특히 눈길을 끈다.
..................................................................
외돌개 해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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