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다른 삶의 향기~* 또 다른 세상 속 이이야기~*
누구나 평범한 인생을 꿈꾼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듯 스쳐지나가고 말지만, 삶을 효과적으로 사는 것의 기준점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아내기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라고 확신해 본다.
남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처음에는 “호기심 반 기쁨 반” 인 듯 하지만, 그렇게 저렇게 아옹다옹하며 하루 일과를 보낼 수 있는 삶이 얼마나 축복 받은 삶인지 30이 훨씬 넘은 지금에 와서야 나의 지난 삶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지만, 선(善)한 행위로서 부끄럽지 않아 기쁘기까지 한다.
아버지가 내 나이 12살 때 돌아가시고 엄마가 재혼을 하신 후 내 삶의 방식이 원래 계획했었던 것에서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듯 보였다. 더군다나 여동생의 교통사고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가 나였기에 그 상황에서 뭐든 평범하게 돌아갔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성적은 점점 떨어지게 되었고 더구나 목표로 삼았던 고등학교는 못가게 되었고 시내가 아닌 읍에 있는 종합고등학교를 가게 되니 친한 친구도 없었던 나에게는 크나큰 관문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항상 누누이 말씀해 주셨던 것은 너는 만 원짜리 후손이니 행실에 올바름이 항상 있어야하고 네 이름에 누가 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에서 엄마가 재혼하며 호적 정리를 하게 되자, 나는 소년소녀가장이 되어버렸고, 내 삶도 그리 녹녹치 않았다. 새엄마 밑에서는 커도 새아빠 밑에서는 크다간 네 인생을 망친다던 고모의 만류에도 내가 엄마 곁에 있었던 것은 …….
엄마가 임신 중이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판단이었지만, “엄마가 아이를 놓고 나면 저 새아빠가 아이만 데리고 가버리면 어쩌지?” “우리 엄마 인생은 뭐가 되지?“ 이런 생각이 들자 그저 엄마 곁에서 엄마가 출산할 수 있는데 도움 주는 길 밖에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적인 면이 독보인 우리 새아빠……. 지금도, 친구처럼 반말으로 아빠와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아빠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신다. 아빠의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아빠의 소중한 보물 1호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위험하기 그지없는 그 걸로 할머니 태워드리다가 다쳐서 시골에 계시던 할머니가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 오셔서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며칠만 같이 생활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그건 나의 크나큰 오산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의 거의 모든 수발은 내 담당으로 돌아왔고, 끝끝내 기저귀교환까지도 내가 하게 되었다. 나의 암담하기 그지없다고 표현할 수 있는 기간은 바로 고3 이었다. 부모님은 돈을 벌려고 가야하니 “선미 네가 할머니 점심, 동생들 챙겨라” 하시며 아침 일찍 나가기 바빴었고, 나는 고3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매일 4교시만 하고 집으로 이른 귀가를 하며 서글픈 생각도 아리송한 생각도 착잡한 생각도 한데 어우러진 한 잔의 차를 음미 하는 듯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런 죄 없는 할머니는 아빠의 눈치만 보고 엄마는 그러한 환경을 불편해 했고, 아무런 죄 없는 나도 어린 두 동생들도 그냥 저냥 그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은 그래서 내가 부모님께 제안을 했었는데 그건 더욱 더 씨알도 안 먹히는 것이 되고 말았다.
“나도 이제 기저귀 교환 못해~!” 라고 하니 “그러면 앞으로 용돈 달라고 하지마라~!” 라고 받아치기 바쁘신 우리 엄마가 왜 그렇게 야속하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철이 더 들도 난 지금에 와서야 그렇게 엄마가 나에게 말했는지 다는 아니어도 조금은 더 이해가 되지만, 나이 탓인지 그때는 나에게만 그렇게 대한다고 많이 속상했었다.
남들과 같은 동선이 아닌 나 혼자의 멀고도 먼 길을 가는데 마냥 기분 좋을 일은 없으니까 나도 혼자서 가슴앓이를 많이 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확히 4교시가 끝이 나면 쓸쓸하게 터벅터벅 나의 발걸음은 집으로 향해 도착한 집안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왜냐하면 어린 동생들이 집안에 방치되어 있으니 제대로 된 것이 없었던 것이라 말하는 격이 더 합당할 듯하다. 더군다나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까지 나의 손만을 바라보고 있는 상활이었다. 그러하니 최대한 빨리 머릿속을 정리하여 순차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정리가 가능했었다.
집안 청소를 뒤로하며 항상 할머니 점심, 동생 두 명 점심, 그리고 내 점심을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였다. 반찬거리가 많지 않은 관계로 그리고 나의 미숙한 요리솜씨로 해결가능 한 것은 “김치 볶음밥”이 최상의 메뉴였다. 재료가 많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라도 점심을 든든하게 먹고 나니 살듯 하였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난 나는 할머니의 기저귀 교환을 해 드리고 손톱, 발톱을 미리 정돈해 드렸다. 할머니께서는 나의 친 할머니는 아니셨지만, 온순하신 성격에 항상 큰 동생을 예쁘게 바라보시곤 했다. 할머니에겐 첫 손녀여서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랑이 옆에서 그 둘을 지켜보면 뚝뚝 떨어졌었기 때문이다. 부럽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할머니께 해 드릴 일이 끝나자마자, 동생들이 집을 더 어지럽히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시간이 허락 할 때 마다 글자를 가르쳐 주었다. 서점에서 사온 “가나다라 판” 을 이용한 여러 가지 단어들을 수시로 주입시키며 빨리 한글을 깨우치길 간절히 바랐다.
고3의 일상과 다른 나의 지나온 그 시절 시간에 대해 부끄럽거나 안타깝진 않지만, 그래도 남들이 평범하게 하는 것을 나는 못하고 집에 와서 전혀 상상도 못할 일들을 해냈다는 것에 자부심도 생기면서 앞으로 삶에 더 힘든 일이 있을 때를 미리 예행연습을 했다고 생각하며 디딤돌 삼아 희망을 가지며 생활해 나갈 것이다.
그런데 고3 끝날 무렵, 담임선생님의 말에 충격을 먹고 잠시 동안 머뭇거린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나보고 “선미 네가 어차피 지금은 아프니까 건강할 때 대학교는 얼마든지 갈 수 있어.” 하시며 진학문제를 무마시켜 버리셨다. 그 땐 정말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이 3년차 지나가고 있을 무렵…….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라보며 나를 자극시킨 하나의 장면이 나의 머릿속을 계속 스치었다. 이제 갓 대학생이 된 듯 해 보이는 여자애들의 옷차림과 잘 안 볼 것 같은 전공서적을 팔에 끼우고 작은 소지품 가방까지…….
더 이상 나를 이렇게 방치해 두면 안 될 듯하였다. 이렇게 까지 내 인생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는 깊고 깊은 충동, 감정이 한데 섞여 나를 한 없이 자극제가 되어 날 시험에 빠뜨렸다.
결국, 3년 있다가 사회복지학과에 진학을 하게 되었고 집은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매일 매일을 시골에서 등하교하는 데 힘듦을 겪긴 했지만, 내가 선택한 이 길에서 더 이상의 후회는 없었다. 매일 약을 주기적으로 복용하면서도 공부에 대한 애착과 열정이 누구보다도 컸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정말 잘 한 것이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것들은 내가 할머니께 잘 효도를 해서 좋은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고 또한 남들보다 대학교를 3년 늦게 들어 온 것도 내 삶의 길이 고난이 곳곳에 움켜잡혀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한 듯 여겨진다. 비록, 현재 할머니께서는 지병으로 세상을 달리하셨지만, 그렇게 옥신각신 할머니와 친근한 정이 들어버렸다.
매일을 바쁘게 버스 타고 다닌다고 힘든 시점에서 또 다른 제의가 들어왔다. 바로 한 할아버지의 부탁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자신이 왕년에 잘 나갈 때를 거침없이 말씀해 주시면서 “다른 건 다 되겠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손톱 깎는 것이 겁이 나고 잘 보이지도 않아.” 하시며 그 일을 부탁하시는 것이다.
나도 남의 손톱 깎는 일은 걱정이 앞섰지만, 과감하게 하고 나니 거의 100%에 만족도를 보이셨다. 그 후로도 몇 번 이나 더 해드리고 되었고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그 이후는 잘 뵙지 못했다.
옛날부터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곤 했던 나에게 아주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던 일들인 것 같다. 더구나 고등학교 때는 효행상도 받았었고 전동휠체어 할아버지 손톱까지…….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뭐든지 특정한 줏대를 가지고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그런데 사람은 한치 앞도 모를 일이라더니 그 두 가지 일이 내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요양보호사로 또 노인요양원에서 사회복지사로 일을 해내는데 많은 힘을 제공해 주는 주된 원동력으로 자리매김하여 나를 더욱 더 돋보이게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등고선 같은 인생길에 사람마다의 고뇌와 번뇌를 비롯한 여러 가지 고통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젊은 나이에 누구보다도 그 진리를 터득한 것 같다는 생각에 힘이 더 많이 난다.
“사회복지학과”에서도 사회에 복지를 구현하는 과이지만, 실상을 되돌아보면 나 자신이 그러한 과에서 얼마나 빛을 낼 수 있는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 재빨리 분석해 내는 일을 하는 것이 더욱 더 현명한 일이란 생각이 들며, 그것은 남이 해 줄 수 없는 자신만의 개성에서 인성에서 분리되는 모든 것들을 통틀어 만날 수 있는 값진 보물들이란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지금에 와서 나의 고3 시절을 처음에는 불평 · 불만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남들보다 더 다양한 적성을 찾아 대학진학까지 성공을 했다고 본다. 참아 내기가 어려운 일을 그 시간들 동안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환난 속에서도 “이겨내리라”는 희망을 간직해 오고 있으니 진심이 통하고 이제는 모든 걸 슬기롭게 잘 이겨 나가도록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매김한 것을 보면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옛말이 하나도 무색하지 않다고 본다.
다른 사람들과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지 못해서 많이 속상하고 서늘했던 내 마음이 이제는 연료 가득한 연탄의 온기가 되어 내게 다가오니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후회를 행복의 기초 점으로 탈바꿈해 준 것에 깊은 감사를 하며 열심히 살아나갈 것이다.
“난 잘하고 있어! 앞으로도 잘 할 용기 · 희망이 가득해!” 하며 말이다.
<<색다른 삶의 향기 7 행시>>
색 : 색다른 삶의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입니다.
다 : 다시는 오지 못할 나의 젊음을 불타는 열정으로 도색해 봅니다.
삶 : 삶에 있어서 “희노애락”은 누구나 있는 존재해도 나만의 것을 찾기는 어렵기 마련입니다.
향 : 향수향이 아닌 인간미 넘치는 나만의 삶의 향기에 도전하며 매진 중입니다.
기: 기러기처럼 철따라 다른 곳을 향유하더라도 내 삶의 진리는 불변함을 확신해 봅니다.
첫댓글 어려운 삶 살아오시느라 수고많으셨어요^^
타인을 위하지 않으면 안되는 삶에서
이젠 스스로를 위한 것이 많은 삶을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