赤壁 〈적벽〉
두목(杜牧)
부러진 창 모래에 묻혀도 쇠는 아직 삭지 않아
혼자 갈고 닦으니 전 왕조의 것임을 알았네
동풍(東風)이 주랑(周郞) 편을 들지 않았더라면
봄 깊은 동작대(銅雀臺)에 두 미녀 교씨들 갇혔으리라.
折戟沈沙鐵未銷 (절극심사철미소)
自將磨洗認前朝 (자장마세인전조)
東風不與周郎便 (동풍부여주랑편)
銅雀春深鎖二喬 (동작춘심소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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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釋] 부러진 창이 모래 속에 깊이 파묻혀 있어 지금 그것을 파내어 보니, 창이 있는 부분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 창을 갈고 닦은 후 나는 그것이 전조(前朝)의 유물임을 알았다. 만일 동풍이 주유(周瑜)에게 유리한 쪽으로 불지 않았더라면, 동오(東吳)의 이교(二喬)는 조조(曹操)에게 잡혀 가서 동작대(銅雀臺)에 봄빛이 깊을 적에 大喬(대교)‧小喬(소교)가 모두 그 안에 갇혔을 것이다.
[解題] 이것은 삼국시대 위나라 조조의 군대가 적벽에서 蜀(촉)‧吳(오)의 연합군에게 패배를 당했던 이른바 ‘赤壁大戰(적벽대전)’을 소재로 한 영사시(詠史詩)인데, 두목(杜牧(의 신선하고 독창적인 수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2구는 시인이 유물을 통해 감흥을 일으킨 과정을 쓰고 있다. 시인은 적벽의 옛 전장에서 부러진 창을 발견하고 그것을 갈고 닦은 후, 그것이 6백여 년 전에 있었던 적벽대전의 유물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시인의 실제 경험이라기보다는 3‧4구의 의논(議論)을 일으키기 위한 일종의 장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작법(作法)은 동시대 다른 시인들의 영사시(詠史詩) 작법과 비교해볼 때 매우 새롭고도 특별한 경지라고 논자들은 평가한다.
3‧4구에서는 ‘동풍’에 무게중심이 있는데, 여기에서 두목의 탁월한 역사인식을 읽을 수 있다. 적벽대전에서 만일 동풍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손권(孫權)과 유비(劉備)의 연합군은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조조의 군대가 곧장 쳐들어와 동오(東吳)의 두 미인은 곧 그에게 잡혀 동작대 안에 갇혔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역사를 논하는 것은 상투적이지 않으면서 신의(新意)가 있다. 자세히 완미해보면 그 말에 담긴 언외의 뜻을 알 수 있다. 즉 조조의 문재(文才)와 무략(武略)은 결코 주유(周瑜)에게 뒤지지 않았고, 군사적인 역량에 있어서도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보다 훨씬 뛰어났다. 적벽의 일전(一戰)에서 조조의 군대가 패한 것은 주유가 동풍의 도움으로 성공한 것에 불과하니, 이 한 번의 전투만 가지고 성패를 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역주
역주1> 赤壁(적벽) : 제목이 〈赤壁懷古(적벽회고)〉라고 되어 있는 본도 있다. ‘赤壁’은 지금의 湖北省 赤壁市 서북쪽에 있는데 長江 남쪽 기슭에 우뚝 서 있다. 산의 바위가 붉은색을 띠고 있어 ‘적벽’이라고 부른다. 三國時代에 赤壁大戰이 일어난 곳이다.
역주2> 折戟沈沙鐵未銷(절극심사철미소) : ‘折戟(절극)’은 부러진 창을 가리킨다. ‘戟(극)’은 옛날에 쓰던 무기로, 장대 끝부분에 나뭇가지 모양의 날카로운 칼이 달려 있는 창을 말한다.
역주3> 將(장) : 여기서는 ‘가지고’의 뜻이다.
역주4> 東風不與周郞便(동풍부여주랑편) : ‘周郞(주랑)’은 三國時代 吳나라의 大將이었던 주유(周瑜)이다. 이 구절은 유명한 ‘赤壁大戰’을 가리킨다. 漢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13년(208), 曹操는 군대를 이끌고 南下하여 吳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런데 북방의 士兵들은 水戰에 익숙하질 않아서 이에 굵은 쇠사슬로 戰船을 모두 연결하여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였다. 주유의 部將 황개(黃蓋)는 자신의 배에 기름에 적신 마른 장작을 싣고서 장막으로 그 위를 덮고는 거짓으로 조조에게 항복하여 자신의 배가 조조의 배에 가까이 닿게 되자 오나라 병사들이 불을 놓았고, 때마침 동남풍이 불어와 불이 더 세차게 타올랐다. 이에 한 덩어리가 되어 있던 조조의 전 해군은 이 일격에 불에 타버렸고, 조조의 백만 대군은 이 싸움에서 태반이 불에 타 죽거나 오‧촉 연합군에게 쫓겨 목숨을 잃었다.
역주5> 銅雀春深鎖二喬(동작춘심소이교) : ‘銅雀(동작)’은 대(臺)의 이름이다. 옛터가 지금의 河南省 임장현(臨漳縣) 서남쪽 업성(鄴城) 안에 있다. 《三國志》 〈魏志(위지) 武帝紀(무제기)〉에 “건안 15년에 동작대를 지었다.[建安十五年作銅雀臺]”라 되어 있다. 누대의 꼭대기에 큰 銅雀이 하나 있어서 이 같은 이름을 얻었는데, 조조가 만년에 연회를 즐기던 곳이다. ‘二喬’는 동한(東漢) 때 교현(喬玄)의 두 딸을 가리키는데 모두 國色이었다. 손책(孫策)이 대교(大喬)를 아내로 삼고 주유(周瑜)가 소교(小喬)를 아내로 삼았는데, 세상에서 이 둘을 ‘이교(二喬)’라고 불렀다. 《三國志》 〈吳志 周瑜傳(주유전)〉에 “喬公(교공)의 두 딸은 모두 나라에서 이름난 美人이었다. 孫策이 스스로 大喬를 맞이하였고, 周瑜는 小喬를 맞이하였다.[喬公二女 皆國色也 孫策自納大喬 瑜納小喬]”라고 하였다.
본 자료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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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벽부(前赤壁賦)-소식(蘇軾:소동파)
<후적벽부(後赤壁賦)-소식(蘇軾:소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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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목(杜牧, 정원 19년(803년)~대중 6년(852년))은, 중국 당나라 후기의 시인이다. 경조부(京兆府) 만년현(萬年縣, 지금의 산시 성 시안 시) 사람으로 자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이다.
만당 시기 당시(唐詩)의 섬세하고 기교적인 풍조에 비해 평이하면서도 호방한 시를 지었다. 그의 시는 풍류를 즐기기 위한 풍류시와 과거의 역사를 노래한 영사(詠史), 시사 풍자에 뛰어날 뿐 아니라 요염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럼에도 강건한 면을 모두 갖추어 때때로 리얼리즘을 떠나서 인상파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강남(江南)의 풍경을 그림처럼 표현한 〈강남춘〉(江南春)이 유명하며, 양주에서 풍류재자(風流才子)로서 지내덜 시절의 모습을 그린 〈견회〉(遣懷)는 현실을 벗어난 가상적이라는 시풍(詩風)을 반영하고 있다.
성당 시대의 시인 두보와 작풍이 비슷하며, 노두(老杜) 두보와 구별하기 위해 소두(小杜)라고도 부르며, 동시대의 시인 이상은과 함께 「만당의 이두(李杜)」로 통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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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당시삼백수]적벽(赤壁/적벽회고)-두목(杜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