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가는 길(3)
어제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를 했는지 아침에 일어난 나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눈은 퉁퉁부었고 몸은 움직여지지 않을 만큼 무거웠다. 그래도 어떻게 찾아온 곳인데 그냥 물러설 수 없었다. 방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짐을 챙겼다. 창밖에 보이는 정경은 비는 내리지 않고 잔뜩 흐린 날씨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오늘의 일정을 바꾸었다. 조금 욕심을 내서 안동 이웃에 있는 청송을 찾기로 했다. 사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청송의 주왕산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발동한 것이다. 일단 청송방향으로 일정을 잡았으니 가는 길목에 혹 들러서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들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34번과 31번 국도로 이어지는 청송을 향해서 차를 몰았다. 그 길은 임하댐을 지나는 길이기에 역시 수려한 산하를 한눈에 감상하면서 드라이브할 수 있었다.
청송을 가기 위해서 접어든 34번 국도를 따라서 임하댐을 지나 얼마를 가자니 지례예술촌(知禮藝術村)을 안내하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숙소를 나올 때 들러보려고 마음먹었던 곳이다. 수곡교(水谷橋)를 따라 임하댐을 이루는 물길을 건너자 만나게 되는 것은 무실종택과 서당이 눈에 들어왔다. 내려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안동지방에서 양반행세나 글읽은 행세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는 길이 정해진 터라 들러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언젠가 기회를 만들 수 있게 되면 다시 찾아보리라는 마음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미련을 버렸다.
갑자기 나타나는 길 앞의 상황에 황당했다. 더 이상 포장도로는 없었다. 비포장도로가 포장도로를 잇고 있는 것이 얼마나 이어지는 것일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승용차로 갈 수 있을지 염려가 앞섰다. 길도 사나왔다. 좁은 것은 물론이고 세찬비가 내린 후라서 인지 계속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었다. 얼마를 망서렸을까. 예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벌써 차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정말 험한 길이었다. 안동을 안내하는 지도에 표시된 곳이라면 포장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이렇게 험한 길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사실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무조건 가보자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었다.
약 4Km를 그렇게 가파른 산을 굽이굽이 올라갔다. 정상에 올랐나 하면 다시 새로운 등성이를 올라야 했다. 다시 콘크리트 포장이 된 울퉁불퉁한 길을 4Km를 더 갔을 때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임하댐의 물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골짜기 어디에도 사람이 살고 있음직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산길을 돌아돌아 내려가기를 얼마였을까. 임하댐의 물줄기가 손에 잡힐 듯한 골짜기에 자리한 예사롭지 않은 고택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다른 민가들이 전혀 없는 곳인데 어떻게 거기에 그런 고택들이 모여있는지. 차를 세우고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분위기를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어떤 곳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기웃거렸다.
아침에 이곳을 찾아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지례예술인촌이라는 이름이 예인들이 모여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차에서 내려 건물 처마에 걸려있는 현판을 보면서 나의 생각을 모두 버려야만 했다. 그것은 예사로운 건물이 아니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지촌종택(芝村宗宅)이었다. 조심스럽게 종택 옆에 있는 건물부터 찾아들었다. 서당이었다. 선비의 학덕이 깊이 배인 것을 느끼게 했다. 옆문으로 이어지는 종택과 사랑채는 다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종택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안내문이 더 이상 발길을 옮길 수 없었다. 겉에서 볼 수 있는 사랑채는 역시 선비들의 공간이었다. 또 이어지는 서간(書幹)과 글방도 볼 수 있었다.
거기서 문중의 종부(宗婦)를 만났다. 종부의 품위가 느껴지는 외모와 말씨가 더욱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가게 했다. 종부는 말이 거의 없었다. 묻는 말에 단답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궁금했던 것을 몇 가지 물었다. 제일 궁금한 것은 왜 종택인데 예술촌으로 홍보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유를 설명했다. 바로 발아래 있는 임하댐의 물에 잠긴 곳이 원래 종택의 터인데, 임하댐이 물을 담기 시작하면서 1988년 뒷산이었던 현재의 자리로 이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달리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없고 해서 예술이나 글 쓰는 사람들이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친김에 요금도 물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사람들이 찾지 않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하룻밤에 1인당 3만 9천원이란다. 그러니 작품활동하는 사람들이 머물기는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매력있는 곳이었기에 언젠가 한번 가족들과 함께 딱 하룻밤만 머물러 보고싶었다.
그렇게 종부와 몇 마디 나누고 다시 사당과 강당(井谷講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건물로 향했다. 들어가는 문은 겸덕문(謙德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의 학덕(學德)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건물의 모양새였다. 강당 마당에서 종택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임하댐의 물이 만들어주는 경관은 분명 그곳은 다른 곳이었다. 이웃도 없이 오직 거기 종택의 몇 식구들이 살고 있지만, 시간이 머물러 있는 곳처럼 느껴지는 정말 고즈넉한 골짜기의 풍경에 한참이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제 큰길까지 나올 일을 생각하면 아득했다. 하지만 다른 목적지가 있으니 나그네 된 자가 다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힘들어하는 자동차를 끌고 겨우 다시 등성이에 올랐다. 갈길을 재촉해서 34번 국도까지 나왔다. 이미 1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부지런히 달렸지만 60Km의 제한 속도는 나의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다. 청송까지의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는 길은 경북의 산악지대를 모두 거치는 기분이었다. 너른 들은 어디도 보이지 않고 오직 산, 또 산뿐이었다. 진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넓은 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진보는 원래 군(郡)이었는데 후에 청송군에 합병되었다고 한다.
진보에서 31번 국도 남쪽방향으로 갈아타야 청송에 이를 수 있다. 아쉬운 것은 안동에서 주왕산까지 가는 길목에 세워진 어떤 이정표에도 주왕산을 안내하는 표시는 없다는 것이다. 지도에 의지해서 가는 수밖에. 도로표시가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이 눈에 띄었다. 청송읍내를 지나쳐서 얼마를 더가면 주왕산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비로소 나온다. 거기서 다시 9Km를 들어가야 주왕산에 이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점심을 역시 늦은 시간에 해결을 해야 했다. 관광지라 먹거리가 괜찮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여의치 않았다. 이럴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어딜가나 산채비빔밥이다. 그러나 맛은 역시 그랬다. 그래도 한끼의 식사니 감사히 먹고 주왕산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본래 주왕산 등반계획에 없었다. 꼭 보고싶기는 했지만. 그래서 행색도 등산에 적당하지 않은 모습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주왕산 품에 안겨보고 가는 것이 바람인지라 샌들을 신은 채 산 입구로 향했다.
역시 입장료가 들어야 했다. 조물주는 그냥 주었는데 인간은 뭐든지 돈이 든다. 하지만 입장료를 내고 불과 10여 미터를 가자 바로 앞에 서있는 바위산, 그것은 잠시 전에 입장료 생각이 금방 없어지도록 했다. 내가 선 곳과 바위가 있는 곳에 어떤 공간도 없는 것처럼 다가와 있는 바위의 위용에 압도당함을 느끼게 했다. 그 아래 자리하고 있는 산사는 아쉬운 대로 조화를 이루었다. 한참이나 그 앞에 자신을 세우고 생각에 잠겼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작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입구를 지나 계곡을 따라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먼저 다가오는 것은 아쉬움이다. 계곡을 대할 수 있는 주변에 상점들이 빼곡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오가는 사람들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그대로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음 좋았겠는데 말이다. 얼마나 그렇게 인간들이 빼앗은 계곡을 지나니 그런대로 계곡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함께 산책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날씨가 흐리기도 했지만 숲에서만 맛볼 수 있는 향기와 소리를 접할 수 있었다. 정겨운 새소리는 물론이고, 계곡에 작은 소를 이루면서 흐르는 물소리, 그리고 작게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까지 온갖 소리가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주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샌들을 신고 오르기에는 한계를 느끼게 하는 지점이 있었다. 거기서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고 계곡이 만들고 있는 절경을 느끼면서 그동안 잊었던 삶의 여유를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다녔던 산을 전혀 오르지 못한지가 10년이 넘었으니 누구를 탓해야 할지. 애써 자신을 위로하려고 해도 남겨진 것은 없는데 세월만 갔음을 고백하게 된다. 역시 증명사진이 중요하니 사진을 찰칵.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언젠가 제대로 산행준비를 하고 다시 찾아오리라고. 몸의 열과 더위가 범벅이 되어서 몸은 거의 흐물흐물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기회가 기회이니 만큼 포기는 할 수 없었다. 다시 주차장으로 나와서 준비한 얼음물 한 컵을 들이키고 다시 차를 몰았다. 주왕산 주변에도 찾아볼 곳이 많다. 하지만 정해진 일정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들어갔던 길을 다시 나오자면 35번 국도까지 9Km의 거리다. 약 7Km쯤 나오면 왼쪽에 신축된 청송민속박물관이 있다. 규모에 놀랐다. 이렇게 깊은 산중에 있는 작은 지방자치단체가 이렇게 큰 규모의 민속박물관을 마련했다는 것이 기뻤다. 처음 외국생활을 시작했을 때 가장 부러웠던 것이 지방의 작은 마을에도 그 마을의 민속자료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지역의 민속자료들이 보존되고 뿌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러나 차를 세우는 순간 썰렁한 분위기는 스스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입구에 이르렀을 때 아무도 없는 곳에 한심한 듯 앉아 있는 관리인이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다. 오늘 하루동안 아무도 찾지 않았다는 것이 그 대답이었다. 휴가철에 학생들 숙제하려고 찾는 사람이 좀 있고, 그 이후로는 거의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의 당연시하는 대답이었다. 족히 10억원 가까운 세금이 들었을 법한데, 그리고 관리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으련만 찾는 사람이 없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답답한 마음도 들었다.
입장료도 있었기에 지불하고 들어갔다.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것이 조금 더 전문성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과 이 고장의 특별한 민속자료들이 모아졌으면 하는 생각이 아쉬웠다. 야외 전시장도 있었지만 겨우 주막과 장승이 전부였다. 작은 것이라도 좋은 데, 우리는 아직도 전시행정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닌지.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민속자료실로 만들어지면 훨씬 이 고장의 민속자료들을 모으기도 쉽고 보존하고, 후세에 역사의식을 전해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기면서 돌아왔다.
이번에는 청송읍내에서 달기약수탕을 찾았다. 워낙 유명하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하지만 찾아가는 과정에서 역시 이정표의 혼동이 아쉬웠다. 겨우 찾았지만 도착해서도 물어야만 했다. 지척에 두고 물어야 하는 아쉬움은 물맛을 덜하게 했다. 원탕이라 하는 곳을 먼저 찾아서 몇 모금 마셨다. 일부러 약수를 찾아다니는 사람은 아니지만 전국에 있는 약수는 거의 맛을 본 터라 그리 새롭지는 않았지만 철분이 많이 녹아있는 탄산수였다. 많이 마시면 오히려 속이 안 좋을 수도 있으니 적당히 마시고 일어서서 나중에 개발한 중탕, 상탕까지 모두 맛을 보고서야 돌아섰다.
이제는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이미 서산에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힘든 일정이었기에 숙소에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첫 날 먹자골목에서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안동의 음식을 먹어야겠는데 무엇이 좋을지. 젊은이는 안동찜닭을 추천했고 어디가야 참 맛을 볼 수 있다는 정보까지 제공해 주었다. 구시장 골목을 찾았다. 그곳에서 닭골목이라는 골목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골목에 들어서니 모두 찜닭집이다. 어느 집이 참 맛을 볼 수 있는 집인지. 한바퀴를 돈후에 결정했다.
한 집을 택하고 들어섰다. 인천에서 안동찜닭을 먹어보기는 했지만 본바닥의 맛이 어떨지 기대 반 염려 반이었다. 한 마리를 주문해야 한단다. 식사량이 적은 터라 걱정을 하면서 주문을 했다. 잠시 후 커다란 쟁반접시에 그득한 찜닭이 등장했다. 먹기 전에 아내와 나는 서로 너무 많다는 목언(目言)을 나누었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역시 맛이 그랬지만, 그래도 안동에서 이만한 맛을 볼 수 있었다는 위로를 받으면서 맛있게 먹었다. 결국 남길 수밖에 없었기에 내 식사룰은 깨졌다. 하지만, 오늘은 몸이 그런 대로 견뎌 주었고 하루의 여행을 무사히 할 수 있었으며, 이렇게 안동이 원조인 퓨전요리까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니 감사하고 기쁜 하루였다.
<2003. 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