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지만 이긴다는 것 / 백영옥 소설가
흑백 요리사’의 최종회를 봤다.
흙수저 무명 요리사와 백수저 유명 요리사 사이에서
우승자가 결정되는 순간, 개인적으로 이 모든 경연이
‘졌지만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압축 서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자보다 오히려 패자에게 훨씬 더 눈길이 갔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이 흥미로웠던 건 기존의 클리셰를 뒤집기 때문이다.
이미 가진 게 많은 사람과 잃을 게 없는 사람 중
누가 더 리스크가 클까.
위험할 수도 있는 과감한 모험을 선택한건
무명의 신인이 아닌 기득권자인 백수저 셰프였다.
많은 성취를 이룬 사람은 왜 매번 성공만 하는 것처럼 보일까.
이 성공의 착시 현상은 왜 나타날까.
나는 그것이 실패를 대하는 그들 특유의 태도에 있다고 믿는다.
이런 태도가 각인되려면 무명일 때
성공보다 오히려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그래야 실패가 성공에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인식이
오롯이 몸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성공의 방정식은 과거와 달라진다.
실패가 ‘시도’로 재 정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는 것만큼 중요한 건 멋지게 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실패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진 ‘하타무라 료타로’는
좋은 실패와 나쁜 실패를 구분한다.
도전 과정에서 배움이 있으면 좋은 실패고,
부주의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나쁜 실패다.
가장 나쁜 건 실패가 두려워서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이다.
실패는 없을지 몰라도 그런 태도 자체가 바로 실패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가진 의문 하나가 풀렸다.
성공을 향해 올라가려는 노력과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노력 중 어떤 게 더 절실할까.
내 예상을 뒤집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이
훨씬 더 집요하고 강박적이란 걸 그때 깨달았다.
인터뷰를 마친 뒤 적었던 문장이 생각난다.
눈에 보이는 나무의 높이는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의 깊이에 비례한다.
더 어려운 쪽은 언제나 노력의 ‘강도’가 아니라 ‘지속’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大家가 된 이유다.
------------
* 백영옥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 석사.
'빨강머리 앤'과 '키다리 아저씨'를 좋아하는 유년기를 보냈다.
패션지 '하퍼스 바자'의 피처 에디터로 일했으며
2006년 단편 '고양이 샨티'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2000년대 한국 여성들의 사랑 방정식을 간결한 문체와
흡입력있는 스토리로 표현해 주목받고 있는 소설가 백영옥은
고생 끝에 오는 건 '낙樂'아닌 '병'이라 믿으며, 목적 없이 시내버스를 타고
낯선 서울 변두리를 배회하는 취미가 있다.
출처 : 무진장 - 행운의 집
첫댓글
클리셰 ([불어]cliché)
진부하거나 틀에 박힌 생각 따위를 이르는 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