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가다릴찌니라”(롬8:24-25)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
장래에 속하고 소망해야 하는 어떤 것을 자기들의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붙잡을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는가?
만일 여러분이 약속된 것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소망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인식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마귀가 와서 여러분을 충동시켜서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능하다고 유혹한다.
만일 우리가 이 원리를 진정으로 포착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로도 결코 놀라지 말아야 한다. 절망적이가나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전5:7).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그리고 소망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어떤 일이 약속의 차원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이 오기까지 기다릴 준비를 한다.
그것은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로서 진리가 된다.
“이 원리를 포착한다면 그것을 참음으로 기다리라”
이 진술은 동시에 커다란 위안과 용기를 붇돋아 주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 권면은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극적인 권면이다.
고린도후서 5장 2-4절에서 “...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은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 바울의 가르침은 단순히 소극적이거나, 이 세상에서 떠나고 싶은 욕망을 하나의 도피적이고 해방적인 무엇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의 자세는 본질적으로 적극적이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그리스도인은 일차적으로 현재의 ‘입은 것’을 제거하는데 관심을 두지 말아야 된다. 그가 바라는 것은 ‘덧입고자’하는 것이어야 한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그의 원하는 것은 ‘몸을 떠나는’ 것이라기 보다는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하며, “덧입고자 하며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되는” 것을 원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
여기에 ‘기다린다’는 것과 ‘참음’의 두 요소가 있다.
잘못된 번역은 모든 강조점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훌륭한 인내에 주어져 있다.
그러나 사도의 의도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우리 자신의 참음에다가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이 사건의 영광에 두고 있는 것이다. 곧 우리가 열심히 고대하고 기다리고 있는 이 위대한 사건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첫째, ‘기다리라’ 이 말의 충분한 의미는 ‘기쁘게 열심히 기다리는 것’이다.
“...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하도다”.(시130편5-6절)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좇아가노라”(빌3: )
더 나아가서 사도는 우리가 열심히 참음으로 기다려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참음’의 의미는 ‘지치지 않고 참으며 견디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지치지 않고 견뎌내고 참고 부단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수동적이 아니고 매우 강하고 능동적인 덕행이다.
그것은 환난의 결과로 인해서 더 자라나고 발전한다.
여러분은 소망에서부터 인내로, 인내로부터 연단으로 그런 다음에 다시 소망으로 되돌아 간다. 이러한 단계를 산출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환난의 효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진리는 하나의 원과 같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리스도인은 열심과 인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시112:6-8)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격을 특징지을 수 있는 완벽한 균형을 보게 된다. 그는 부단하고 믿을 만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사람과 신령한 사람 사이의 차이를 예증하여 준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광을 말하자면 그의 머리는 하늘에 있고 발은 땅을 든든히 디디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간절히 기다리고 갈망하는 것의 본질은 소망은 사람의 삶과 삶의 방식에 영향을 주는 어떤 실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어떠한 이론적인 문제를 붙잡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 영광을 진실로 갈망하고 있느냐이다.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가하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을 강렬하게 원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시는 것”을 고대했던 것이다.
만일 우리의 이러한 일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우리로 하여금 똑같은 갈망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는 지체없이 자기를 살펴보는 작업을 착수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열심히 참음으로 어떻게 기다릴 수 있는가?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을 간절히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바란다면 이 현대에 관한 정확한 진리를 인식하라.
세상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것에 사로 잡히지 않아야 한다.
세상에 대해서 통찰하고 있어야 하며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도록 하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그것들을 제거하고 그것들과 결별하라.
둘째, 여러분이 누구이며 여러분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상고하라.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살리심을 받았다.
우리는 율법과 관계를 청산하였고, 죄에 대하여 죽였고, 새로운 사람들이다. 여러분은 더 나아가서 “이것이 내게 진리인가?”라고 생각하고 묵상하라.
이것이 기독교이다. 이것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알았던 방식이다.
어째서 그들이 모든 사람들을 흔들었고 모든 세상을 뒤엎었는가?
그들이 위엣 것에 대하여 생각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현실적으로 생각되게 될 때까지 계속 생각하고 간구하라.
성령께서는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으신 것이다.
여러분이 그 다른 체제를 ‘의식’하게 되어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그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 될 때까지 이러한 일을 계속해 나가시기를 바란다.
우리 자신이 언젠가는 떠나게 될 터인데, 만일 우리의 머리로 아는 지식이 모두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곳으로 인도함을 받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얼마나 가련한 그리스도인의 세대인가?
저는 지난 100여년 동안에 무엇이 잘못되어 나갔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
저는 두려움을 가지고, 그 대답은 우리가 너무나 주관적이고, 언제나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진리를 생각하고 묵상하고 그것을 생각지 않았다는데 원인이 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바란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시고 계신 것을 바라보기 바란다. 그것이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제게 있어서 우리가 “참음으로 열심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복된 소망을 기다리는‘ 방식은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