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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동력은 지적 호기심, 제 머리로 끊임없이 생각할 때
1초 전의 나와 1초 후의 나는 달라집니다.” - 이어령
국문학교수이자 평론가 겸 언론인.
이어령 교수는
1934년 충남 온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22세 때인 1956년
<문화예술지>에 기고한 '카타르시스 문학론'으로 평론가로 등단한 뒤,
한국일보에 김동리, 황순원 등 당대의 거장들을 비판하는
'우상의 파괴'를 발표,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1967년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했으며
1990년 초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하면서 학교를 떠났다가
1995년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강단에 복귀했다.
2001년 9월 끝나고
'헴로크를 마신 뒤 우리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 지식 정보 지혜'라는 주제로
고별강좌를 가진 뒤 교직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서울, 한국, 경향, 중앙,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새천년준비위원장을 역임했다.
2009년에는 제3회 제주세계델픽대회 명예고문과
Korea CEO Summit 명예이사장,
2010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으며
2010년 4월에는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창조위윈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로서
2012년 10월 22일에는 세종학당 명예학당장에 위촉되었다.
이어령 교수는 주로 국제화시대에 나아가야할 한국의 자세에 대해 제시하며
우리문화를 알리는데 힘썼다.
그는 또한 '한국과 한국인',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등 사회의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다수의 저서로
집필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 시대 지성을 대표하는 석학(碩學) 이어령의 인터뷰 내용을 알아보자.
평론가에서 언론인, 교수,
그리고 문화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종횡무진 활약해 온 그는
한마디로 놀라운 ‘창조자’다.
그의 글은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사실을 뒤집어,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여든의 나이가 무색하게 그의 지적 여정은 쉴 틈 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어령의 인생에서 ‘창조’란 어떤 의미일까.
"저는 너무 부자도 아니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은 시골집에서 태어났어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태어난 환경을 이야기하면
경제 자본 이야기만 하죠.
하지만 저는 부모님 재산이 얼마냐가 아니라
나에게 어떤 문화 자본이 있었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제 아버님은 지적 호기심이 왕성하신 분이었어요.
신기한 걸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꼭 사업을 하셨는데,
거의 대부분 실패하셨죠.
계란 부화기라는 게 나오면 양계장을 차리시고,
발동기라는 게 나왔을 때는 정미소를 차리셨죠.
설사 성공을 하더라도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곧 다른 일을 하셨어요.
아버지가 사업을 접고 나면 우리 집 광에 폐물들이 쌓여요.
그러면 영락없이 다 내 장난감이 되는 거죠.
어머님께는 대단히 감성적이신 분으로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잘 쓰시는 분이셨어요.
저를 앉혀두고 책을 많이 읽어주셨죠.
더구나 위로 형이 네 명 있었는데,
모두들 문학이고, 미술이고 하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방학 때면 서울에서 내려와 영화나 문학, 음악 이야기를 나누고,
저는 어린아이지만 자연스럽게 그 문화 담론에 끼어들었지요.
그러다 보니 사실 또래 아이들하고는 잘 못 어울렸어요.
한마디로 사회성이 없었던 거죠.
동네 애들하고는 막 흙 묻히면서 뒹굴고, 막말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나는 환상의 세계에서 동화책을 읽고 있었던 거예요."
"어렸을 때 듣기로 내 사주는 장군이 될 수라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사람은 그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사는 건 줄만 알았지요.
다른 생각은 전혀 안했어요.
나는 학교 가기 전에 글씨를 쓸 수 있었어요.
어머니도 가르쳐 주시고, 형들도 있고 하니까.
그래서 여섯 살 때 누님 몽당연필로 동화를 하나 썼죠.
우리 형이 그걸 보더니 나를 놀리려고
“야, 너 어디서 베꼈어?”그러는 거야.
내가 썼다고 하니까 또 이래요.
“그걸 네 머리로 썼다면 너는 천재야 천재.”
나는 약이 올랐지만 한편 그 말을 곧이듣고 내가 정말 천재인 줄 알고 기뻐했죠.
이게 자기 암시라는 거지.
나는 바보야 그러면 바보가 되는 거고,
나는 천재야 하면 천재가 되는 거예요.
형님이 그때 한 말 때문에 내가 글쓰기를 하게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어쨌거나 나는 언제나 ‘나는 천재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써왔던 거죠.
그러다 대학갈 때쯤 6·25 전쟁이 나면서 형편이 아주 어려워졌어요.
그런데 형님 한 분이 서울대 의대나 법대에 가면 등록금을 대주겠다고 하셨어요.
그 무렵 의예과는 문리대에 있었기 때문에
국문과에 원서를 내고는 그냥 문리대라고만 얼버무렸지요.
대학에 합격하고 난 뒤에도 집안 사람들은 다 의예과에 간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구한말에 벼슬하신 분이 우리 집안에도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나왔다고 좋아하시면서
“무슨 과에 갔냐?”고 물으시는 거요.
이실직고 국문과라고 했더니
“그게 뭘 하는 과냐?”고 재차 물으세요.
그래서 “우리나라 글 배우는 뎁니다.” 했더니
“아니 언문 배우러 대학가는 놈도 다 있냐!”고 크게 낙담을 하시는 거예요.
"사실 그때는 후회를 좀 했죠.
내가 의대나 법대 갔으면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했을까.
내가 우리 집안 남자들 중에 아들로는 막내였거든.
그래서 마지막 주자가 출세해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를 모두들 바라고 있었던 거죠.
그러나 나를 위해서는
내가 국문학을 선택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어요.
나야 문학적 상상력으로 하고 싶은 일을 평생하고 살았으니 오죽 좋아요.
그 때 내 친구 중에 의대 간 사람은
나이 먹으니 외과 수술 같은 걸 하지 못해 은퇴하고 말거든요.
그런데 문학을 하는 데는 은퇴란 게 없어요.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대학 선택만은 남들이 말하는 인기 있는 과가 아니라
자기가 전공하고 싶은 과에 들어가라고 말이지요.
'공부 잘 하는데 왜 저런 과를 가? 왜 저런 대학 가?'라고 말하더라도
제 길을 가는 바보가 되라는 것이지요."
"당시에 문리대 학보 학예부장을 하고 있었는데,
학보에 <이상론>을 썼어요.
사람들이 이상의 작품은 난해하고, 미친 사람이 쓴 글 취급을 할 때,
내가 그걸 하나하나 분석해서 푼 거예요.
그 무렵 우연히 어느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우연히 의견을 밝힐 기회가 있었죠.
그때 기성 문단을 혹독하게 비평, 아니 매도를 했죠.
그 소문이 퍼지자 당시 한국일보 문화부장인 한운사 선생께서
그 말의 요지를 원고로 써보라고 하셨어요.
그게 바로 <우상의 파괴>지요.
그런데 그 기고문이 신문 문화면 전면에 게재된 거예요.
당시에는 TV나 대중 미디어가 지금 같지 않아서
신문 문화면에 글 쓰는 사람이 예술계의 유명인이 되고 인기를 얻을 때였어요.
문인이 스타였던 시절이었지요.
그러니 저도 바이런의 경우처럼
아침에 자고 일어나보니 일약 유명인이 되었어요.
다방에 나갔더니 사람들 화제가 온통 내 글 이야기인 거예요."
"젊은 사람이 이상한 짓을 하면 다들 천재라고 하잖아요.
노인들이 하면 망령이라고 하고요.
스물셋 여드름 자죽도 가시지 않은 젊은이가
문단의 원로들을 우상이라고 하고
젊은이들은 그것을 파괴하는 아이코노크라스트(우상파괴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으니,
모두에게 큰 충격을 준 거예요.
1950년대는 젊은이들이
데모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던 권위주의 절정의 시절이었거든요.
원로 몇 분의 손에 문단 진출의 꿈을 지닌 청년들의 숨통이 달렸을 때니
그 충격이 어땠겠어요.
발가벗은 임금님이라고 외친 아이의 한마디 말처럼,
그 동안 쌓여있던 문단의 위선과 허세가 무너지기 시작한 거죠.
밉지만 세상이 인정을 한 거예요.
그리고 매 대신 천재라는 말을 붙여준 거지요.
알고 보면
천재란 말은 빨리 죽으라는 악담이기도 하잖아요.
이상이나 모차르트 같은 사람들 거의 다 빨리 죽었죠.
그래서 나도 ‘남들이 천재라고 하니까 서른을 넘기지 못하나 보다’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내일은 없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엄청나게 많은 글을 썼어요.
20대에 평론집과 칼럼집을 냈고
그 덕분에 26세에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발탁되어 전담 칼럼을 맡게 되었어요.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천재도 아니고,
죽지도 않고 황혼의 나이에 들어서 있더라고요.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나는 천재가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은 지적 호기심밖에 없다.
남보다 뛰어난 머리도, 남보다 더 노력한 것도 없다.”
감히 비길 수는 없지만
단지 그런 점에서만은 아인슈타인하고 비슷해요.
지적 호기심 면에서 말이죠.
저는 어려서부터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을 보고 느끼는 훈련을 해 왔거든요.
아버지가 물려 준 새 것에 대한 호기심,
모르는 것을 끝까지 밝히려는 호기심이
저를 <우상의 파괴>같은 걸 쓰게 했고,
어머님의 감성이 문학적 레토릭을 키워준 것이지요.
한마디로 천재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에게서 받은 좌뇌,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우뇌의 균형으로
문단과 학문의 두 영역에서 숨 쉴 수 있었던 겁니다."
"사실 그 당시 비평이라는 것은
주례사 같아서 서로 칭찬하는 품앗이였어요.
그게 참 역겨웠지.
나는 지금까지도 사회성이 부족해서 조금 손해를 보아도 할 말은 하고 사는 편이에요.
당시에 인맥을 만들어서 패거리를 만들어 문단 정치를 하는 일은 정말 참기 힘들었어요.
어떤 문단 파벌에도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논쟁은 어느 세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었죠.
주로 사회참여 저항의 문학이라는 기치를 들고
당시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화살표 노릇을 한 사르트르 까뮈의 글을 읽으면서
문단의 곰팡내와 싸웠던 겁니다.
그 무렵 <화전민 지대>라는 글을 썼는데
유산으로 물려받은 텃밭이 없으니
화전민처럼 가시와 엉겅퀴가 있는 숲에 불을 질러
그 잿더미 위에 씨를 뿌리자고 했어요.
과격한 글이지요.
스승뻘 되는 분들에게 독설을 퍼부으니
‘붓깡패’라는 소릴 듣기도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말을 골라서 좀 유머러스하고 점잖게 할 수 있었는데, 역시 미숙했어요.
젊었던 거죠.
얼굴에 난 여드름처럼 문장에도 여드름이 있구나.
그 때 짤 걸!
하지만 뭐 20대의 나는 미완성이었으니 도리가 없죠.
어쨌거나 나는 그 덕분에 미움을 사서
그 흔한 상 한번 탄 적이 없어요.
늙어서 글을 쓰지 못하게 되니 그제야 여러 군데서 상을 주더군요.
상이란 속물이 되었다는 확인 증서이기도 한 것이니까."
"하지만 동기가 순수했고 논쟁 자체가
나에게는 일종의 사색하는 방식이요 과정이었기에
젊은이가 겪어야 할 일종의 통과제례였다고 봅니다.
사실 생뜨 베브나 칼라일 같은 사람의 논쟁문을 보면
저의 독설은 주정도가 막걸리에도 못 미쳐요.
칼라일은 부부작가를 싸잡아 혹평을 하는 데 이렇게 평했어요.
“하나님이 일찍이 자비로우셔서,
네 사람의 비극을 오직 두 사람의 비극으로 그치게 했도다.”
바보끼리 결혼을 해서 그나마 두 사람만 고생하니 다행이라는 뜻입니다.
그냥 막말을 하는 우리 풍토와 달라요.
욕이지만 위트가 있잖아요.
풍자 유머의 레토릭은 문학의 특권이기도 하니까요."
"내가 특별히 유별난 생각을 한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우리들이 다 천자문을 배웠잖아요.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이게 하늘은 까맣고 땅은 누렇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내가 질문을 했지요.
“아니, 하늘이 왜 까매요? 제 눈에는 파란데.” 이상하잖아요.
질문 안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 아니에요?
내가 비정상이고, 창조적인 건가요?
어쨌거나 그랬더니 “그것도 몰라 밤중에 보면 까맣잖아.”
그래서 “그러면 땅도 까맣다고 하지, 왜 누래요?”그랬죠.
그 의문을 품어서 나중에 주역이나 음양오행설을 대하면서
물리적 색채와는 다른 오방색을 알게 된 것이지요.
검은 색을 뜻하는 현이 북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고
그 북방에 인간의 생사를 다루는 북극성이 있다는 사실을 안 거지요.
나에게 창조성이 있다면
이렇게 남들이 다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는 사실들을 내 머리로 생각하고
의문을 품고 그것을 끝까지 풀어보려는 타고 난 성품에서 오는 것이라고 봐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에세이가 베스트셀러로 화제 오르니까,
그 제목이 새로워서 잘 팔렸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사실 50년 전에 책 제목들은 한문 투로 ~론, ~서로 끝날 때였거든.
그런데 나는 한문 투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풍토’라는 말 대신에 한국말로 풀어서 풍(風)의 바람,
토(土)의 흙을 거꾸로 결합하여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겁니다.
풍토라는 평범하고 때 묻은 말을
세 살 때 배운 우리말로 바꾸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에 ‘저’라는 지시대명사를 붙여
시각화한 순간 마치 미라와 같던 말이 천을 풀고 되살아 난 것이지요.
‘벽을 넘어서’라는 올림픽 구호를 만든 것도 마찬가지지.
보통 그때의 어투로 하자면 ‘장벽을 넘는다’라고 할 때였지요.
그런데 ‘장벽’이라고 하면 그건 상투적으로 쓰는 죽은 메타포예요.
개념적이지요.
그런데 벽이라고 하면 일상적인 생활어가 되고 시각화되면서 눈에 보이듯 하죠."
"결론적으로 정말 창조라는 게 뭐냐.
저는 다 아는 걸 가지고 결합했거나,
다 알지만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가령 제임스 왓슨이
유전자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서 노벨상을 탔는데,
일본에서 먼저 똑같은 소리를 한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망신 당할까봐 공식적으로 논문을 쓰지 않았어.
서양 사람들은 남이 비웃어도 생각하면 일을 저질러요.
하지만 우리는 독창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
주위에서 비웃음과 압력을 받게 되니까
그냥 혼자 생각하고 덮어두는 일이 많지요.
눈치 보지 말고 일단 내 머리로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면,
그것이 독창성과 창조성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평범한 기술의 비법한 결합,
이러한 상상력이 나의 창조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남들이 손가락질해도 그것이 내 머리로 생각해서 얻은 것이라면
타협하지 말고 발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당장 비판을 받더라도
당연한 말, 남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통념에 쏠리지 말고
혼자서라도 그 길을 가려는 외로움을 감당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해요."
"우리가 참 가난했을 때,
밭일하는 사람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호미질을 하잖아요.
귀한 일이지만 늘 똑같아요. 발전이 없죠.
하지만 머리로 끝없이 생각하는 것은
1초 전의 나와 1초 후의 내가 다른 거예요.
요즘 젊은이들은 쏠림 현상이 있어요.
남들이 뭐라고 하면 와, 그런가 보다.
그런데 왜 남의 생각을 내 머릿속에 집어넣어요.
그건 내 생각이 아니에요.
학교에서 배운 모든 걸 다 빼놓고 난 것이 내 생각입니다.
수능시험 친 거? 인터넷 댓글? 그건 내 생각이 아니에요.
내 머릿속은 쓰레기통이 아니잖아요.
소매치기 당하지 않으려고 자기 호주머니 속은 조심하면서,
왜 자기 뇌는 관리 못하는 겁니까.
그 많은 정보들을 필터링 할 수 있는 안목이 자기 생각이에요.
나는 일제 강점 하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전시의 근로동원을 다니느라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지요.
해방 직후에는 좌우익 싸움과 동맹 휴학으로
또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요.
겨우 공부할 만하니까 이번에는 또 6.25가 터져 피난 다니느라고 학교도 못 다녔어요.
사실상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탓에 학교에서 배운 게 거의 없지요.
그러니 내 머리로 생존하지 않으면 안됐던 겁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지적 호기심과 독창성을 기를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어떤 사람이 세어 보니 13개더래.
내가 88올림픽 할 때나, 새천년 준비위원장 할 때나, 월드컵 할 때나,
문학하는 사람이 왜 저런 걸 하냐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건 오해지.
내가 심지어 문화부 장관을 할 때에도
그 밑바탕에는 창조적 욕망이 깔려 있는 거예요.
원고지에 쓰던 것을 잠실 운동장에 펼친 것 뿐이지.
88올림픽 이전에는
전쟁고아가 밤낮 깡통 들고 울던 게 한국의 이미지였어요.
그런데 올림픽은
전쟁이 아닌, 세계의 축제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울고 있는 전쟁고아의 이미지를 바꿔
새로운 시대, 산업화에 성공한 한국인의 모습과 미래의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정적 속, 햇볕이 쏟아지는 초록색 잔디밭의 그라운드에서
무심히 굴렁쇠를 굴리는 호돌이를
세계에 보여주려고 했어요.
어느 시인의 평처럼 일행 시를 잠실벌에 쓴 겁니다.
바덴바덴에서 사마란치가
“쌔울”이라고 선언할 때 바로 그 순간에 태어난 아이.
그러니까 전쟁이 젊은이의 무덤이었다면,
올림픽은 젊음이의 꽃밭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무덤을 꽃밭으로,
전쟁고아를 올림픽의 굴렁쇠 소년으로 바꾸는 그것이
바로 역사와 그 이미지를 새롭게 창조하는 연출이었던 것이에요.
그것을 서양화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화의 여백을 사용하여
여섯 살짜리 아이 하나가 연출하는 퍼포먼스를 생각해 냈던 것이지요."
"이 모든 일을 할 때 나의 직함은 달랐지만
남이 한 번도 하지 못한 일을 하는 창조적인 작업을 실행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나는 나를 창조적인 사람, 크리에이터라고 불러주기를 바라요.
그런데 사람들을 나를 교수, 장관, 고문, 위원장 등 여러 호칭으로 부르고,
또 강연을 들은 사람은 “나이가 80이신데, 참 근력 좋으십니다.”라는 말들을 합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김이 빠져요.
건강이나 힘자랑 하려고 강연하러 온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나는 그걸 우물파기에 비유하는데,
나는 우물을 파서 물이 나올 만하면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다른 우물을 파기 위해 떠나요.
중요한 것은 물이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그것이 풀리면 또 다른 가능성을 위해 다른 곳에 또 우물을 팝니다.
그래서 그렇게도 많은 직함이 내 주위에 떠돌아다니는 겁니다.
한 우물만 파기에는 삶에 대한 호기심이 가만두지 않아요."
"나는 나쁜 남편이고 나쁜 아버지지.
내 아내와 자식들에게 별로 시간을 내 주지 못했죠.
매일 바쁘다, 바쁘다. 글쓴다, 글쓴다.
뭐 잘나지도 못한 글 쓰면서 말이야.
애들은 내 뒤통수만 보고 자란 셈이죠.
언제 내가
“미안하다. 내가 좋은 아빠가 되려고 했는데,
너희보다는 내가 책 읽고 글쓰기에 더 많은 신경을 썼어.
너희들이 들어 올 틈이 없었어.
내 가슴과 머리에.”
그랬더니
“아버지, 그런 말씀 신문이나 방송에서 좀 하지 마세요.
한국 아버지들이 다 그렇지요.
자꾸 그러면 아버지만 그런 줄 알잖아요.”
우리 문화가 그렇다며 말해주니까
속으로 ‘아, 네가 나를 용서하는구나’ 했죠."
"인생에서 힘들었던 순간이 두 번 있었어요.
한번은 문화부 장관 제의가 들어왔을 때예요.
처음에 한 번은 거절했어요.
두 번째 제의가 들어왔을 때 나는 일본에 있었죠.
그 당시 생각에
우리가 경제력이나 군사력으로 일본과 경쟁하는 건 힘들겠지만
문화적으로 경쟁하는 건 승부를 걸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죠.
그 무렵에 아들 결혼식 때문에 잠깐 한국에 들어왔는데,
또 제의가 온 거예요.
문화부가 처음 시작될 때라, 모든 걸 새로 시작할 수 있었죠.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연구할 것도 있고,
관직이나 정치는 안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끝내 고사했어요.
그래서 장관 발표가 날 때에도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로 KBS에서 강연 프로그램을 녹화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연락을 받고 집에 돌아와 보니
카메라맨과 기자들이 인터뷰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거예요.
아찔한 순간이었지요.
수십 년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던 때에도
학과장도 마다한 사람이
중앙정부의 신설 문화부의 수장을 맡게 되다니 앞이 보이지 않았지요."
" 당시 인터뷰에서 아무 것도 없는 빈 벌판에 집을 세우러 가는 목수이다라고 했다는데 ...
본심이었지요. 장관이 아니라 목수라고 불러다오.
목수는 집을 짓는 사람이지, 새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이 아니다.
장관 취임사가 곧 이임사였던 것입니다.
약속대로 네 기둥 다 세우고 자진해서 장관직을 떠났지요.
예술종합학교의 법안을 국무회의에 통과시킨 바로 그날이
문화부를 떠나는 날이었지요.
또 하나는 70대 중반에,
1년 동안 책을 쓰겠다고 혼자 일본의 연구소에서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지적 망명을 하는 느낌으로 떠나온 것이지요.
어쨌거나 한국에서는 타고 다닐 자동차도 있고, 비서도 있고,
밥 빨래 다 해주는 가족이 있었는데
혈혈단신 늙은 몸으로 혼자 밥 해먹고 빨래하고 살아있는 건
바퀴벌레밖에 없는 방안에서 혼자 기거하면서 버틴 것이지요.
극한까지 가서 나를 해체시키고 무엇이 남는가를 찾아보려고 한 거예요.
그런데 한번은 교토에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눈이 소리 없이 내려?
아냐. 모국어로 내리는 거야.
한국 눈은 한국말로, 일본 눈은 일본말로, 미국 눈은 영어로 내리지.’
결국에 모국어를 떠나서는 못사는구나 하면서 빨리 돌아가야지 했어요.
나는 언어를 선택한 사람 아니냐.
죽을 때까지 우리말로 생각하고, 우리말로 글로벌 해지는 거지.
조국은 감옥이면서 나의 보호막이구나.
그래서 돌아와서 한국인 이야기를 다시 쓰고,
창조 학교를 만들고,
한중일 비교문화 연구소를 만들었어요.
모두 자청해서 고통을 받은 건데,
결과적으로는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웠던 고난의 시절이었지만
그 속에서 빛을 찾았던 것이지요.
특히 무신론자가 종교를 갖게 된 계기를 말이지요."
"8020이라는 TV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거기 모인 젊은이들한테 내가 “8020에서 0이 몇 개냐?” 했더니
0이 2개라는 거야. 맞지,
정답이지.
“그러나 앞으로의 젊은이들은 그렇게 답변하면 안 돼.
8자에도 0이 2개 있잖아.
안 그래?
4개지.
” 맞네요.
“뭐가 4개야. 0빼면 8하고 2가 남는데 보태면 10이지.
0이 또 하나 생겨.” 네, 다섯 개네요.
“뭐가 다섯 개야. 다섯 개 쭉 쓰면 십만이지.
아니 8자 눕혀 봐. 무한대야.
8020의 숫자에는 0이 무한대로 있어.
이것이 정답이지.”
그랬더니 학생들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거야.
“그래, 앞으로 그렇게 살아.
정답은 없어.
2개도 맞은 것이고, 모두 맞아.
그런데 8020써놓고, 0이 2개라고 우기는 사람은 앞으로 못살아요.”
요즘 젊은이들은 쏠림 현상이 심해요.
왜 똑같은 소리만 하냐.
팔로우가 10만이라고 자랑하지 마세요.
내 필터에는 10만 개의 다른 의견이 있다.
이런 걸 자랑해야죠.
나는 내가 지금까지 써 온 글이 전부 엉터리라고 하는 자기 부정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일찍 죽어도, 나중에 죽어도 똑같아요.
똑같은 생각을 한다면 지금 죽어도 상관없어요.
내가 오죽하면 ‘젊음의 탄생’이라는 말을 썼겠어요.
젊음은 있는 것이 아니라 탄생하는 것이다.
오늘 태어나고 오늘 죽어라.
우린 영원할 순 없지만 무한히 태어나서 무한히 죽을 수 있다.
이게 내가 젊은이들에게 줄 수 있는 말이에요."
"젊은 사람들한테 나처럼 살라고는 못해요.
나는 불행한 시대를 살았고 많은 제한 속에서 살았죠.
여러분들은 아주 자유로운 시대에 태어났지만
그 자유가 하늘에서 떨어진 거 아니에요.
여러분의 아버지가 흘린 피와 땀 위에서 누리고 있는 거죠.
기성세대를 부정하되, 기성세대가 무엇을 했는지는 올바로 평가하세요.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아요.
그러나 미구(未久)에 자기도 아버지가 되고
젊은이들이 손가락질을 하는 늙은이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요."
"우리가 경쟁해야 할 대상은 한국인이 아니예요.
바로 이웃에 있는 1억이 넘는 일본,
13억이 넘는 중국과 경쟁하지 않으면,
그리고 이기지 않으면 젊은 세대는 없어요.
한 백 년 동안 우리는 서양 사람들의 뒤통수를 보며 뛰어왔지만,
이제 그들이 우리를 쫓아와요.
아시아를 일본의 아시아, 중국의 아시아가 되게 하지 마세요.
중화주의라는 중국의 아시아,
대동아라고 하는 일본의 아시아가 있었죠.
그렇다고 한국의 아시아를 말하자는 건 아니에요.
일본과 중국이 일국 중심의 아시아를 만들려다 실패했지요.
그런 패권경쟁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치 가위바위보처럼,
순환만 있지 절대 강자가 없이 상생하는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서양 사람들이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한 진정한 글로벌리즘이 필요할 때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시아라는 말보다는 ‘한중일’이라는 말을 씁니다.
아시아라고 하면 일본과 중국을 연상하죠.
불안한 두 발로 서는 아시아가 아니라,
한중일로 서는 초국적 형태의 문명이 도래한다고 봐요.
이것이 여러분들이 만들어야 할 큰 힘이죠.
땀 흘려서 산업주의 만들고,
피 흘려서 민주화를 했는데,
이제는 공감의 눈물을 흘리세요.
3대 액체 중에 가장 고결한, 남과 공감하는 눈물을 창조하세요.
한 사람의 힘이 참 크다는 것.
국가나,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나 혼자 하는,
당당한 나의 힘을 믿으세요.
그것이 80년을 살아 온 선배로서,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입니다.
내 자신을 믿고 남이 아니라 나부터 바꿔가세요."
- 시사상식사전, 웅진 지식하우스 인생스토리
이어령 교수의 어머니의 정성
20대 때 이미 문학평론가가 된 이어령 교수는
쓰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언어의 마술사'이다.
그런 능력과 소질은
이어령 교수가 고백하듯이 어머니로부터 나온 것이다.
어머니는 전혀 글자를 모르던 어린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유대인들이 갓난아이가 귀가 들리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는
유대인의 역사책인 구약성경을 히브리어로 날마다 들려주는 것과 같은 교육 방식이었다.
그러한 어머니의 교육이 있었기에 훌륭한 문화평론가가 될 수 있었다.
이어령 교수의 어머니는
아이가 잠들기 전에
늘 아이 머리맡에서 앉아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고 한다.
특히 아이가 감기에 걸려 신열이 높아지는 그런 때에는
『암굴왕』 『무쇠탈』 『흑두건』 같은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어 주었다.
이어령 교수는
'겨울에 지붕 위를 지나가는 밤바람 소리를 들으며,
여름에는 장맛비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의 하얀 손과 하얀 책의 세계를 방문했다'고 회상하며,
'어머니의 목소리가 담긴 근원적인 그 책 한 권이 나를 따라 다닌다.
그 환상적인 책은
60년 동안에 수천수만 권의 책이 되었고,
그 목소리는 나에게 수십 권의 글을 쓰게 하였다.
어머니는 내 환상의 도서관이었으며,
최초의 시요,
드라마였으며,
끝나지 않은 길고 긴 이야기책이었다'라고 고백한다.
- 젊은이들이 알아야 할 아홉 가지 원칙
2019. 1. 3.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이어령(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를 만났다.
호적상 85세다. 실제 한국 나이는 올해 87세다.
호적에 이름이 뒤늦게 올라갔다고 했다.
항간에 투병설이 있었지만 안색도 좋고, 표정도 밝고, 열정도 넘쳤다.
그에게 ‘이어령의 삶과 종교, 그리고 문명론’을 물었다.
이어령 교수는 "탯줄을 끊기 전에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인가, 아니면 배 밖으로 나와 탯줄을 끊을 때부터 나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승식 기자와 나눈 일문일답을 알아본다.
Q : 건강하신가.
A : “우리는 사실 태어날 때부터 투병한다.
4㎝도 안 되는 좁은 산도(産道)를 필사적으로 나오지 않나.
그때 얼마나 고통스럽겠나.
그건 목숨을 건 모험을 하는 거다.
그렇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또 이별을 한다.”
Q : 무엇과 이별인가.
A : “태중에서는 엄마와 한 몸으로 존재한다.
탯줄을 끊으면서 엄마와 이별해야 한다.
그러니까 만남이 먼저인가, 이별이 먼저인가.
그렇다. 이별이 먼저다.
그러니 삶의 시작은 ‘헤어짐’에서 비롯된다.
삶은 끝없는 헤어짐의 연속이다.”
이 교수는 문득 여섯 살 때 기억을 떠올렸다.
잊히지 않는 순간이라고 했다.
“나는 굴렁쇠를 굴리며 보리밭 길을 가고 있었다.
화사한 햇볕이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었다.
대낮의 정적, 그 속에서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부모님 다 계시고, 집도 풍요하고, 누구랑 싸운 것도 아니었다.
슬퍼할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먹먹하게 닥쳐온 그 대낮의 슬픔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그게 내게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의 상징)’였다.”
이어령 교수는 "우리가 죽음을 기억할 때 비로소 삶은 더욱 농밀해진다"고 말했다.
Q :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인가.
A : “그렇다. 내가 병을 가진 걸 정식으로, 제대로 이야기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부분적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의사가 내게 ‘암입니다’라고 했을 때 ‘철렁’하는 느낌은 있었다.
그래도 경천동지할 소식은 아니었다.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암이야. 어떻게 할까?’
여섯 살 때부터 지금껏 글을 써온 게 전부 ‘죽음의 연습’이었다.
‘나는 안 죽는다’는 생각을 할 때 ‘너 죽어’이러면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태어나면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너 죽어’ 이런다고 두려울 게 뭐가 있겠나.”
이 교수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과일 속에 씨가 있듯이, 생명 속에는 죽음도 함께 있다.
보라. 손바닥과 손등, 둘을 어떻게 떼놓겠나.
뒤집으면 손바닥이고, 뒤집으면 손등이다.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생명이 있겠나.
‘나는 살아있다’는 생명의식은
‘나는 죽어있다’는 죽음의식과 똑같다.
빛이 없다면 어둠이 있겠나.
죽음의 바탕이 있기에 생을 그릴 수가 있다.
의사의 통보는 오히려 내게 남은 시간이 한정돼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이 교수는 방사선 치료도, 항암 치료도 받지 않는다.
석 달 혹은 여섯 달마다 병원에 가서 건강 체크만 할 뿐이다.
그는 ‘투병(鬪病)’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다.
대신 ‘친병(親病)’이라고 불렀다.
“듣기 좋아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서양사상은 영혼과 육체를 둘로 나눈다.
영혼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고, 육체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다.
동양사상은 다르다.
영혼과 육체를 하나로 본다.
상호성이 있다고 본다.
의사가 ‘당신 암이야’ 이랬을 때 나는 받아들였다.
육체도 나의 일부니까.
그래서 암과 싸우는 대신 병을 관찰하며 친구로 지내고 있다.”
이어령 교수가 요즘 사용하고 있는 노트와 펜을 보여주었다.
노트에 필기를 하면 컴퓨터에 파일로 저장되는 첨단 방식이었다.
이어령 교수가 필기한 지점을 펜으로 꾹 누르자
녹음해 두었던 메모가 흘러나왔다.
이 교수는 집필 작업에 스마트 노트와 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Q : 많은 사람이 죽음을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로 생각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한다.
A : “영원히 살면 괜찮다.
그런데 누구나 죽게 돼 있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는 삶이 중요하다.
중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정월 초하루에,
그 좋은 새해 첫날에 왜 죽음에 대한 노래를 부르겠나.
죽음을 염두에 둘 때 우리의 삶이 더 농밀해지기 때문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삶이 가장 濃密(농밀)한 시기가 언제인지 아나. 요즘이다.”
Q : 왜 요즘인가.
A : “사람 만날 때도 그 사람을 내일 만날 수 있다,
모레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농밀하지 않다.
그런데 제자들 이렇게 보면 또 만날 수 있을까.
계절이 바뀌고 눈이 내리면 내년에 또 볼 수 있을까.
저 꽃을 또 볼 수 있을까.
그럴 때 비로소 꽃이 보이고,
금방 녹아 없어질 눈들이 내 가슴으로 들어온다.
‘너는 캔서(암)야.
너에게는 내일이 없어.
너에게는 오늘이 전부야’라는 걸 알았을 때
역설적으로 말해서 가장 농밀하게 사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나쁜 일만은 없다.”
이 교수는 7년 전에 소천한 딸(이민아 목사) 이야기를 꺼냈다.
이 목사도 생전에 암 통보를 받았다.
“암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 딸도 당황하지 않았다.
의사는 ‘수술하면 1년, 안 하면 석 달’이라고 했다.
딸은 웃었다. ‘석 달이나 1년이나’라며 수술 없이 암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오히려 진단한 의사가 당황하더라.
그게 무슨 큰 도를 닦아서가 아니다.
애초부터 삶과 죽음이 함께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는 ‘뉴스’가 아니다.
그냥 알고 있던 거다.
그때부터 딸은 책을 두 권 쓰고, 마지막 순간까지 강연했다.
딸에게는 죽음보다 더 높고 큰 비전이 있었다.
그런 비전이 암을, 죽음을 뛰어넘게 했다.
나에게도 과연 죽음이 두렵지 않을 만큼의 비전이 있을까.”
그는 그게 두렵다고 헀다.
이어령 교수는
"죽음을 생각하며 염두에 두고 살았던 사람에게
죽음은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고 말했다.
Q : 생각하시는 비전이 뭔가.
A : “우선 비전의 바탕,
내 삶을 그리는 바탕을 말하고 싶다.
먼저 ‘인법지(人法地)’다.
인간은 땅을 따라야 한다.
땅이 없으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어디에 사나. 지구에 살지 않나.
다음은 ‘지법천(地法天)’이다.
땅은 하늘을 따라야 한다.
땅에 하늘이 없으면 못 산다.
해도 있고, 달도 있고, 별자리도 있으니까.
그럼 그게 전부냐. 아니다.
‘천법도(天法道)’.
하늘은 도(道)를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우주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그럼 도(道)가 끝인가?
아니다.
‘도법자연(道法自然)’.
도(道)는 자연을 따라야 한다.”
Q : 마지막의 ‘자연’이란.
A : “우리는 그동안 ‘인법지’할 때 ‘지(地)’가 자연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게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 된 것이다.
자연스러움. 이 세상에 스스로 된 게 있나.
의존하지 않는 게 있나. 의지하는 뭔가가 없다면 그 자신도 없어진다.
그러니 ‘절대’가 아니다.”
‘당신은 신의 아들인가?’
그러자 예수는 ‘예스, 에고 에이미(ego eimi·그리스어).
즉 예스, 아이 엠(Yes, I am)’이라고 답했다.
‘아이 엠(I am)’이 뭔가. ‘나는 나이다’ ‘나는 스스로 있다’는 말이다.
그건 무엇에 의지해서, 무엇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있는 거다.
스스로 있는 것은 외부의 변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게 ‘자연’이다. 그게 ‘신(神)’이다.”
이어령 교수는
"예수를 믿는 것과 종교를 믿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고 지적했다.
Q :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건 무얼 뜻하나.
A : “우리는 ‘너 예수교 믿어?’하고 묻는다.
그건 교(종교)를 믿느냐고 묻는 거다.
‘너 신을 믿어?’ 하는 물음과는 다른 이야기다.
교를 믿는 것과 신을 믿는 것은 다르다.
기독교든, 불교든, 도교든 모든 종교의 궁극에는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와도 같은 게 있다.
스스로 움직이는 절대의 존재다.
인간은 단 1초도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자율자동차라는 말,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호모 데우스’ 같은 말처럼 공허하게 들리는 것도 없다.”
Q : 이어령의 삶,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A : “인간이 죽기 직전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유언이다.
나의 유산이라면 땅이나 돈이 아니다.
머리와 가슴에 묻어두었던 생각이다.
내게 남은 시간 동안 유언 같은 책을 완성하고 싶다.”
Q : 무엇에 대한 책인가.
A :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을 썼다.
책이 나온 지도 오래됐다.
그렇다면 한번 당사자에게 물어봐라.
지금쯤 ‘제4의 물결’은 무엇인가.
요즘 툭하면 웹이니 산업이니 하는 키워드에 ‘2.0’ ‘3.0’ 번호 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엔 “생명 3.0”까지 들고나오는 이들도 있다.
문명이 그렇게 1ㆍ2ㆍ3ㆍ4 번호 달고 순서대로 오는 것이라면 걱정할 게 없다.
4차 산업혁명 뭐 걱정하나,
다음에 5차 혁명이 올 텐데.
그건 실없는 사람들 소리다.”
앨빈 토플러의 큰 잘못은
인류 문명의 물결을 농경시대부터 계산해 정보시대의 도래까지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의 유전자나 두뇌 등 모든 조건은
수렵ㆍ채집 시대 때 형성된 그대로이다.
인간 문화ㆍ문명의 텃밭부터 계산했어야 한다.”
이어령 교수는 "문명의 출발점은 수렵채집 시대다.
거기에 대우주의 생명질서가 녹아 있다"고 말했다.
Q : ‘농경 시대’가 아닌 ‘수렵ㆍ채집 문명’이 출발점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A : “아이가 태어날 때 언제부터 나이를 세나.
서양에서는 엄마 배 속에 있는 시간은 치지 않는다.
밖으로 나와 탯줄을 끊을 때부터 한 살이다.
인간이 만든 문화ㆍ문명이 아이를 키운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르다.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이미 한 살이다.
태아는 자신이 알아서 태반을 만들고,
호르몬 분비하고,
필터로 걸러내고,
뱃속에서 나갈 때를 결정한다.
인간의 문화는 학습 이전의 상태다.
누가 가르친 게 아니다.
태아에게는 태생기의 거대한 생명 질서,
우리가 모르는 대우주의 생명 질서가 있다.
그러니 태중의 아이를 한 살로 보느냐, 보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그건 자연과 단절된 문화ㆍ문명으로 사느냐,
아니면 대우주의 생명질서를 바탕으로 오늘의 문명과 연결하며 사느냐의 문제다.”
이 교수는 한국 사람은 그걸 연결하며 산다고 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우리는 안고 잔다.
포대기로 업고 다닌다.
최대한 엄마와 밀착하게 한다.
그게 뭔가.
엄마 뱃속의 환경과 이어주려는 거다.
산모가 미역국 먹는 나라도 한국뿐이다.
태중의 양수는 바닷물과 성분이 비슷하다.
과학은 생명이 바다에서 육지로 왔다고 말한다.”
반면 서양에서는 아기를 낳자마자 요람에 재운다.
다시 말해 엄마 뱃속, 자연과의 단절이다.
“한국 문화에는 그런 요람이 없다.
그러니 ‘생명 자본’이 누구에게 가장 많겠나.
서양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채집시대의 나물 문화를 바탕으로
정보시대의 선두까지 그대로 이어온 한국인에게 가장 많다.”
초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이어령 교수는 "호칭을 장관으로 하지 말아달라. 그냥 글 쓰는 사람으로 살다 가고 싶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Q : 정보화 시대, 그다음은 어떤 시대인가.
A : “나는 디지로그와 생명 자본을 썼다.
정보화 시대 다음에는 생명화 시대가 온다.
인공지능(AI)이 산업 시대와 연결되면
재앙이지만,
생명화 시대의 기술로 사용되면 달라진다.
인류가 가장 행복한 시대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인적 자본, 사회 자본, 문화 자본, 자연 자본. 그다음에 오는 것이 ‘생명 자본’이다.
그걸 제일 많이 갖고 살아온 이들이 한국인이다.
인류 문명이 태동한 태생기를 품고 사는 한국의 생활문화 속에 그게 남아 있다.”
하지만 돼지 다리가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돼지에 개 정도의 다리만 달아줘도 비대해 보이지 않는다.
다리가 짧으니까 몸집이 뚱보로 보인다.
시점을 바꿔 보면 대상이 달라진다.
이미 일어난 과거를 알려면 검색하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려면 사색하고,
미래를 알려면 탐색하라.
검색은 컴퓨터 기술로,
사색은 명상으로,
탐색은 모험심으로 한다.
이 삼색을 통합할 때 젊음의 삶은 변한다.”
- 백성호, 중앙일보 현문우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