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독립군과 보수(保守)뉴라이트
1.
조정래(趙廷來,1943-현재)작가는 그의 대작 <태백산맥(太白山脈)>을 1983년6월부터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1989년10월에 완성하게 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1945년8월의 해방부터 1953년 휴전협정까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심도있게 조명하였으며, 미군정(米軍政)과 친일파들에 의해 다시 한번 우리 현대사가 갈기갈기 찢기우고 민족혼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데, 결국 간악한 반역자들에 의해 조선독립군은 좌파 공산주의자로 규정되고 악질친일파들은 정치적 보수세력으로 규정되어 가는 파라독스를 또한 묘사해 내고 있다.
이후 한국 현대사는 이승만과 친일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지속적인 세뇌와 선전교육이 계속되면서 민족주의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죽이고 핍박한 반면, 친일파들은 보수세력으로 나라 경제를 일으킨 주역으로 만드는 공작정치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북한의 김일성이 독립운동가로 항일전쟁의 일선에서 싸운 것은 이미 사실로 증명되고 있는 반면, 박정희는 독립운동가를 잡아 일왕에 충성을 맹세한 철저한 친일파였음 또한 널리 알려진 사실로, 결국 박정희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기 위해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고 속으로는 철저한 친일독재를 통해 보수라는 가면을 쓴 친일파들을 대거 중용해 친위대로 만들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가게 되었다.
박정희의 반역이후 1979년 김재규 선생의 총에 맞아 죽을때까지의 경제 상황을 보면, 1968년부터 1970년7월까지 이루어진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박정희식 과시행정의 본보기였을뿐 당시 나라경제에 이바지한 부분은 극히 미미했었다. 정밀한 지도자였다면 1968년 상황에서는 농지확장과 비료공장의 증설이 시급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인데 당시 쌀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쌀 자급이 달성된 시기는 1977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통일벼의 육종교배를 통해 수확량이 늘어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 반도땅은 비료가 없이는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1970년 이전에도 1마지기(200평)당 수확량은 벼 세가마 수준이었다. 비료가 풍부해진 지금은 마지기당 7-8가마의 높은 수확량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고찰해 보면 일제강점기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시절 식량이 절대적으로 모자라 모두 배 주리고 살았음을 알 수 있고, 일제에 아부했던 일부 친일세력들만이 넉넉하게 먹고 살았던 것임을 또한 알 수 있다.
마지기당 벼 세가마 수준으로는 한 가족이 일년내내 쌀을 먹을 수 없는 수준이 된다. 따라서 조,보리,기장 등등을 섞어서 먹어야 했으니 그 거친 음식이 얼마나 불편했을지 상상이 안 갈 정도다. 따라서 일부 어리석은 자들이 일제강점기 운운하며 대부분 먹고사는데 이상없었다고 지껄이는데 정말 한심하기 이를데 없어 보인다. 1975년 이전 필자의 고향동네 50여가구에서 쌀밥만 먹는 집은 단 두세집뿐이었고, 나라에 쌀이 모자란다고 초등학교 1학년때는 점심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게 하고, 단지 자그마한 빵 한 개씩을 주었을 뿐이었다. 일제강점기때보다 잘 살았다는 1975년이었는데 이 모양이었으니 일제강점기 시절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2년동안 고속도로 건설비용이 429억원이었다고 하는데, 당연히 농지확장과 비료증설을 통한 생산력 확대에 먼저 투입해 백성들의 식량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이후 고속도로 건설을 했었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부끄러운 친일행적을 지우고 백성들에게 자기의 치적(治績)을 과시하고픈 영웅심에 빠진 박정희는 일을 거꾸로 처리해 고속도로를 먼저 공사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국민들은 대다수가 식량부족에 허덕이는 역사를 계속하게 되었다.
결국 사상누각(沙上樓閣)의 경제구조를 만들게 된 박정희 정권은 1975년이 넘어가면서 서서히 경제의 동맥경화를 맞이하게 되었고, 1979년 서울시내 대학의 경제학 교수를 청와대로 초치한 차지철(車智澈,1934~1979) 경호실장은 “서울 시민 백만이 들고 일어나도 난 기관총과 탱크로 막을 수 있으니 걱정들 마시고 나라 경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그 말씀들을 좀 해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한다. 이 말은 조작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서 내무장관으로 올라 있었던 유인호 경제학 교수(1929-1992)의 생전 강의에서 들은 내용이다.
결국 자기자신보다 나라를 더 사랑했던 김재규(金載圭, 1926~1980)선생은 독재자 박정희의 심장에 총을 쏴 추악한 유신(維新)정권의 막을 내리게 했으며, 대한민국이 동맥경화의 경제를 뚫고 비약할 초석(礎石)을 다지게 만들었다.
2.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이자 독립운동가로 해방후 프랑스의 대통령이 된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1890-1970)정권은 1944년8월25일 프랑스가 나치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자, 즉시 나치에 동조한 비시(Vichy)정부(1940-1944)와 나치이념과 대독일협력에 앞장섰던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단행하게 되었다.
레지스탕스 대원들과 해방전투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독일에 부역한 여성들을 체포해 강제로 머리를 삭발시켜 모욕을 주었으며, 당시 약 2만명이 머리를 깍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세계적 문호(文豪)로 노벨문학상(1957)을 수상했던 알베르토 카뮈(Albert Camus,1913-1960)는 “청산작업에 실패한 나라는 결국 스스로의 쇄신에 실패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청산론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사르트르, 시몬 드 보봐르 부부, 가브리엘 마르셀 등 유명인사들도 모두 청산론에 동조해 적(賊)에 부역한 지식인들의 처벌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를 통해 프랑스는 해방 후 약 15만 8,000여명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으며, 처형된 사람과 측결처분된 사람을 합하면 1만명을 넘은 것으로 또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칼보다 강한 펜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평가하는 문학인 조정래 선생이 친일청산을 주장하고 친일파를 단죄하자는 용기있는 일갈(一喝)은 카뮈, 사르트르, 보봐르 등과 같은 세계적 지성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으니 그의 펜은 정당함을 부여받아 마땅한 일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그들 스스로 역사앞에 부끄러운 짓을 한 사실을 감추고자 독립투사를 좌파 공산주의로 매도하였고 민족반역자들인 친일파들을 보수로 둔갑시킨 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흡수해 오천년 역사의 조선(朝鮮)이라는 혼불을 뒤흔들고 일제강점기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을 그대로 답습해 더러운 친일역사의 궤도를 반도땅에 강력하게 심어 놓았던 것이다.
해방후 80년을 앞둔 시점에서, 북한은 왕조독재정권으로 변질되어 이념을 우선시하는 파렴치한 1인 왕조국으로 전락하였고, 대한민국은 소수의 수구꼴통뉴라이트 들이 나라를 친일이라는 이념으로 뒤덮어 전쟁을 획책해 가는 정신병자들의 놀이터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 정신병자들은 민족과 민주를 말하면 좌파라 하고,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기만 해도 좌파 공산주의라 악을 쓴다.
민주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공산화된다고 악을 쓰고 떠들었지만, 김대중 대통령 이후 20년이 훨씬 지난 오늘의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와는 아무 상관없는 뿌리깊은 자본주의 사회가 되어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수구꼴통뉴라이트 들이 말하는 좌파란 그들만의 리그속에 존재하는 망상이며 할 일없는 사람들의 안주거리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3.
독립투사는 자기자신보다 나라를 사랑한 사람들이고 수구꼴통뉴라이트는 나라보다 자기자신을 사랑한 추악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조선의 독립투사들은 목숨을 던져가며 일제에 저항했고 수구꼴통뉴라이트의 전신인 친일파들은 자기 목숨을 살리려 나라를 배신하고 일제에 빌붙어 추한 목숨을 연명해 왔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던 이들은 지금도 본인이 받아야 할 돈을 타인을 위해 양보하고, 자신을 위해 나라를 배신했던 이들은 남의 돈까지 탐내 추악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밥먹듯이 하고 있다.
대만(臺灣)의 장개석(蔣介石) 정권하 감찰원장을 지냈던 우우임(于右任,1879-1964)은 한족(漢族)역사속의 4대 명필로 꼽히는 서예의 대가이다. 그의 출중한 인품은 모택동과 장개석 두사람으로부터 구애(求愛)를 받았으며, 선수를 친 장개석이 친위대를 보내 대만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그가 지은 망대륙(望大陸)이란 시를 감상해 보자.
<망대륙(望大陸)국상(國喪)>
葬我于高山之上兮
望我大陸
大陆不可见兮, 只有痛哭
葬我于高山之上兮
望我故鄉
故鄉不可見兮, 永遠不忘
天苍苍野茫茫
山之上国有殇
나 죽으면 높은 산 제일 꼭대기에 묻어라
대륙 산하를 볼 수 있는 곳
대륙이 보이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건 오직 통곡뿐!
나 죽으면 높은 산 제일 꼭대기에 묻어라
두고 온 내 고향 볼 수 있도록
보이지 않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곳
하늘은 아득히 창창하고, 들판은 끝없이 망망한데
산 위에 올라보니, 온 나라가 상중이다.
이 시는 2003.03.18.일 중국 신임 국무원 총리 원자바오(溫家寶)의 내외신 기자회견장에서 총리에 의해 읊어진 시였으며, 대륙과 대만의 많은 애국적인 지성인들의 가슴을 적시게 되었다.
2024년의 대한민국. 온 나라가 싸움판이다.
2024.10.25. 松溪
첫댓글 해방 이후 우리 스스로 썩은 살을 도려내지 못한 것이 나라 전체를 암세포로 물들인 원인이지요! 어쩌면 아직도 일제치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차라리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재 선생이 묘청이 김부식에게 제압당한 사건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라를 팽개쳐버린 놈들이 권력을 잡고, 국민들을 조선독립군들의 실체조차도 모르는 바보멍청이로 만들어버린 작금의 현실 또한 훗날의 어느 사가(史家)에 의해 큰 사건으로 조명될 날이 올거라 생각합니다!
많은 부분 공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반도 대한민국의 슬픈 현실입니다. 언젠가는 이 슬픔을 극복할 시기가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화이팅 입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