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330.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목요일. - 자폐가 아닌 관상을. 등 )
----------------------------------------------------
230330. 사순 제5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자폐가 아닌 관상을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오늘 복음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 믿음의 아버지라고 믿는 아브라함이
주님께서 오실 때를 내다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기다렸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을 바로 눈앞에 두고 보면서도 정작 그 주님을 몰라본다는 주님 말씀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눈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오늘 창세기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얘기하고,
계약을 맺는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첫마디를 떼십니다.
“나를 보아라.”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이 실은 인간을 보지 말고 당신을 보라는 것이고,
인간 중에서도 나이 먹은 자기를 보지 말고 당신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을 보거나 특히 나이 먹은 자기를 보면
너에게서 많은 자손과 민족들이 나올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과 저는 하느님은 안 보고 자기를 보고,
그리고 자기를 보기에 아브라함처럼 멀리 내다보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천 년 뒤의 주님 오심을 내다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는데
저는 주님을 보지 않고 내다봐야 고작 칠십 너머의 저를 보며 불안해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저만 보면 이 세상에서의 저밖에 볼 수 없는데
저는 이제 얼마 안 남았고, 그나마도 병들어 사람들에게 짐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난주에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느님 없이,
과거를 돌아보면 죄밖에 보이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면 불안합니다.
그러니 이제 생각을 바꿔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보고 영원을 봐야겠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원을 내다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 없이 자기 바라보기는
내성도 아니고 반성도 아닌 자폐일 뿐입니다.
반대로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자기 바라보기는
내성이요 반성이고 더 나아가 하느님 관상이요 자기 관상입니다.
----------------------------------------------------
230330.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예수님께서는 그제와 어제 복음에서, 당신의 신원과 당신의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위에서 오신 분’으로서 당신 말씀을 지키는 이는 생명을 얻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비방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여기서, “내 말을 지키는 이”란 곧 말씀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를 저버리지 마라. 그것이 너를 보호해 주리라.
지혜를 사랑하여라. 그것이 너를 지켜 주리라.”(잠언 4,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들어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그리고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오직 한분의 참된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또한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4,3)
하지만, 완고한 유대인들은 여전히 아버지도 그리스도도 받아들이지 않고 알아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아브라함도 예언자들도 모두 죽었음을 들어 반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여기서, “태어나기 전”은 지나간 시간을 나타내고, “전부터 있었다.”는 현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에도 계셨고 후에도 계십니다.’ 곧 항상 현재로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시간과 관계없는 지속적인 현존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언제나 존재하시며,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다가오시고, 먼저 건네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앞서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펼치시는 이 사랑의 드라마, 이 구원의 드라마에서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늘 함께 하는 당신 사랑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뼈 속에 새겨진 말씀이 심장에 와 타는 불이 되게 하소서.
말씀의 바퀴가 제 삶을 굴리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지키는 당신 사랑 따라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
230330.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천상에 마음을 두면
창세기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고 적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의 숨이 있었고 그 숨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보다 앞서신 보이지 않는 분이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면 흙의 먼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요한1,1-2).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창조 이전에, 더더욱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권위 있는 분으로 존경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한 분이십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히브11,3)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4,6-7). 따라서 주님의 권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을 풍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음이 있어서 주님을 따랐다기보다 따름으로써 믿음이 굳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지려 할 때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억지를 이기는 길은 잠시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서로의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는 때로 자리를 뜨는 것도 약입니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의 다른점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는 잠시 주님과 함께 자리를 비우십시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 머리 조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때로는 인간적인 좌절과 실패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차지하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성공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권위 앞에 순명한 아브라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세상의 권위를 쫓지 말고 천상의 권위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비둘기가 콩밭으로 날아가는 것은 비둘기 마음이 콩밭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숭이가 나무위로 오르는 것은 원숭이 마음이 나무위로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은 마음이 가 있는 곳으로 따라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선한 곳에 두어야 합니다. 천상에 마음을 두면 지금의 모두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시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어 주시고 “자손을 많이 낳을 축복”을 허락하시며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맺어주신 일방적 계약입니다. 하느님 측에서 본다면 손해를 보는 계약입니다. 그러나 그 계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둘 곳은 분명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주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95,7)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0330.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한약을 달일 때 어른들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약을 달이는 것은 정성이 중요하다.” 약효가 건강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약을 달이는 사람의 정성이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한약을 먹을 때도 몸가짐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한약을 먹으면서 술을 마시면 효과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한약을 먹으면서 먹지 않아야 할 음식도 정해 주었습니다. 한약과 궁합이 맞지 않으면 약효가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약은 분명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을 대하는 사람의 정성이 함께하면 더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에서는 큰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는 여인의 갈망을 칭찬하셨습니다. 여인의 믿음이 여인을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나병환자도, 중풍병자도 치유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말씀을 들으면서 성장한다고 하였습니다.
사제가 되면서 말씀을 선포한 적은 많은데 정작 말씀을 듣는 데는 소홀했습니다. 미국에온지 4년이 되었는데 피정은 3년 전에 한번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토론토 신문홍보를 하는 길에 꽃동네 피정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티에서 11년째 선교하는 신부님의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백번 묻는 것은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백번 보는 것은 한번 행하는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아이티에서 11년을 살고 있는 신부님의 이야기는 살아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걸인을 데려오고, 먹여주고, 병자성사주고,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치러주는 일이 일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갱단에게 납치를 당할 뻔도 하였고, 총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합니다. 선교에 대한 이상과 열정은 아이티에 도착하면서 식어버렸다고 합니다. 사회는 무질서하고, 아픈 사람은 너무 많고, 도와 줄 수 있는 힘은 없고, 매일 무력함을 느껴야 했다고 합니다. 기저귀를 갈아 주어야 하고, 대소변을 받아야 하고, 욕창에 벌래가 있는 몸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악취가 진동하는 시신을 염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라면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삶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신부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왔던 모세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약속의 땅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습니다.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청하니 매일 아침 만나가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드리면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같은 만나를 먹으니 그것이 지겨웠습니다. 이집트에서 먹던 고기가 생각났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청하니 하느님께서는 메추라기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드리면서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메추라기도 매일 먹으니 지겨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일 은총을 내려주셨는데 그 은총에 취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총을 지겨워하였습니다. 신부님은 구호물품으로 오는 쌀밥이 지겨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일 걸인을 보내주시고, 아픈 사람을 보내 주셨습니다. 생각하면 그것이 은총이었습니다. 신부님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도 그 은총을 지겨워했다고 합니다. 이만하면 한국으로 돌아가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직도 신부님께 은총을 주신다고 합니다.
동창 신부님들보다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동창 신부님들보다 영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동창 신부님들보다 언변이 뛰어난 것도 아닌데 하느님께서는 신부님이 좋은 사제 되라고 은총을 매일 주신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어머니는 전화하시면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합니다. 아이티의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이제는 아시기 때문입니다. 신부님도 이제 피정이 끝나면 다시 아이티로 돌아가야 하는데 솔직히 두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에도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곳에 300여명의 꽃동네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를 비롯해서 피정에 함께한 교우들 모두 신부님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깊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신부님께 해당되는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
230330.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몇 주 전, 잠에서 일어났는데 목과 어깨가 너무 아픈 것입니다. 잠을 잘못 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리겠지 했는데 점점 더 아픈 것입니다. 그다음 날 강의가 있기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목을 조금만 움직여도 큰 아픔이 있어서 움직이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강의에 대한 걱정 속에 강의가 있는 성당에 갔고, 걱정을 품고 강의 연단에 섰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제 강의에 너무나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셔서 아주 신나게 강의할 수 있었습니다.
90분 동안 쉬지 않고 강의를 한 뒤에 강복과 함께 마쳤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팠던 목과 어깨의 통증이 사라진 것입니다. 조금도 움직이기 힘들었던 딱딱하게 굳은 목과 어깨가 완전히 풀린 것이지요.
이렇게 집중하면 새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집중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 집중이 불편한 마음을 해결할 수도 있는데도, 불편해서 집중할 수 없는 것으로 당연하게 여깁니다.
주님께도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 저를 지켜주시는 부모님과 함께 있으면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면 이 보호가 필요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편안한 마음을 대신 채워줄 사람을 찾아서 친구, 애인, 배우자 등을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편안함보다 상처를 얻어 불편함을 호소할 때가 많습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그분의 사랑에 집중하면서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불편한 마음보다 편하고 기쁜 마음을 간직하면서 지금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유다인들이 대화를 나눕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마귀들렸다는 말도 하고 또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구원의 말씀을 하셔도 듣지 않습니다. 듣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집중할 수 없게 되겠지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 그만큼 주님께 집중하면서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집중하고 있을까요? 주님이 아닌 세상에 집중하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
아무리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더라도 항상 또 다른 기회는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실패라 부르는 것은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추락한 채로 있는 것이다(메리 픽포드).
------------------------
----------------------------------------------------
230330.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깊고 넓은 내적시야內的(視野)를 지닙시다
-기도와 성독(Lectio Divina)-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4)
화답송 시편 한 구절을 오늘 삶의 지표로 삼고 싶습니다. 어제 입원중인 지인과 주고 받은 일화가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옆침대 환자께 예쁘고 고우신 간호사님 음성
오물오물 꿀꺽 생각하며 참으로 천사같은 간호사님이다 싶습니다.
이렇게 일을 예쁜 분위기로 잘 하시다니 감상하는 오늘 점심시간이었나이다. 좋은 오후 되옵소서.”
“주변을 환히 밝히는 꽃같은, 천사같은 간호사님 같습니다! 오후도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입원중인 자매님을 생각하면 아프고 슬픕니다. 이렇게 고운 마음을 지녔고, 25년 이상을 헌신적으로 수도원과 저를 물심양면 헌신적으로 도운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마음이 착잡하고 답답할 때는 그동안 삶의 전 과정을 렉시오 디비나 하는 마음으로 살펴보게 되며 기도하게 됩니다. 35년동안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얼마나 많은 분들이 수도공동체와 관계를 가졌다 떠났는지 살펴 보면 더욱 기도하게 되며 삶의 전 과정을 성독하는 마음이 됩니다.
“깊고 넓은 내적시야를 지닙시다-기도와 성독(Lectio Divina)-”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부단한 기도와 성독이 깊고 넓은 내적시야를 지니게 됩니다. 성독의 대상은 비단 신구약 성경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 및 내 삶의 역사와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 역사 전체에 미치고 있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그러니 부단한 기도와 성독의 훈련이 우리에게 깊고 넓은 내적시야를 선사하면서 무지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합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제1독서의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야 말로 기도의 사람입니다. 하느님과의 은밀한 소통의 대화의 기도가 그의 내적시야를 한없이 깊고 넓게 했음을 봅니다. 결국은 기도와 공부도 이런 내적시야를 날로 깊고 넓게 하기 위함입니다. 역시 “그 무렵”으로 시작되는 말마디가 언제나 지금 여기가 시작 지점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 무렵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새삼 우리의 경우 주님과 대화의 기도를 위한 장이 얼마나 부족한지 깨닫습니다. 예수님 역시 매일 외딴곳에서 아버지와의 내밀한 친교의 기도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바로 우리가 기도할 자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입니다.
“나를 보아라. 너와 맺은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늘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과의 은밀한 내적기도가 아브라함의 내적시야를 날로 깊고 넓게 했으며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미래를 직면하게 했음을 봅니다. 오늘 요한복음을 통해 요한교회 공동체의 성독이 얼마나 깊은 경지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전 과정을 성독했음이 다음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다음 예수님과 주고받는 말씀을 통해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분으로 또 다윗이 그분의 날을 보고 기뻐했음을 고백하는 내용에서 그들의 성독의 경지가 얼마나 깊었는지 잘 드러납니다.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요?”-
이어지는 다음 대목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깊고 넓은 내적시야와 비교할 때 이들 유다인들의 내적시야는 얼마나 협소하고 닫혀 있는지 그리하여 예수님 말씀후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 합니다. 이들의 협소한 내적시야에 이 말씀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불경죄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Before Abraham came to be, I AM)’”
괄호안의 영문을 보면 예수님의 신원이 바로 “하느님(I AM)”으로 드러납니다. 요한공동체의 성독은 이정도로 깊었던 것입니다. 이미 이들은 예수님을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이자 마지막인 하느님으로 알아챘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 삶은 예닮의 여정임과 동시에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가면서 우리의 내적시야는 날로 깊어지고 넓어져 우리의 기도와 성독(Lectio Divina) 역시 날로 풍부해질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다음 화답송 후렴이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시편105.8ㄱ). 아멘.
----------------------------------------------------
230330.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아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며 아브라함과 주님을 저울질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맞나요? 우리는 하늘나라에 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맞나요?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무엇이고, 하늘나라는 무엇인가요.
우선 이것에 대한 대답을 얻으려면 우리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지킨다는 뜻은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뜻과 우리가 하나 되어 살아간다는 뜻이고 이러한 사람은 죽음을 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은 이곳에서도 하느님과 함께 살며, 저세상에서도 하느님과 즉 하늘나라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하늘나라이며 하늘나라는 이승과 저승의 구별 없이 하느님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곳도 저곳도 모두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유다인들은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에 사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영원한 생명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달팽이 같으면 어떻습니까!
아브라함 링컨이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뒤로는 가지 않는다.-
다른이들과 같을 필요 없습니다.
다른이들과 뒤쳐저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포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삶에서의 진짜 승리는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