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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천이라는 말은 무협의 용어요,
온 몸의 기를 운용하는 기공의 세계입니다.
기공수련의 고수가 무술의 경지에 이르면
천하패권을 다투는 무협의 꿈을 꾸는 연금술사가 될 것입니다.
무협의 허상은 불교와 도교의 협작이요,
전쟁의 신화가 만든 천외천의 세계입니다.
무협이 말하는 천외천의 세계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은 상상의 세계요, 무협 작가의 공상입니다.
기공과 무술의 고수가 꿈꾸는 허상의 세계는
인간의 불가항력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내면의 세계, 그 심화의 성처일 것입니다.
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생각의 불장난은
도교와 불교를 비롯한 무협의 허상을 그 잔재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남긴 성서 문학의 세계는
진실과 허상, 그 사이 종교적 믿음의 복불복이 되었습니다.
성서에 대한 가장 미신적 이해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전제적 신앙, 그 이데올로기일 것입니다.
그 미신을 극복하기 위한 실존 신앙은
성경 말씀의 계시적 신본주의 신앙이 아닌 인본주의 무속 신앙을 구현하였습니다.
믿음의 실상과 허상에 대한 실제적 고민은
말씀의 본질에 대한 영감적 조명의 성찰일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믿음을 요구하였고
그 믿음의 구약지대는 신념과 동화되어 바알을 여호와로 믿는 타락한 종교의 실상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투영된 성소와 성전의 타락은
인본주의 신앙, 그 종교성의 한계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진리의 복음과 구원의 말씀에 대한 참된 믿음의 이해는
종교적 신념과 실존신앙과 무속 신앙으로 성서의 본질적인 믿음의 파손을 초래하였습니다.
구약시대와 중간기 시대를 거쳐온 율법적 신앙은 복음서에 나타난 바리새파와 사두개인과 제사장 무리 등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독사의 자식이라는 결론이 말해주듯 지옥의 판결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신약시대는 초대 교회 이후 기독교 이천년의 역사가 말해주듯
중세 로만 카톨릭을 비롯하여 이단과 사이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순례하는 교회의 뒤안길이 되었습니다.
성서의 본질을 훼손하는 신학과 철학의 발달은
포스트 모던 시대 실존적 무속신앙의 종교다원주의를 낳았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는 온갖 이단과 사이비의 창궐로
밤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는 오염지대에 놓였습니다.
대형교회의 맘몬 신앙과 중형교회의 영성신앙과 소형교회의 요원한 비전신앙의 혼탁한 굴레가 되어
이단과 사이비의 빈익빈 현상의 가속화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사사시대의 암흑기가 되었습니다.
탁류에서 맑은 물을 정수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은
진리의 복음과 구원의 말씀에 대한 참된 믿음의 이해로 깨어있는 영감적 조명의 성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어가면서 죽어야 되는 이유를 알기 위한 구원의 몸부림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던져진 끊어진 철로를 달리는 절대절명의 지푸라기가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 참된 선지자는 하나님의 신탁으로 위기 의식을 느꼈고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생명의 줄을 던졌습니다.
남은 자의 구원을 위한 거룩한 그루터기는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받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천하만민을 구원하는
생명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성서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그 나름대로 나와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겠지만
그 믿음의 확신이 거짓으로 수레를 끄는 썩은 줄이라면 화있을 진저라는
심판의 경고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순환의 일주천은 무협의 허상이지만 말씀 묵상의 일주천은
창조와 구원, 그리고 심판에 대한 언약 신앙의 뿌리와 그 실상을 얻게 합니다.
탁류를 정화하여 맑은 물을 얻는 창세기를 통한 말씀 묵상의 일주천은
진리의 말씀에 대한 영감적 성찰의 조명으로 깨어 있는 귀납법적 신앙을 갖게 할 것입니다.
말씀 묵상의 힘, 그 일주천은 사막에 시내가 흐르는 에던 동산 같고,
성전 문지방에서 솟아나는 물이 각처로 흘러 모든 생물이 살고
식물이 자라 열매를 맺는 성소의 물이 흐를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과 소통하는 생명의 기쁨과 환희는
말씀 묵상의 힘, 그 믿음의 열매입니다.
흔히들 창세기는 신앙의 모판이요,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열매를 맺는 나무의 뿌리라고 합니다.
천지 창조를 비롯하여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통한 인류와 가정의 시작은 물론
모든 민족의 시작과 아브라함을 통한 믿음의 언약과 그 후손을 통한 생육하고
번성하는 씨앗의 말씀으로 충만합니다.
창세기를 통한 말씀 묵상의 일주천은
마침내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트래킹 할 것입니다.
청조적 서정으로 가득한 임마누엘 동산은
창세기를 통한 말씀 묵상의 일주천으로 오롯이 경험하며 탄성할 것입니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을 선포하며
창조 신앙의 원형으로 진리의 말씀, 그 성소의 물을 솟쳐냈습니다.
☞ 태초의 천지 창조는 전능의 하나님을 계시하였고
그 전능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족장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창17:1-2)
아브라함의 아들 아식은 야곱의 길을 축복하며
전능의 하나님께서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창28:3-4)
야곱은 밧단 아람에서 돌아오는 길에 벧엘에서 제단을 쌓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과 충만한 언약의 복을 받았습니다.
☞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창35:9-13)
☞ 요셉은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온 형제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은혜를 베풀었으며
야곱은 요셉에게 전능자의 충만한 복으로 축복하였습니다.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창49:24-25)
그 후 전능하신 하나님에대한 신앙은 모세를 비롯하여 여호수아와 룻기와 욥과 잠언과 시편등
성서의 저자를 비롯하여 선지자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창조와 구원에 대한 계시의 말씀으로 찬양과 기도의 신앙이 되었으며
계시된 말씀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신념이 아닌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믿음의 족장들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계시되었지만
여셋 동안의 창조는 오직 모세에게 계시되었습니다.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엿새 동안의 창조는 모세에게 계시되었으며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 오경에만 엿새 동안의 창조가 말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태초의 창조, 그 공간과 시간의 시작은
청세기의 저자를 비롯하여 구약 시대 잠언과 이사야 선지자와 미가 선지자에게
계시의 말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반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잠8:22-31)
☞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41:4)
☞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의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사43:12-15)
☞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5:2)
태초의 창조에 대한 신약의 말씀에는
요한복음과 요한 1서등 요한의 저작과 히브리서에 계시의 말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1:1-2)
☞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히1:8-12)
이렇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은
창조의 결과에 대한 그 능력의 믿음이요, 또 한 구원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다른 성경에는 거의 언급이 없으며
다만 구약에서는 호세아서에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을 아담에 비유하였고
신약에서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라는 사도 바울의 메시야 증거의 복음으로 적용하였습니다.
☞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호6:5-7)
☞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5:14-15)
☞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1-22)
☞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고전15:45-46)
☞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2:12-15)
이 외에 역대기와 누가복음의 계보에 아담을 기록하였으며
유다서는 에녹을 아담의 칠세손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에덴 동산에 대한 후대의 기억은
이사야서에 사막을 에덴 같이 하겠다는 복된 말씀과 에스겔서에
에덴 동산 같은 두로에 대한 심판의 경고뿐입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는 에덴의 회복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 나 여호와가 시온을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셨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사51:3-4)
☞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낭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에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보고 있는 모든 자 앞에서
너를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말미암아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겔28:12-19)
☞ 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겔31:18)
☞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욜2:3)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에덴 동산에 등장하는 생명의 나무는
생명의 샘과 함께 잠언의 교훈이 되었고 계시록의 생명의 구원, 그 완성된 그림이 되었습니다.
☞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
그의 지식으로 깊은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잠3:18-20)
☞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잠11:30-31)
☞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잠13:12-13)
☞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잠15:4-5)
☞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22:12-14)
☞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22:17-21)
커피 한모금 마시고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몇 시간이 지나 무심코 커피잔을 보았는데 식은 커피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말씀 묵상을 하면 일주천이라는 말 그대로 커피 한잔 마실 시간이면 충분한데
글로 쓰니까 창세기를 통한 말씀 묵상의 일주천은 몇 날 몇 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
사극의 대장장, 그 끝없는 투어가 계속 진행중이고......
20부작의 사극 천명을 시청하였고 62부작의 사극 선덕여왕을 시청하고 있는데
선덕여왕의 내용이 생소 것을 보면 2009년 방영할 때는
가장 바쁘게 활동할 때라 제목만 기억한 것 같습니다.
창세기의 에덴 동산과 생명 나무는
족장 시대를 비롯하여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복음서와 서신서에도
성서의 저자에 의해서 어떤 신화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덴 동산과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신화적 의미를 부여함으로
창세기의 에덴 동산을 신화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생명 나무를 생명의 말씀을 가진 목자라고 해석하고
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비진리를 가진 목자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단의 사설(邪說)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 나무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탄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이단의 사설입니다.
에덴 동산과 생명 나무에 대한 구속사적 옷을 입히면
창세기는 신화가 되고 설화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엿새 동안의 천지 창조에 대한 구속사적 옷을 입히면
창세기의 창조는 종교적 목적을 위해 꾸며낸 신화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다양한 구속사적 이해는
성경을 신화로 만들어 버리는 자가당착의 모순과 오류에 늪에 함몰될 것입니다.
이단과 사이비의 성경에 대한 비유 풀이는
구속사적 해석을 전제한 알레고리와 메타포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진리의 말씀, 그 자체이지만
성경에 대한 구속사적 해석은 이현령비현령 신학적 관점입니다.
강단의 설교, 그 구속사적 알레고리는
성서 저자의 영감적 성찰의 조명이 아니라 이단과 사이비의 사설이요, 성서의 농단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대한 성서의 농단으로 가득한 강단의 설교를
언제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며 자신의 영혼을 파괴할 것입니까?
창세기의 창조 신앙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계시의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창조의 날을 지질학의 기간으로 보는 것은
창조 신앙이 아니라 신념입니다.
또한 재창조설, 곧 간극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도
창조 신앙이 아니라 신념입니다.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물질의 생성과 변화, 그리고 생명의 진화를 믿는 망상의 신념입니다.
오히려 창조는 과학이요,
창조의 원리는 과학적 지식의 원형이요, 그 산물입니다.
창조가 없다면 과학도 없고
진화론은 과학의 미신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는
계시 신앙의 믿음이 아닌 이성의 논리적 사고 개념과 그 신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요,
계시적 신앙은 곧 성서의 믿음입니다.
진화론의 미신은 창조의 과학 앞에 썩은 동아줄의 신념이요,
창조의 원리는 하나니의 충만만한 지혜요, 그 지식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창세기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지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의 역사(役事)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에덴을 창설하시고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주었습니다.
☞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 리라 하시니라(창1:26-28)
그리고 에덴에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어
생명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은 하와는 아담과 함께 금단의 열매를 먹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원죄가 되어
심판의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범한 본질적인 죄는
인류의 역사, 범죄의 굴레가 되었습니다.
창세기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영생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였습니다.
죄의 용서와 그로 말미암은 죽음에서의 영생은
생명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요, 은혜로 임한 선한 형상의 정관이 되었습니다.
아담의 죄로 말이암은 죽음의 심판을 받지 않은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구원의 본질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정관의 은혜는
영생의 구원을 이루는 본질이요, 하나님의 선한 형상, 그 소통과 공유의 구원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로 살았던 노아는
홍수의 심판에서 구원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창6:6-10)
아담의 칠세손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살았던 노아는 물에서 구원을 이루는 세례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3:20-21)
홍수의 심판은 노아의 방주로 말미암은 구원으로
세례의 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곧 은혜의 기적으로 홍해의 물을 건넌 하나님의 백성은
바다에서 세례를 받은 구원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1-4)
주의 길을 예비하며 물로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구원에 대한 성령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1:7-8)
메시야, 곧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성령의 세례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주의 백성이 받을 성령이요, 그 구원을 인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3-14)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증거한 메시야의 성령 세례는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에 대한 다른 견해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따르는 미혹의 역사입니다.
에녹과 노아의 하나님과 동행은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손, 곧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본질적인 구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을 잃어버린 구원의 실상은
이단과 사이비의 종교적 탐욕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동행은 구원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거룩한 형상의 회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첫사람 아듬은
에덴 동산에서 생명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서 영원히 살 수 있었지만 범죄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영위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었지만
하나님은 노아의 방주를 통한 구원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주시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위하여 생명 나무의 실과 대신
짐승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은혜를 주었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선악과의 법이 있었듯이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새로운 노아의 후손에게는 짐승의 고기를 피 채 먹지 말라는 법을 주었습니다.
☞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창9:1-7)
이와같이 고기를 그 생명되는 피 채 먹지 말라는 법은
홍수의 심판에서 구원받은 노아의 후손 곧 새로운 인류에게 주신 생명의 법이었습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에게 주신 생명의 법은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것이요,
노아의 후손에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에게 고기를
그 생명되는 피 채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훗날 모세의 율법이 되었으며
신약시대 예루살렘 총회에서 고기를 피 채 먹는 것을 생명의 법으로 금하였습니다.
☞ 너희가 사는 모든 곳에서 새나 짐승의 피나 무슨 피든지 먹지 말라
무슨 피든지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다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레7:26-27)
☞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행15:28-29)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된 여호아의 이름과 그 율법은
하나님의 선한 형상의 임재였습니다.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19)
구원의 본질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는
하나님의 선한 형상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정관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한 형상으로 반포된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고 그 율법을 버렸으며
가나안의 우상, 그 형상을 따라 온갖 범죄의 굴레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실마리는
에덴 동산의 아담과 노아의 후손과 아브라함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본질이요,
결과적으로 종말론적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힘입는 구원의 본질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구원의 삶은
노아의 법과 모세의 레위기 법과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을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본질적인 구원에서 멀어질수록
생피든 삶은 피든 요리한 피든 그것을 먹는 야만적인 음식 문화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뿐만 아니라 속죄의 의미를 가진 피를 먹는 음식 문화는
구원의 본질에서 탈선한 이방인의 음식 문화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선지국과 순대는
향토적 전통 음식으로 고착화되었습니다.
동남아의 생피를 먹는 음식 문화는
저주받은 삶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속좌의 의미를 가진 피 채 먹지 말라는 생명의 법을 어긴다면
그 받은 구원의 은혜를 모독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안식인인의 레위기법 준수는 아닐지라도
고기를 그 패 채 먹는 음식 문화는 삼가는 것이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하나님을 향한 본성일 것입니다.
생명의 법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구원의 본질이 되었습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4-7)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게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에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3-2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9-10)
이렇게 예수의 형상을 힘입는 것이 구원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형상, 그 본질로 완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천하만민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빛입니다.
창세기의 묵상 가운데 노아 홍수 심판의 원인이 된
하나님의 아들과 네피림에 대한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그들 사이에 태어난 네피림은 고대의 용사요, 거인이며 항상 악한 생각을 하는 악명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6:2)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6:4)
창세기 6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들과 네피림.....
그들은 누구인가?
혹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경건한 셋의 후손
그들의 타락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셋의 후손 곧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등
경건한 후손의 대를 이은 위대한 신앙을 계승하였하였습니다.
에노스 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와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홍수의 심판을 받지 않았고
노아는 당대에 의인이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방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아들들을 타락한 셋의 후손으로 보는 것은
에노스와 에녹과 노아의 선한 영향력으로 볼 때 추측에 불과합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네피림은
타락한 천사와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고대의 반신반인의 괴물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천사와 사람과는 성적 관계를 할 수 없으며
더욱 창조의 원리로 볼 때 후손을 낳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타락한 천사로 이해하는 것은
진화론의 미신보더 더 황당한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들과 네피림에 대한 건강한 이해는 무엇인가?
그것은 창세기 저자의 시점에서 보아야 하며
창세기 전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 대한 여호와에 대한 이해와 동일하며
여호와는 출애굽기 6장에서 모세에게 처음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인데 창세기 전자는
창세기에 여호와의 이름을 수 놓았습니다.
☞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6:2-5)
☞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말은
여호와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하와가 한 말이라고 창세기 저자는 기록하였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6)
모세 때 계시된 여호와의 이름을
에노스 시대 사람들이 불렀다고 창세기는 기록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아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고 하였고
구스가 낳은 니므롯은 세상의 용사라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는 속담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창세기는 기록하였습니다.
출애굽기 6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계시 되었을 뿐인데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이 단을 쌓으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저자의 모순이 아니라
통전적인 영감적 성찰의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노아 홍수 심판 때 하나님의 아들들과 네피림도
창세기 저자의 시점과 관점으로 보아야 하며 창세기 하나님의 아들들과 네피림은
고대의 신전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이며 네피림은 그 악명의 굴레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계시받고 네피림의 후손이 존재한다는 보고를 받은 모세 시대의 가나안은
바알과 아세라와 아스다롯 등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혼음 제의식을 행하였고
사제들은 신의 아들로 추앙받았습니다.
이러한 혼음 제의식은 노아 시대 홍수 심판에 투영되었고
항상 악한 것을 생각하는 악명은 네피림의 굴레가 되었습니다.
노아시대 네피림을 홍수로 심판하였듯이
가나안의 네피림은 하나님의 병기가 된 이스라엘 백성의 정복 전쟁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성경에 대한 통전적인 영감적 성찰의 조명은
원어에 집착하는 글자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서 창세기 저자의 시점에서
고대를 바라보는 통전적인 이해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과 네피림에 대한 이해는
셋의 경건한 후손, 그 타락이 아니요, 타락한 천사와 인간의 성적인 상간(相姦)도 아니며
고대 종교의 혼음 제의식, 그 타락한 시대의 종교 문화적으로 이해해야
창세기의 네피림과 민수기의 네피림이 연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