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두보 (杜甫)
중국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으로서 자는 자미(子美)이며 호는 소릉(少陵)이다. 있었던 빈약하고 엉성한 내용을 수식어로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참모습을충실하게 묘사하고자 했다. 천보(天寶) 3년(744),때마침 장안의 궁정에서 추방되어 산둥 성으로향해가고 있던 이백과 뤄양에서 만났다. 이백의 천재적인 풍격을 사모하던 두보는 이백과 함께 양송(梁宋 : 지금의 허난 성) 지방으로 유람을 떠났다. 여기서 이백 외에 시인 고적(高適)/잠삼(岑參) 등과도 알게 되어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그해 겨울 이백과 헤어진 두보는 강남(江南)으로 향했고 그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두보는 오랫동안 이백을 사모해서 종종 그를 꿈속에서 만나는 일도 있었는데 사흘 밤이나 계속해서 이백을 만나는 꿈을 꾼 후 지은 것이 〈몽이백이수 夢李白二首〉이다. 천보 5년(746) 두보는 장안으로 갔다. 그후 약 10년 동안 수도인 장안에서 과거시험에 급제하지도 못하고 관직도 얻지 못한 채 곤궁한 생활을 계속했다. 명사/고관의 집에도 드나들고 추천을 희망하는 시들을 짓기도 했고 몇 번인가 시문을 조정에 바쳐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다. 천보 10년(751) 〈삼대례부 三大禮賦〉를 바쳐 현종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집현원대제(集賢院待制)의 명을 받고 관리로 뽑힐 순서를 기다렸으나 결국 임용되지 못했다. 당대의 시인은 대체로 관계(官界)에의 진출을 원하고 정치참여를 구하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이는 시대적인 분위기이기도 했고 또 임용되지 않으면 세상에 나아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세제민의 이상은 예로부터 중국 지식인의 공통된 희망이었다. 두보는 그것을 위해서는 우선 천자(天子)가 옛날의 요/순(堯舜) 같은 훌륭한 임금이 되어서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해가는 것이 첫째이고 그것이 백성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실제로 두보에게 정치적 재능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가(史家)들은 두보를 "즐겨 천하의 대사를 논했지만 이상이 높고 실제적이지 못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정치가로서 세상에 아무런 공헌도 할 수 없는 것을 항상 부끄럽게 여기고 또 초조해했다. 장안에서의 두보의 생활은 불우하고 궁핍한 것이었다. 두보의 눈은 차츰 사회의 모순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의 시는 사회의 불합리한 실정을 여실히 그려냈다. 당은 초기부터 끊임없이 국경에 군대를 보내 전공(戰功)을 거두어 변경에서 위세를 떨쳤으나, 천보연간(742~755)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정치적 파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천보 10년 남조(南詔)/대식(大食)/거란에게 크게 패하자 병사를 보충하기 위해 농민을 끌어가고 조세는 더욱 무겁게 부과했다. 쓸데없는 전쟁에 내몰려가는 병사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하소연한 시 〈병거행 兵車行〉은 이 해에 쓴 작품이다. 개원연간에는 풍년이 계속되었으나 천보연간에 들어오면서는 기근이 잇달았다. 천보 13년에는 장마가 심하게 계속되어 기근으로 점점 더 생활이 어려워지자 두보는 한때 처자를 봉선현(奉先縣)의 친척집 농가에 맡겼다. 다음해 처음으로 우위솔부(右衛率府)의 주조참군(胄曹參軍), 즉 금위군(禁衛軍)의 무기고 관리로 정8품(正八品) 하(下)라는 가장 낮은 관직을 얻었으나 일단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서둘러 처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장안을 출발해서 도중에 리산 산[驪山] 기슭에 다다르니 그곳 온천에는 정치에 싫증난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조정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추위를 피해 와서 환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보는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냄새가 나지만, 길에는 얼어죽은 해골이 뒹굴고 있다"고 하며 빈부의 차가 너무나도 현격한 세상에 대해 분노를 토로했다. 봉선현에 겨우 당도해보니 처자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어린 자식은 굶어죽어 있었다. 이때 두보는 비분강개의 울분과 마음을 무겁게 덮쳐 누르는 서글픔을 강렬하게 호소한 장편의 시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 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지었다. 천보 14년(755) 11월 9일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가족들을 데리고 산시 성[陝西省] 바이수이 현[白水縣]/부주(州) 등지로 난을 피해 옮겨다녔다. 어려운 피난길을 계속하다가 홍수를 만나 가족을 부주 교외의 강촌(羌村)에 남겨두고, 자신은 닝샤 성[寧夏省] 링우[靈武]에서 즉위한 숙종(肅宗) 휘하로 가던 도중 반란군에게 잡혀 장안으로 도로 끌려갔다. 수도는 황폐해졌고 반란군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었다. 두보는 장안에서 겨우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나날을 보내면서 망국의 비애를 애도하고 가족의 안부를 염려했다. 이무렵 〈춘망 春望〉/〈월야 月夜〉/〈애왕손 哀王孫〉/〈애강두 哀江頭〉 등 많은 유명한 시를 지었다. 지덕(至德) 2년(757) 반란군에 내분이 일어나서 안녹산이 살해되었다. 숙종은 링우로부터 장안에서 가까운 펑샹[鳳翔]으로 행재소(行在所)를 옮겼다. 두보는 4월에 장안을 탈출해서 펑샹으로 급히 달려갔다. 황제는 그 공을 가상히 여겨 두보를 5월에 좌습유(左拾遺)에 임명했다. 이무렵 휴가를 얻어 부주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러 가게 되었는데 이 여행길에서 두보는 많은 걸작시를 남겼다. 〈구성궁 九成宮〉/〈옥화궁 玉華宮〉/〈행차소릉 行次昭陵〉/〈강촌삼수 江村三首〉 및 장편의 〈북정 北征〉이 그것이다. 특히 〈북정〉은 앞에서 예를 든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와 더불어 두보 시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히는데, 나라와 군주에 대한 충성, 가족에 대한 애정을 노래한 것으로 비장미가 넘친다. 그해도 저물어 장안은 관군에 의해 탈환되고 숙종과 상황(上皇 : 현종)도 장안으로 돌아왔다. 두보도 장안의 궁정에서 좌습유의 관료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란군은 아직도 중원의 각지를 황폐시키고 있었고 시국은 여전히 불안했다. 정치의 결함을 보완한다는 좌습유라는 간직(諫職)에 있던 두보의 의견은 하나도 중시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그의 기대에 어긋났다. 지덕 2년 11월부터 다음해인 건원(乾元) 1년(758) 5월까지 그는 장안의 조정에 있었으나 6월에 화주(華州)의 사공참군(司功參軍)이라는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건원 1년(758)의 가을에서 겨울 무렵에는 관군의 세력이 한때 커져서 뤄양으로 가는 길도 뚫렸으므로 오랫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해 반란군 사사명(史思明)이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顔慶緖)를 도와 대적하는 바람에, 관군은 크게 패하고 뤄양은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어 두보는 다시 화주로 돌아왔다. 화주로 돌아오는 길은 가던 길과 달리 짙어진 전란의 기운으로 어디나 어수선했고 백성의 고난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신안(新安 : 허난 성 소재) 부근에서 본 현실을 두보는 소위 '삼리삼별'(三吏三別), 즉 〈신안리 新安吏〉/〈동관리 潼關吏〉/〈석호리 石壕吏〉/〈신혼별 新婚別〉/〈수로별 垂老別〉/〈무가별 無家別〉의 시로 읊었다. 건원 2년(759)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국경에 있는 진주(秦州 : 간쑤 성[甘肅省] 톈수이 현[天水縣])로 옮겨갔다. 진주에서 겨우 4개월간 머물렀지만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동곡(同谷 : 간쑤 성 청 현[成縣]) 땅이 기후도 좋고 식량도 구하기 쉽다는 소리를 듣고 10월에 동곡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1개월을 지냈지만 생활은 더욱더 궁해져서 12월초에 쓰촨[四川] 지방의 청두[成都]로 갔는데 가는 길에 각각 12수의 기행시를 남겼다. 그 여정은 산천이 험준하고 먹을 것은 떨어진데다 처자를 이끌고 가는 실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이 지독한 체험에서 생겨난 기행시 여러 편이 두보 시의 정점을 이루고 있으며 중국의 기행시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손꼽힌다. 이 시기 동곡에서의 생활을 노래한 시로서 〈건원중우거동곡현작가칠수 乾元中遇居同谷縣作歌七首〉가 있다. 청두에 겨우 도착해서 친분이 있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한숨을 돌리기까지는 실로 그의 생애에서 최악의 시기였다. 청두에서 두보는 친분이 있던 승려와 친척두제(杜濟)의 도움을 받았다. 옛 친구 엄무(嚴武)가 성도윤(成都尹) 겸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로 재임하고 있어서 두보에게 누구보다도 큰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두보는 청두의 교외 완화계(浣花溪) 부근에 초당을 마련하고 여기에서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이즈음 그의 시에는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고난을 우려하고, 멀리 떠돌아다니고 있는 동생들을 그리워하는 절절한 시도 있긴 하지만, 자연을 읊은 귀중한 절구(絶句) 등도 보여서 작자의 유유자적한 심경을 느낄 수 있다. 쓰촨에서의 평화로운 기간은 2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보응(寶應) 1년(762)에 엄무가 서울로 소환되고 청두 부근에서 서지도(徐知道)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난을 피해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광덕(廣德) 1년(763) 1월 드디어 9년에 걸친 안사의 난이 끝났으나 이어지는 위구르족과 토번(吐番)의 침입으로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소원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쓰촨 지방을 전전했다. 그런 중에 엄무가 다시 청두에 돌아오게 되어 광덕 2년(764) 3월에 청두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다. 엄무는 두보를 천거해서 절도참모(節度參謀)/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삼았다. 그러나 엄무의 막중(幕中)에서의 생활은 결코 즐겁지 않았고, 동료들과도 마음이 맞지 않은 데다가 관청생활의 불편함도 견딜 수 없었다. 게다가 두보는 이전부터 폐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즈음에는 중풍 기운까지 나타나서 팔다리가 저렸다. 엄무에게 호소하여 영태(永泰) 1년(765) 1월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초당의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영태 1년 4월에 엄무가 갑자기 죽자 두보는 유일한 후원자를 잃고 더이상 쓰촨 지방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5월에 처자를 이끌고 배로 양쯔 강[揚子江]을 내려와서 또다시 표류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추석이 지난 후 운안(雲安 : 지금의 윈양[雲陽])으로 내려왔다. 폐병과 중풍 때문에 여행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져서 대략 반년 동안 거기서 요양생활을 했다. 이때 쓰촨 지방에서는 내란이 일어났고 북방에서는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의 침입이 있어 시국은 점점 더 험악해졌고, 두보의 귀향하려던 소망은 더욱더 멀어졌다. 다음해인 대력(大曆) 1년(766) 이미 55세가 된 두보는 늦은 봄에 병이 얼마간 나아지자 다시 강을 따라 내려가서 기주(夔州 : 쓰촨 성 펑제 현[奉節縣])로 갔다. 대력 1년 늦은 봄부터 대력 3년 봄까지 약 2년간을 이곳에서 지냈다. 두보는 기주에 온 이래로 2년 동안 430여 수에 이르는 많은 시를 지었는데 이는 전체 시의 2/7에 해당한다. 그 시는 점점 율격(律格)이 엄격해지고 자구(字句)도 단련되어 정연한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에서는 더이상 이전의 시에서 나타났던 혹독한 사회비판이라든가 격렬한 분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비장함은 밑바닥에 가라앉고 다만 무거운 우수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절실하게 배어 있었다. 장년시대에 이백/고적 등과 허난 성 지방에 놀러갔던 때의 추억, 장안에서의 생활, 안사의 난, 그리고 결국 쓰촨 지방으로 흘러들어오게 된 추억을 시로 읊었다. 〈추흥팔수 秋興八首〉는 칠언율시 8수의 연작으로 늙고 병든 두보의 절절한 우수를 읊은 명편이다. 이 시기의 시는 늙은 시인의 침통한 우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두보가 기주에서 지은 시는 이미 힘이 다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이 위대한 시인이 발한 최후의 빛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산골짜기에 있는 고장의 열악한 기후와 친구도 없는 적막함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대력 3년(768) 정월 중순경 또다시 배를 타고 싼샤[三峽]를 내려가 장링[江陵]으로 갔다. 그러나 장링에 와보니 남들에게 신세를 지기도 어렵고 생활이 궁해져서 늦가을에 다시 배를 타고 떠났는데, 이때는 이미 발도 부자유스럽고 귀도 반쯤 먹어서 젊은 사람들에게 모멸을 당하는 일도 많아졌으며 어디를 가도 안주할 곳이 없었다. 궁안[公安]에서 당분간 머물다가 연말경에 악주(岳州)로 내려갔다. 칠언율시 〈등악양루 登岳陽樓〉는 이때 지어진 것인데 이 시의 웅대하고도 침통한 멋은 실로 최고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대력 4년(769) 1월 악주에서 배를 타고 둥팅 호[洞庭湖]에 들어갔다. 이로부터 1년 수개월간 두보 일가는 둥팅 호를 떠돌아다녔다. 그후 두보는 탄저우[潭州]로 가서 거적으로 위를 가린 배를 집삼아 지내며 부자유스런 몸으로 약초를 캐서 시장에서 팔기도 했다. 이즈음의 시는 신세진 사람들에게 바치는 것들이 많아서 그의 궁핍한 정도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그해 4월 탄저우에서 난이 일어나자 두보 일가는 난을 피해 샹장 강[湘江]을 거슬러올라가 천저우[州] 있는 외가쪽 숙부를 찾아가는 도중에 레이양[陽]에서 홍수를 만나 방전역(方田驛)에 정박했는데 5일간 먹을 것이 없었다. 레이양의 현령이 이 소식을 듣고 술과 고기를 보내주자 두보는 감격해서 감사의 시를 지어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건강이 회복될 여지 없이 가을과 겨울에 걸쳐 샹장 강을 떠돌아다닌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사이의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력 5년(770) 겨울 탄저우에서 웨양[岳陽]으로 가는 도중 두보는 그 고생스런 일생을 끝마쳤다. 이때 나이 59세였다. 가족은 그의 관을 향리로 운반할 돈이 없어 오랫동안 악주에 두었는데, 그후 40여 년이 지난 뒤 두보의 손자 두사업(杜嗣業)이 뤄양 옌스 현[偃師縣]으로 운반하여 서우양 산[首陽山] 기슭에 있는 선조 두예(杜預)의 묘 근처인 할아버지 두심언의 묘 옆에 묻었다 한편,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의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訓)에 뛰어났으며, 청(淸)의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는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의 《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
포청천(包靑天)
북송시대의 유명한 정치가이다. 매우 성행하였다.명대에는 각종 전기(傳奇) 지방희(地方戱)와 수백권에 이르는 소설화본 ≪포공안(包公案)≫으로 더욱 발전하였으며, 청대에는 다시 ≪용도공안(龍圖公案)≫≪삼협오의(三俠五義)≫≪칠협오의(七俠五義)≫ 등의 장편소설로 발전하였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중국의 지방희는 물론 희곡과 소설 속에서 포증을 주제로 한 작품은 많이 전해지고 있다. 1993년부터 그를 주인공으로 한 「포공(包公)」극집이 계속 쏟아져 나오면서 약 500여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이로써 포증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포청천이란 이름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는 이미 시공을 초월하여 청백리(淸白吏)의 전형적인 인물로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그 명성이 자자하다. 북송 진종(眞宗) 함평(咸平) 2년(999), 포증은 전통적인 학자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송왕조의 하급관리였다. 북송 인종(仁宗) 천성(天聖) 5년(1027), 포증은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건창현(建昌縣) 지현(知縣)에 임명되었으나 연세가 많은 부모님을 부양하기 위해서 관직을 사임하였다. 몇 년 후 양친이 모두 돌아가시자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으며, 그후에도 명리를 탐하지 않고 고향에서 정직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였다. 북송 인종 경우(景祐) 4년(1037), 그는 천장현(天長縣: 지금의 안휘성 천장현)의 지현에 임명되었다. 약 40여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지만, 이때부터 그는 죽기전까지 강직한 성품으로 청렴결백하고 공평무사한 정치를 펼침으로써 위대한 발자취를 중국역사에 길이 남기게 되었다. 그가 천장현 지현으로 있을 때, 한번은 그 현에 특이한 소송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어떤 농민이 밤에 소를 외양간에 매어두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소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그 농민이 소의 입을 벌리고 살펴보니 누군가에 의해 소의 혀가 잘려있는 것이었다. 분통이 터져 참을 수 없었던 그 농민은 즉시 관청으로 달려가서 고소를 하고, 포증에게 소의 혀를 자른 사람을 잡아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 미궁에 빠진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포증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 농민에게, "일단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그 소를 도살하여 팔아버리게."라고 하였다. 당시의 법률에 의하면 소는 개인이 임의로 도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혀가 잘린 소는 얼마 살지도 못할 것이고, 관청에서 소를 도살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결국 그 소를 도살하였다. 다음날 어떤 사람이 천장현 관청으로 찾아와서 그 농민이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고발했다. 이에 포증은 자세한 내막을 물어본 후 즉시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정말 대담한 놈이로구나. 네가 남의 소 혀를 잘라놓고 도리어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그 사람을 고발하다니!" 그 사람은 갑작스런 포증의 호통에 할말을 잊고 멍하니 있다가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그의 죄행을 사실대로 인정하였다. 사실 소의 혀를 자른 사람은 그 농민과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먼저 소의 혀를 자른 다음에 다시 그 농민이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고발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이후 포증의 판결에 대한 명성이 크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포증은 여러 곳에서 지방관을 역임하였는데, 그는 가는 곳마다 과중하고 잡다한 세금을 없애고 억울한 사건을 깨끗이 해결해 주었다. 그후 그는 경성(京城)으로 가서 간관(諫官)을 역임하면서 인종에게 불법을 저지른 관료들을 막기 위한 많은 시책들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북송은 범중엄(范仲淹)의 신정(新政)이 실패로 끝난 후 조정의 부패가 날로 극심해졌다. 특히 경성 개봉부(開封府)에서는 고관대작들과 황제 인척들의 부정부패가 더욱 심하였으며, 그들은 국법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가우(嘉祐) 원년(1056) 12월, 이러한 혼란한 정치적 상황하에서 인종(仁宗)은 개봉(開封)의 질서를 정돈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포증을 개봉부지부(開封府知府)에 임명하였다. 포증은 그 이듬해 3월에 정식으로 부임하여 가우 3년 6월까지 약 1년 4개월간 개봉부를 맡았다. 개봉부는 황실의 내외척과 권문세족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그전에는 그 누구도 그 직책을 맡고 권문세족들과 내통하여 뇌물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포증은 개봉부지부에 임명된 이후 이러한 부패를 척결하기로 결심하였다. 송대의 법규에 의하면, 누구든 관청에 고소를 할 때는 먼저 대리인에게 부탁하여 고소장을 쓴 다음 담당관리를 통하여 그것을 지부에게 전달해야 하였다. 이때 간악한 소송 대리인들은 사기를 쳐서 무고한 소송인들의 재물을 갈취하곤 하였다. 포증은 그러한 법규를 철폐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고소를 할 때는 직접 개봉부 앞으로 와서 북을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북소리가 울리면 개봉부에서는 정문을 열고 백성들이 직접 안으로 들어와서 고소를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개봉부의 관리들은 더 이상 중간에서 농간을 부릴 수 없게 되었다. 어느 해에 개봉에 홍수가 발생하였는데, 알고 보니 그곳의 수로가 막혀 배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상조사에 나선 포증은 어떤 환관과 권문세족이 수로를 점유하고 거기에 화원과 누각을 만들었기 때문에 수로가 막혔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포증은 즉시 명령을 내려 그들에게 수로 위에 세운 모든 건축물을 철거토록 지시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그것을 철거하려고 하지 않았다. 개봉부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계속 독촉을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억지를 쓰며 땅문서를 꺼내 그 땅이 자기 소유라고 강변하였다. 포증은 다시 그것을 자세히 조사해 보고 그 땅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에 화가난 포증은 그에게 강제 철거 명령을 내리고 상소를 올려 그 사실을 인종에게 고하였다. 결국 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 화원을 철거하였다. 포증의 법집행이 엄격하다는 사실들은 전해들은 개봉부의 권문세족들은 함부로 나쁜짓을 저지르지 못했다. 그후 개봉부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포증이 청렴한 관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당시 민간에서는, "청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염라대왕과 포증이다."라는 노래가 전해지고 있을 정도였다. 포증은 친척과 친구들에게도 매우 엄격하였다. 어떤 친척이 그를 후원자로 이용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세월이 갈수록 친척과 친구들도 그의 강직한 성품을 파악하고는 더 이상 개인적인 일로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가우 6년(1061), 인종은 포증을 매우 신임하고 중시하여 그를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승진시켰다. 그는 고관이 된 후에도 사생활은 일반 평민과 같이 소박하고 검소하였다. 그 이듬해 5월 그는 중병을 얻어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후대에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우리 포씨(包氏) 집안의 선산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라." 포증은 살아서는 청백리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사람들은 그를 청백리의 전형적인 인물로 삼고 그를 추앙하여 '포공(包公)"이라 하였다. 민간에는 포공이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하고 부패한 권세가들을 과감하게 처단하는 이야기들과 포공의 재판을 다룬 희곡/소설 등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비록 그것들 중에는 허구적인 이야기도 많지만 거기에는 청백리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이 반영되어 있다. 탐관오리와 악덕 토호세력을 척결한 것은 포증의 일생 중 가장 돋보이고 가장 칭송을 받는 부분이다. 역사적으로는 유명한 포공희(包公戱)가 많다. 희곡 속에서는 청백리 포증의 형상 뿐만 아니라 장룡(張龍)/조호(趙虎)/왕조(王朝)/마한(馬漢)/공손선생(公孫先生)/남협전소(南俠展昭)의 형상도 소조하였다. 이들은 일치단결하여 뛰어난 기량으로 포증을 도우면서 부정을 저지른 황제의 친척이나 외척은 물론 모든 탐관오리들을 처벌하였다. 이때 포공은 항상 손에 상방보검(尙方寶劍)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황제의 성지와도 맞설 수 있는 것이었다. 용작두, 호작두, 개작두, 음양경(陰陽境) 앞에서는 염라대왕도 물러나야 하고 어떠한 요괴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러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민중들이 창조해 낸 것으로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모두 근거없이 날조된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예술적 창조는 모두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증은 30여년의 재임 시절에 관직을 박탈하거나 강등시키는 등 의법처리한 고관대작이 무려 30여명 이상이나 되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기드문 경이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개인과 하나의 사건을 위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조사하여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 포증에 의해 탄핵된 사람들은 모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중에는 포증보다 관직이 높은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강서전운사(江西轉運使) 왕규(王逵)와 송상(宋庠)/장요좌(張堯佐)등의 탄핵은 모두 전국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장귀비(張貴妃)의 백부 장요좌를 탄핵한 것은 가장 전형적이면서도 대표적인 사건이다. 현재까지도 중국인들은 포공의 사당을 찾아가 그를 신으로 숭배하고 있다. 그의 공평무사한 판결과 청렴결백한 생활, 예리한 통찰력은 많은 대중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이로써 그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신적인 인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그는 민간종교에서 숭배하는 신이지만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믿는 종교적인 "하느님"과는 다르다. 즉 그는 하늘에서 강림한 신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서 초인적인 신으로 변화된 "인신(人神)"인 것이다. 포공에 대한 숭배는 마카오에서 가장 성행한다. 지금도 마카오에서는 매일 포공의 사당을 찾아가서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행열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숭배는 포공이 선한 사람을 보호해주고 악한 사람을 징벌해 주며, 재앙을 없애주고 복을 내려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포공에 대한 숭배는 사회 정의와 바른 정치의 실현에 숭배라고 할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