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제주도 제주의 상징인 관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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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17:10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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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상징인 관덕정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서거정(徐居正)이 제주목의 제영을 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눈이 꽃 사이에 가득한데, 푸른 새가 울고 서리가 울타리가에 깊었으니 누른 감자(柑子)가 익었도다. 구름이 봉도에 열리니 오잠(鰲岑)이 가깝고, 날이 부상에 나오는데 바다 기운이 휩싸였도다. 땅이 선도에 연하였으니 사람 살기가 좋고 공 바치는 것이 조정에 들어가니 산물이 풍부하도다. 이름난 기마(騎馬)는 이미 대원(예전의 중앙아시아에 있던 나라 이름)의 신기한 말인 요뇨(騕褭, 신라 때의 진기한 말 이름)보다 진하고, 향기로운 감자는 한(漢)나라 포도(葡萄)보다 더 좋다.
제주시 삼도1동, 제주시의 중심가에 자리한 관덕정(觀德亭)은 제주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이중 기단 위에 세운 정면 5칸에 측면 4칸인 단층의 팔작지붕이다. 세종 30년인 1448년에 제주목사인 신숙청(辛淑晴)이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지은 관덕정은 성종 11년인 1480년에 중수되었다.
관덕정 (1)
조선시대에 목사가 세운 관덕정은 제주 사람들이 모이는 회합의 장소였으며 관덕정 앞 광장에 큰 시장이 서기도 했다.
관덕정은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 관덕정은 “평소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뜻으로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에서 지은 이름이다.
이 정자에는 ‘관덕정’,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등 세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안평대군이 처음 썼던 현판은 불에 타 사라지고 지금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이덕형의 장인이기도 한 이산해가 쓴 현판이 남아 있고,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훗날 이 관덕정을 중수한 서거정이 중수기를 지었다.
제주는 본래 옛날의 탁라국인데 곧 우리 동방의 구한(九韓)의 하나다. 신라 때 비로소 와서 조회하였고 고려 초년에 와서 항복하여 나라가 없어지고 현(縣)이 되었다. 고려 말년에 기황후가 빌리어 목장을 두었는데, 명나라 때 이르러 다시 우리나라에 예속시켰다. 대개 제주가 바다 가운데 있어서 땅의 넓이가 거의 500리나 되고 사는 백성이 8000~9000호나 되고, 기르는 말이 또한 수만 필이나 되며 그 산물의 풍부한 것이 다른 고을의 배나 된다. 고을이 또 일본과 서로 이웃하였으니 방비하는 방책이 실로 복잡하고 어렵다. (······) 이제부터 고을 사람들이 날마다 여기에서 활 쏘는 것을 익히어 한갓 쏘는 것만이 아니라 말 타고 쏘는 것을 익히고, 한갓 말 타고 활 쏘는 것만 익힐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싸우고 진을 치는 것을 익혀야 할 것이다.
관덕정은 창건 이후 제주의 역사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1901년에 일어났던 신축교난 당시 지도자였던 이재수가 관덕정 광장에서 효수되었다. 1947년 2월 10일에는 제주 시내의 중학교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양과자를 먹지 말자”고 외쳤다. 그리고 근세의 역사에서는 4ㆍ3항쟁 당시 무장유격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의 시신이 며칠이나 내걸려 있었던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관덕정 (2)
제주시의 중심가에 자리한 관덕정은 제주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곳은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지은 건물이다.
제주 지도
[네이버 지식백과] 제주의 상징인 관덕정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7 : 제주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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