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당당히 살꼬? 라는 물음 뒤에 붙는 막연한 걱정부터 앞선다.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공부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헌데 새롭게 공부를
하라니? 참으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공부만하다 죽는단 말인가` 라고 반문하게 된다. 우리는 잘 죽는 것만큼 크나큰 복은 없다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진지하게 죽음에 논하는 것을 외경시하는 사회 문화 속에서 살아 왔다. 그러다보니 쉽게 죽음을 이야기 할 수도 없지만, 죽음을
생각하기엔 나와는 먼 현실과 동떨어진 남의 일로 이야기 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언젠가 찾아올 우리의 미래임에는 누구라도
알고 있다. 거부할 수도 없고, 마음대로 결정할 수도 없는 신의 영역에 속해 있음에 언제나 두려운 영역이다. 하지만 쉽게 접하는 죽음임에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게 된다.
이제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함을 공부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은 나이든 사람만의 몫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영원히 청춘이 될 거
같은, 꿈을 꾸며 마냥 의욕에 찬 발걸음으로 현실이 원하는 하나의 욕망을 ㅤ쫓기에 바쁘다. 녹녹치 않은 현실 또한 무시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만큼 더욱 불의의 사고에 노출되어 있음을 인지해야 함에도, `나는 아닐거야` 하는 막연한 믿음으로 외면하게 된다. `죽게 되면 죽지 뭐!`하는
호기어린 말을 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직접 자신이 내일 아니 한 달 뒤 떠난다면 어떨까? 적어보라하면, 첫째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두 번째가 나를 떠올린다.( 살아오면서 아쉬운 것들) 세 번째가 죽음의 두려움을 이야기 한다. 그만큼 두려움을 쉽게 내 놓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를 우린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다. "늙으면 죽어야지"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어르신 분들의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우린
그저 웃어넘긴다. 어르신들은 서운할 것이다.
아프고 고통스런 노년의 삶을 토로하는 것을 알지만 당연하다는 생각에 웃어넘기는 젊은 사람들 속에 필자도 포함되어 있다. 솔직한
심정은 그저 앓는 소리가 듣기 싫어 외면하는 것이다. 어찌 해 줄 수 없는 아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죽는다는 소리가 진심으로 들리지
않는다. 내 가족의 죽음은 멀리 있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 죽음의 위기를 수 없이 넘기며 산다.
아마 오늘도 `아뿔싸!!`라고 외치며 운전 중에도 길을 걷다가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죽음의 순간이다. 운이 좋았어! 죽을 뻔 했어! 라는 말로
경험을 슬쩍슬쩍 내비추어 가며 살고 있다. 외면하기엔 너무 가까이 우리의 바로 곁에 있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수메르 길가메시 프로젝트로
"대부분 신앙은 죽음을 삶의 의미를 주는 원천으로 바꿔 놓았다" 또한 죽음이 없는 종교를 상상해 보라고 제안 한다.
고대 신화 수메르 길가메시의 신화가 다루는 주제를 통해, "신들은 죽음을 숙명적으로 정해졌고, 인간은 그 숙명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당장 죽는다는 것 또한 무섭기에 외면한다. 주어진 내
생이 언제까지일까? 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호스피스 전문가인 오츠 슈이치는죽음 앞둔 사람들이 후회하는 다섯 가지 중 첫 번째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을 들었다. 자신에게 충실한 삶보다 세상의 기대치에 맞추어 살았다는 거와 두 번째로는 너무 일만 했다는 후회를 꼽았다.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건강"이라고 너무 뻔한 말이지만 몸소 느끼며 살고 있다. 하지만 짜맞추어가듯 세상에, 시간에, 나를 맞춘다.
중년이 되는 즈음 `나가 없다`는 허무감에 역할의 상실과 신체의 상실 속에 힘겨워 한다. 진정한 나의 과업은 무엇일까를 되물으며 찾아가는
삶이어야 한다. 시간은 유한하지 않다.
스티븐 코어는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즉 마케팅 업무는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지만, 아버지
역할은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코비의 말처럼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효과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중요한 것을
중요하다는 것을 잊고 지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스스로 가장 사랑한 사람들, 그들에게 얻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떠나가는 경우가 아마도
죽기 전에 제일 후회가 될 것이다. 언제 때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마냥 살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외면 할 수는 없는 일
당당히 죽기 위해, 당당히 살자고 말하고 싶다. 죽기 직전까지 배워 가는 삶이지만 떠밀리는 삶보다 내가 채워가는 삶으로 많이 사랑하고 많이
베풀며 당당히 죽음을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사입력: 2017/10/19 [16:52] 최종편집: ⓒ 광역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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