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45/오수개 이야기]천연기념물로 지정된다면?
지난 월요일(9월 26일) 오후, 내년 2월 정년퇴직하는 교수 친구의 연구실에 들렀다. 서가에서 발견한 책이 고려시대 최자崔滋가 펴낸 시화집 『보한집補閑集』. 원문에 이어 번역문이 실려 무척 반가웠다. 오늘날 ‘오수개’ 설화가 최초로 기록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 보한집을 그제사 처음 본 것이다. 교수친구가 당분간 꼭 필요한 책이라 해 그 부분만 사진을 찍었다. 알고보니, 보한집은 당시 정권의 실세인 최이가 문신 이인로(1152-1220)가 생전에 지은 『파한집破閑集』이 너무 소략하다며 최자에게 보완을 요구하여 1254년경 펴낸 것이다. '시화집의 효시'라 하는 파한집은 한가로움을 깨뜨린다는 뜻이고, 보한집은 그 파한집을 보완했다는 뜻이다. 보한집 이야기는 여러 번 들어 알고 있었으나, 한번도 그 원문과 번역문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고 몰랐던 내용이 제법 돼 무척 흥미로웠다. 하여 졸필이지만 써본 원문과 번역문은 사진과 같다.
오수獒樹라는 지명의 유래(큰 개獒, 나무 수樹, 술 취한 주인이 잠든 사이 늘 붙어다니던 반려동물인 개가 자기 몸에 물을 적셔 주인을 살리고 죽었다는, 술이 깬 주인이 무덤을 만들고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았는데, 그 지팡이가 느티나무로 크게 자랐다는)는 알고 있었지만, 몰랐던 내용을 얘기하자.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견분곡犬墳曲>이라는 악보가 있었다는 것과 당시 어느 시인이 “주인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자신의 몸을 던지지 않는다면 이 개와 함께 충과 의를 얘기할 수 있겠냐”며 은혜를 입고도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의 인정을 꼬집었다는 것, 그리고 진양공(누구인지 어찌 알 수 있으랴)이라는 사람이 이 사실을 전기傳記로 적어 세상에 널리 알렸다는 것, 이 세 가지였다. 그중에 한 부분, 이름모를 시인의 시 구절을 적어놓고 싶다. “人恥呼爲畜 公然負大恩 主危身不死 安是犬同論” 은혜를 입고도 망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인을 위하여 죽음을 불사不辭한 개하고도 얘기할 자격이 없다는 신랄한 지적인 듯하다. 어디 개만도 못한 사람이 되었어야 쓰겠는가. 전해지지 않는 견분곡의 내용은 어떠했을까? 그 가사가 전해졌다면 참 좋았으련만,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다. 미담이라면 한 편의 준수한 미담 한 편을 760여년 전에 이렇게 기록해놓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게 되고 , 이런 교훈을 어떻게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기록은 소중하다는 것. 바보대통령은 평소 “기록은 역사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인로가 파한집을 펴낸 이유도 “빈부와 귀천으로 높낮이를 정할 수 없는 것이 '좋은 문장文章'인데, 문인명현들의 좋은 문장을 (자신이) 기록해놓지 않으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 것을 염려해 본받을 만한 것들을 가려 엮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재밌는 사실 하나를 알았다. 의견의 고장 오수에는 ‘원동산園東山’이라는 유서깊은 소공원이 있다. 그곳에 ‘의견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가 아무래도 통일신라말이나 고려초에 세워진 것같다는 것이다. 또한 신기한 것은 비 전면이 하늘로 오르는 개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세상 천지에 이런 특이한 비가 어디 있을까? 거의 다 마멸되어가는 비 뒷면을 탁본해보니 이 비를 세우기 위해 시주한 보살 80여명의 이름이 보이는데, '장금이만' 등 모두 넉 자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백제의 유민들의 이름에서 보이는 넉 자 이름(흑치상지 등. 일본인들의 이름이 대부분 넉 자인 것은 백제의 유민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그렇다면 건립시기가 1천년도 넘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이 비문을 최근 최첨단 장비로 탁본을 떴는데, 간지干支가 쓰여져 밝혀진다면, 언론에서 대서특필할 세계적인 토픽거리가 아닐까? 또한 시주자 이름의 서체가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에 유행한 ‘육조체六朝體’라니, 어쨌든 1천년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비는 1930년대 전라선 철도 개설공사하며 오수천에서 발견, 지금의 원동산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여담 하나. 스위스 루체른의 <빈사의 사자상>을 본 적이 있는데, 나로서는 어떤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1792년 프랑스혁명 당시 용병으로 참가한 스위스인 786명을 기리는 이 사자상은 자연 절벽의 한 가운데를 파 절묘하게 조각한 것일 뿐이다. 사자상만을 보려 루체른(리기산을 오르는 스위스 알프스의 시발지)에 온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 이 사자상을 보려고 허우적거리며 달려왔단 말인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만약에 오수의 이 의견비가 “1천년도 더 전에” 주인을 위해 죽은 개를 추모하여 인근 백성들의 정성으로 세워진 것이라면(건립연도가 아주 중요하다) ‘빈약한 사자상’보다 몇 배 더 각광을 받지 않을까? 애완동물도 아닌 반려동물의 시대가 된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이 의견비를 보러 올 관광객이 줄을 설 것이라는 상상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정책적인 ‘과제’는 많다. 국내 최초의 의견비가 엄연히 존재하는 오수를 ‘반려동물의 성지’로 만드는작업(탁본 명문 확인 등 컨텐츠 확보, 펫 장례식장과 추모공원(이미 조성), 한국의 의견 분포도와 현황, 각종 스토리텔링, 반려동물 호텔 등)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군과 도 차원을 넘어 정부차원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그 가운데, 아무도 눈여겨 보거나 거들떠 보지 않았던 ‘오수개 복원’에 ‘미친’ 젊은이가 있었다. 미쳐야 미친다. 불광불급不狂不及. 우리는 월드컵 4강에도 올랐다. ‘꿈은 이루어진다Dream comes true’고 했던가. 30여년 전에 그 꿈을 맨처음 꾸고 한 발 한 발 전진한 끝에 그 꿈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 의견테마랜드를 조성, 펫 장례식장과 추모공원이 조성돼 있으며, 37년째 의견제전도 제법 성대하게 거행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핵심은 ‘오수개의 복원’. 그 주인공으로부터 복원과정의 뒷얘기를 듣는 건 가히 드라마틱했다. 의견으로 상징되지만, 멸실과 멸종된 오수개를 생물학적으로 복원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내로라하는 수의학자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참여 아래, 수없는 시행 착오 끝에 마침내 “이것이 오수개다” 발표를 하고, 표본의 수를 늘려 일반가정집에 분양, 사육하는 등 연구관리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는 게 ‘오수개연구소’이다. 이 오수개가 진돗개나 풍산개처럼 천연기념물로 지정(국비 지원)만 되다면, 반려동물 성지의 꿈은 박차를 가해 어느날 빠른 시일 안에 우리 눈 앞에 현실로 성큼 다가올 것이다. 오수개연구소의 연구 성과가 앞으로 어디까지 확장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최근 인근 오수고등학교에 반려동물산업과가, 익산의 원광대학교에 반려동물산업학과가 개설된 것도 그 꿈이 익어가는 증표가 아닐까. 지금은 없어졌지만, “안되는 게 어디 있어?”하면 “다 되지!”라던 <개그콘서트>의 유행어가 문득 떠오르는 것도 같은 맥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