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07
11월12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3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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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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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청원기도를 드릴 때는 기도의 질, 기도의 방향이 아주 중요합니다!>
여기저기 낙엽도 우수수 떨어지고, 계절에 걸맞게 연중시기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시기에 걸맞게 요즘 복음 말씀은 계속해서 종말에 벌어질 상황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 그 거룩한 은총의 날, 다시 말해서 마지막 날, 잘 준비되지 못한 사람은 끔찍하고 참혹한 상황에 직면하겠지만, 미리미리 잘 준비한 사람들에게 그날은 더없는 축복이요 영광의 날이 될 것을 강조하십니다.
학창시절을 돌아보니 예수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다가오면, 저 같은 사람들은 시험 준비가 잘 되지 않았던 관계로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시험 시간이 다가올수록 세상 괴롭고 마음이 산란했습니다.
그런 반면 평소 수업 시간에도 충실할뿐더러, 예습 복습에 충실했던 친구들은 시험이 기쁨이요 설렘이었습니다. 시험 시간이 다가오면 이번엔 평균 10점은 올려야지, 이번에도 준비를 잘했으니, 내가 당연히 1등이겠지, 하는 마음에 저와는 달리 시험 시간을 목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마지막 날과 관련된 말씀을 하실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강도 높은 경고 말씀을 던지시는데, 그 이유가 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명 각자 각자를 향한 극진하고 개별적인 사랑을 지니신 분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구원의 명단에서 제외되는 일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 당신 눈에 밟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냉랭한 사람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과 관련해서 그토록 강경한 발언을 하시는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절망과 낙담 속에 울고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평생 그리워했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먼저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데,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밤낮없이 졸라대는 집요한 과부의 예를 드시면서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수하고 간절한 기도가 지니고있는 힘을 잘 알고 계셨기에, 더 간절히, 더 정성껏 기도하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열렬히 기도하라고 당부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무엇을 간절히 청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봅니다. 청원기도를 드릴 때는 기도의 질, 기도의 방향이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작고 이기적이며 옹졸한 청원기도가 아니라 크고 이타적이며 관대한 청원기도가 필요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간절히 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도래하기를 진심으로 청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 없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기꺼이 수용하고, 고통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게 해달라고 열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높은 자리, 물 좋은 자리,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남들이 가기 가장 꺼려하는 낮은 자리를 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해야겠습니다.
그가 크게 바뀌고 회개하기를 기도하기에 앞서 나부터 먼저 바뀌고 회개할 수 있는 힘을 청해야겠습니다. 죽어도 용서 못하는 마음을 버리고 보다 큰마음으로 용서하고 더 적극적으로 화해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청해야겠습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영적이며 더욱 인간미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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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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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믿음의 열매인 의지와 인내>
며칠 전에 연세가 좀 있으신 한 자매님이 오셔서 친구의 병자성사 신청을 하셨습니다. 저는 성체를 모시고 수녀님과 몇몇 분들과 함께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환자는 상태가 좋지 않아 중환자실에 있었습니다.
저희는 중환자실에서 병자성사를 여러 번 해보았기 때문에 중환자실은 하루에 30분씩 오전 오후만 문을 열어 인원수 제한을 두며 들여보내고 다른 시간에는 닫아놓고 가족도 면회가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면회시간도 끝난 지가 30분 이상이 된 후였습니다. 저와 수녀님은 오늘은 안 되겠으니 내일 면회시간 맞춰서 오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님은 걱정하지 말라는 눈짓을 하고는 막무가내로 중환자실 문을 열었습니다. 문은 두 겹으로 되어 있었는데 다행히 밖의 것은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문이 잠겨 있자 그분은 문을 흔들어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안에 있던 간호사들이 놀라서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신부님을 모시고 왔으니 잠깐이면 되니까 기도 좀 해 달라고 청했고 그래서 그분들은 마지못해 허락해 주었습니다.
10분이 지나서도 병자성사 예식이 끝날 생각을 하지 않자 간호사들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빨리 좀 나가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님은 이번엔 들은 척도 안 하셨습니다.
저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병자성사를 마치고 바로 나와 버렸지만, 그 자매님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 5분 정도 더 환자와 함께 있다가 간호사들에게 환자에게 시간마다 물을 좀 더 주라고 부탁까지 하고 나오셨습니다.
저는 그 자매님의 거침없는 자세 앞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당신 친구가 돌아가시기 전에 신부님의 기도를 받게 하려고 당신 창피한 것도 무릅쓰고 노력했는데, 저는 사회의 규칙만 생각하여 안 좋은 소리 안 들으려고 물러나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지만, 그 자매님과 같은 막무가내식의 끈기는 반드시 당신이 노력하면 다 받아주게 되어 있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것일 것입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조금 찾다가 못 찾으면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여기 근처에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끝까지 찾을 수 있는 끈기가 생깁니다.
믿음과 확신은 이렇게 의지의 인내, 끈기를 선물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큰일을 한 사람들은 바로 이런 믿음과 소명의식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대단한 일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라고 하시며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던 재판관을 끈기와 인내로 움직이게 만든 여인의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괴롭히면 못된 재판관이라도 귀찮아서 자신의 청을 들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므로 그런 끈기와 인내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낙심하지 말라는 뜻은, 우리가 하는 일에 믿음을 가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자살률이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높습니다. 이 말은 가장 빨리 절망하고 포기하는 나라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도 기도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하기 시작해서 얼마나 빨리 포기하고 맙니까?
결혼을 일 년에 세 쌍이 하면 이혼을 한 쌍이 한다고 합니다.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요? 바로 이 ‘믿음’이 부족하기에 끝까지 버티어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믿음이 있어야 할까요?
제가 대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읽기 시작한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읽기 시작한 것인데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란 10권짜리 책입니다. 글씨도 작고 분량도 많아서 신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선뜻 시작하지 못합니다.
제가 이 책을 한 번 읽는 데 5년 걸렸고 그때 사제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거의 매일 22년째 읽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읽으라고 주신 책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는 해에는 우연히 술자리에서 아는 형이 기도문을 하나 주었습니다. 자기는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신학교에 들어가는 저에게 준 것인데, ‘비르짓다의 7기도’입니다.
12년 동안 매일 예수님의 핏방울을 하루에 일곱 방울씩 묵상하며 바치면 순교자의 지위에 오르고 연옥도 가지 않는다고 예수님께서 성녀에게 일러주신 기도입니다.
굳이 순교자의 지위에 오르려 노력하지 않아도 이 기도만 바치면 된다는 생각에 이것도 역시 지금까지 16년째 매일 바치고 있습니다.
12년이 지났지만, 죽을 때까지 매일 바치고 싶은 기도가 되어버렸고 이것 역시 주님께서 주신 기도문이라는 확신과 믿음이 있어서 꾸준히 바쳐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꾸준히 하다가 보니 느끼는 것은 ‘이 기도문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그런 지위에 오르고 싶다는 의지와 끈기 때문에 결국 그런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의지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 계기가 된 것들입니다.
어느 추운 날, 달팽이가 사과나무를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느린 속도로 조금씩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을 때 나무껍질 틈새에서 벌레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달팽이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는구나. 저 위에는 사과가 하나도 없단 말이야.” 그러자 달팽이가 계속 기어오르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저 꼭대기에 도달할 때쯤이면 사과가 열릴 거야.”
이런 믿음이 없다면 달팽이는 중도에 멈추어 말라죽게 됩니다. 믿음이 나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의지를 주는 것입니다.
사랑도 의지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란 서로 간에 이 의지와 끈기가 절대적인데 이 의지는 바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는 믿음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믿음 때문에 끝까지 갈 수 있도록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인지 먼저 묻고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확신했다면 그 의지를 꺾을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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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어려서부터 같은 본당에서 지내온 동창 신부님은 신중하고, 좀처럼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않는 편입니다. 31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여러 부서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왔지만 고사하였습니다. 그런 동창 신부님이 이번에는 고사하지 못하고 교구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신중한 성격이기에 많이 고심했을 것입니다. 저는 가톨릭평화신문의 기사와 평화방송의 인터뷰를 보고 동창 신부님이 맡아야 하는 일을 알았습니다. 공식직책은 ‘꾸라토르(Curator)'입니다. 교구 내 사제들의 영적 돌봄이나 고충 상담 등을 하는 직책입니다. ‘사제를 위한 사제’라고도 합니다. 아직은 시작단계이지만 교구장님의 사목 지침이고,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직책이기에 교구 사제들을 위한 영적인 쉼터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휴양 중에 있는 사제, 해외에서 선교하는 사제, 갈등과 아픔이 있는 사제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꾸라토르라는 자리가 사제들이 지친 몸을 잠시 쉬고 힘을 낼 수 있는 곳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동창 신부님의 어깨가 무겁겠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기쁜 마음으로 지고 가리라 믿습니다.
저는 동창 신부님처럼 과묵하거나 신중한 성격은 아닙니다. 그래서 누군가 저를 필요로 한다면 가능하면 함께하는 편입니다. 2002년 봄입니다. 교구 사목국에서 국장신부님이 제가 있는 본당으로 찾아왔습니다. 교육담당 신부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생들의 30일 피정지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영성지도 신부로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신학교에서 영성지도 신부로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본당신부로 바쁘게 지내면서 기도할 시간이 적었는데 신학교로 가면 신학생들과 함께 지내니 기도할 시간이 많을 것 같았습니다. 신학교에는 방학이 있으니 방학 때는 여유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교육담당 신부는 생소했습니다. 강의를 해 본 적도 별로 없었습니다. 농촌에서 지내다가 복잡한 명동에서 지내는 것도 부담스러웠습니다. 교구청에서 지내야 하니 주교님들과 국장 신부님들을 자주 만나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사목국에서 저를 더 원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위에서 교통정리가 된 것 같았습니다. 저는 2002년 가을 교구 인사이동으로 사목국 교육담당 신부가 되었습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비가 제갈 공명의 집으로 3번을 찾아갔다는 말입니다. 신중했던 제갈 공명은 유비의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유비는 제갈 공명이라는 든든한 책사를 만나서 삼국지의 한 축을 단단하게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삼국지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만일 유비가 자존심을 생각하고, 체면을 생각해서 제갈 공명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역사에서 유비를 몰랐을 것입니다. 삼국지의 웅장하고, 멋진 이야기를 만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삼국지는 어쩌면 유비의 간절함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삼고초려가 아니라 삼십고초려라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판관에게 청하는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재판관을 자주 찾아가니 재판관은 가난한 과부의 청을 들어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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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산보 가는 길에 새의 둥지를 보았습니다. 소나무 가지 사이에 둥지가 있었습니다. 어미 새가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몇날 며칠 둥지를 떠나지 않았고,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지켜보지만 어미 새의 정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벌써 10일 이상 지났으니 곧 둥지에서 새끼 새를 볼 것 같습니다. 한 마리의 새끼 새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어미 새의 눈물겨운 품기가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돌아보면 쉽게 포기한 것이 참 많았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포기하기도 했고, 게으름 때문에 포기하기도 했고, 열등감 때문에 포기한 적도 있고, 이기심 때문에 포기한 적도 있고, 주변의 환경을 탓하며 포기한 적도 있습니다.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 쇼’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몇 번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방송을 했는데 1987년부터 진행했으니 33년이 되었습니다. 방송할 때는 20대 였는데 지금은 50대 후반이 되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눈이오나 비가 오나 시청자들을 위해서 방송했다고 합니다.
33년이란 긴 시간 빠지지 않고 자리를 지켰던 강석, 김혜영 진행자에게 수고하셨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충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잠시의 방심과 나태함 때문에 또다시 어려움이 시작되곤 합니다. 한국은 코로나19에 대해서 대처를 잘 하였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개학을 앞둔 시기에 이태원에서의 감염이 있었습니다. 확진자가 늘어나면서 개학이 연기되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밀집된 공간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이러스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사람들 사이를 신나게 돌아다녔고, 확진자는 다시 늘어났습니다. 정부와 지방 자치단체의 적극적인 대처로 일단락되었지만 경각심을 주기에는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죽비’가 되어 제게도 신발 끈을 다시 조이게 합니다. 신앙인은 천사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카엘 천사처럼 나의 신앙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 담대히 신앙을 증거해야 합니다. 신앙이 약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처럼 나의 뜻이나 나의 욕심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파엘 천사처럼 신앙의 여정에 좋은 안내자가 되어야 하고, 상처 입은 이웃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 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나의 마음에 무엇을 쌓아 놓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합니다.
“저희를 성자의 살과 피로 기르시고 주님의 성령으로 다스리시어 저희가 말보다 진실한 행동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마침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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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8,1-8: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예수님께서는 복된 삶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절). 그러면서 불의한 재판관에게 계속 졸라 대어 결국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든 과부의 예를 드셨다. 과부가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이나 동정심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지치지 않고 졸라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항구하게 기도하면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와 인간을 업신여기는 사악함을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이겼다. 불의한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여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정의가 우리의 본성에 맞는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게 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간구하는 사람들의 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실지 깨닫기를 바라신다. 정의가 우리를 변호하고 은총이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게 하면 억눌린 자들은 정당한 보상으로 정의의 열매를 받고, 환난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은총의 열매가 생기를 줄 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끈질기게 졸라대니 사악하고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결국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른 척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고 더 좋은 때에 들어주실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부서진 마음과 꺾인 영을 안고 기도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더 좋은 방법으로 들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 하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갈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에 옳고 흠 없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분의 영광을 거스르는 자들의 사악함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고 그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고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한다.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에게 이루어주시도록 맡겨드리는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여야 한다. 참된 기도는 나 중심의 기도가 아니다. 항상 하느님 중심으로 찬미와 감사가 선행되는 기도를 바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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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복음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시는 목적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비유 속 등장인물은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구약 성경의 전통에서 ‘과부’는 의지할 데 없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합니다. 반면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로 묘사됩니다. 과부는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한동안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다 과부가 귀찮을 정도로 끈질기게 청하자, 그가 끝까지 찾아와서 괴롭힐 것을 예상하고는 마침내 그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줍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을 정의로우신 하느님에 빗대어 이야기하십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올바른 판결을 해 주는데, 하물며 정의로우신 하느님이야 얼마나 더 올바른 심판을 내리시겠는가?’라는 논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청하는 과부처럼 제자들도 하느님께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도록 밤낮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불의의 사고나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쳤을 때,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러십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라고 울부짖으며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께서는 ‘자판기’가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이 정해 놓은 ‘원인과 결과’의 논리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듯이, 신앙인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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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신문갑 비오 신부님]
<신앙생활의 기준은 믿음의 중심이다>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과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의 모습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신앙생활과 가난한 과부의 신앙생활을 구분 짖는 유일한 기준은 바로 믿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로 구분됩니다.
율법학자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 믿음의 중심은 철저히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합니다.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의 말씀도, 하느님의 뜻도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해 이용됩니다.
이들에게 하느님과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인사 받고, 회당이나 잔치에서 윗자리,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을 챙기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결국 이들에게 신앙생활은 자기 자신을 위한 하느님과의 거래가 되어 버립니다.
복음에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이들에게 있어서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 역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투자의 의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한 단죄를 받을 것이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의 신앙생활 속에는 그 믿음의 중심이 철저히 하느님께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 사실은 과부가 보여주는 봉헌 하나만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과부가 보여준 봉헌은 율사들이 보여준 모습과는 정반대로 그 모든 것보다 우선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진 봉헌이었습니다. 과부의 봉헌 속에는 어떠한 계산도,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능력껏 아낌없이 바치는 모습, 주님을 찬양하며 내 가장 소중한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 아름다운 봉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러한 과부의 봉헌을 극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우리들의 신앙 생활속에는 율법학자의 모습도, 가난한 과부의 모습도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주님께 받은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주님을 찬양하며 아무런 조건없이 오로지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내 신앙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도 있지만
또 때로는 내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주님과 거래를 하며 내 뜻에 주님을 맞추려는 마음으로 철저히 나 자신을 신앙의 중심으로 두고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번 한번만 해주시면 제가 이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기도해 드릴테니 이번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며 하느님과 흥정을 벌이고 “내가 이렇게 하느님께 정성을 들였는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러 실수가 있느냐“ 원망하며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실 자체에 회의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과연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할 믿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를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가난한 과부처럼 하느님께 인정받는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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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의 모습은 구약에서 엘리야가 만난 과부를 떠올리게 합니다. 엘리야가 사렙타에 사는 과부를 찾아가 물 한 그릇과 빵 한 조각을 청합니다. 이때 과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1열왕 17,12)
오늘 복음의 과부가 봉헌한 돈은 렙톤 두 닢입니다. 요즈음 돈의 가치로 환산하자면 그녀의 전 재산은 약 천 원에 불과합니다. 한 끼를 겨우 때우기에도 부족한 이 돈을 그녀는 왜 하느님께 봉헌하려고 하였을까요?
어쩌면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갈 여력이 없는 것에 한탄하며 가지고 있던 돈을 하느님께 바치고 난 뒤에 사렙타의 과부처럼 죽으려고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그녀가 놓인 상황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과부의 헌금을 두고 하시는 말씀을 전 재산을 바친 것에 대한 칭찬으로만 알아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풍족하게 가진 것이 많음에도 목숨이 위태한 과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백성들의 완고한 마음을 두고 탄식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헌금을 내는지에 대해서는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지난 목요일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라는 율법 학자의 말을 두둔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에서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새겨들어야 할까요? 단순히 교회에 많은 헌금을 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새겨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사람들, 하루하루 삶의 무게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무심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기를 오늘 복음이 가르쳐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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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루카 18,1-8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악이 선을
이기는 듯해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선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나날이 더욱더 선해야합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듯해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진실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나날이 더욱더 진실해야합니다
오만이 겸손을
이기는 듯해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겸손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나날이 더욱더 겸손해야합니다
배척이 포용을
이기는 듯해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포용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나날이 더욱더 포용해야합니다
억압이 섬김을
이기는 듯해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섬기기 위하여 기도하며
나날이 더욱더 섬겨야합니다
독선이 존중을
이기는 듯해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존중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나날이 더욱더 존중해야합니다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듯해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정의롭기 위하여 기도하며
나날이 더욱더 정의로워야합니다
죽임이 살림을
이기는 듯해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살리기 위하여 기도하며
나날이 더욱더 살려야합니다
우상이 하느님을
이기는 듯해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하느님께 오롯이 기도하며
나날이 더욱더 하느님과 함께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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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어머니 심부름으로 시장에 자주 갔었습니다. 반찬 재료와 식료품, 종종 석유 심부름할 때도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사야 할 물건 목록과 돈을 제 손에 꼭 쥐여주고는 잘 다녀올 것을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난처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시장 가다가 동네를 찾은 약장수를 보게 된 것입니다. 약장수가 오면 차력 쇼를 비롯한 재미있는 여러 가지 쇼를 보여 주거든요. 저는 심부름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그 쇼를 계속 즐겁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얘들은 가라.”를 외치며 쫓아내는 약장수에게 밀려나 다시 시장으로 가려고 하는데, 글쎄 손에 있어야 할 돈이 없어진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혼날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습니다. 집에서 시장까지를 땅바닥만 보면서 왔다 갔다 반복했습니다. 돈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입니다.
도저히 집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 앞에서 울고 있는데, 노숙자(당시에는 거지라고 했습니다)로 보이는 사람이 저를 보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너, 나랑 같이 살래?”
집에 들어갈 용기가 없어서 이 사람을 쫓아갈까도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때 어머니께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손에 끌려 집에 들어갔습니다.
울면서 돈을 잃어버렸다고 말하자 당연히 혼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무섭다고 노숙자 손을 잡고 가출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두려움을 피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해결은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비로소 가능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의 이런 모습을 원하십니다. 고통과 시련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그냥 피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지금 해야 할 것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올바른 판단을 내리시어 구원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다만 그때까지 좌절하지 말고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을 성가시게 졸라대서 결국 과부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데, 하물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을 외면하겠냐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늘 의문을 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불평불만도 많이 표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피하려고만 했지, 정면으로 고통과 시련을 마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매달리지 못하고 늘 피하는 데 급급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매달릴 수 있는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커다란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니, 어렵고 힘든 시간을 현명하게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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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나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신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가 필요한 때 입니다. 그러므로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 하느님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 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기도가 필요한 것은 오직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우리가 정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프란치스코 교황은 묻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건전지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진정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와 같이 기도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오늘 복음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올바른 판결을 내려준다는 이야기 입니다(루카18-4-5). 끈질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마음을 다해 청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2). 그렇다면 떼를 써야 하지만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순응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에 맞게 내린 결단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절실함에서 우러나오는 끈기로 기도하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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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가 낙심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지체 없으신가?>
오늘 복음의 두 열쇠 말은 “낙심하지 말고”와 “지체 없이”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들어주신다는 가르침인데 문제는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있느냐 그것이라고 주님은 결론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그런데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과 지체 없이 들어주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말이 안 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지체 없이 들어주신다면
낙심할 사람이 없을 것이고 끊임없이 기도할 필요도 없겠지요.
하느님의 응답이 지체되니 낙심하고 기도를 중단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유의 과부처럼 들어주실 때까지 끈질기게 청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요.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안 들어주실 때가 많고, 들어주시더라도 지체하시는 경우는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청하는 것은 모두, 그리고 청하는 즉시 들어주신다는 믿음은 갖지 말아야 합니다. 끈질기게 청하면 지체 없이 들어주신다고 주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시지 않고,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시지 않는다고. 인간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고.
그러므로 우리가 뱀이나 전갈을 달라면 안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뱀이나 전갈 같은 것을 좋아하고 그것들을 달라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이 아니라 이 세상의 선을 좋아하는 겁니다.
어제는 제가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돌아가신 분의 3주기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따져보니 그분이 아프기 시작할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10년 이상을 그러니까 오늘 주님 말씀처럼 끈질기게 기도했는데 그러나 돌아가셨습니다.
10년을 넘게 살게 해주셨으니 제 기도를 들어주신 거라고 할 수도 있고, 기도했는데도 돌아가셨으니 안 들어주신 거라고도 할 수 있지요.
아무튼, 그 미사를 드리러 가는 길에 90이 넘으신 자매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들들을 잃고 지금 하나 남은 아들마저 앞세우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미 기도하고 있는데도 기도해주기를 또 간절히 청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분의 아들은 25년 전에 신장 이식을 받으신 분인데 다시 나빠졌으니 좋아지기가 어렵고,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폐렴까지 앓게 된 상황인데도 이 자매님은 오늘 주님께서 비유로 드신 과부처럼 낙심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래서 저도 물론 기도할 것입니다만 믿음이 약한 저는
그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솔직히 드는 것입니다.
저의 마음은 그 아들이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좋아하는 것이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께서 보실 때도 정말 좋은 것인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기도대로 지체 없이 들어주실 거라고 믿고 기도할 수 없고 다만 하느님께서 제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리라 믿고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지체 없이 들어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청하는 즉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되는 그때 즉시 들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꼭 들어주시리라 믿는 것도 큰 믿음이지만 안 들어주시거나 늦게 들어주시더라도 그것이 하느님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 더 큰 믿음임을 묵상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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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 진리의 연인, 진리의 증인, 진리의 협력자 -
요즘 계속되는 성인 축일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듯 성인도 다 다릅니다. 진리의 사람, 진리의 성인입니다. 기념, 기억할뿐 아니라 우리 모두 고유의 성인이, 진리의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런 성인이 되고 싶은 청정욕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오늘은 ‘일치의 사도’라 칭하는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성인은 만43세 순교하셨습니다. 그리스 동방 교회와 라틴 교회의 일치를 위한 수호자요 순교자였던 성인은 동방 정교회 신자로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으나 후에 가톨릭이 되었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제가 되었습니다.
후에 폴로즈 대주교가 되었고 교회 일치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다가 교회 일치를 반대하는 폭도들에 의해 1623년 무참히 순교의 죽음을 당했고, 첫 번째 동방교회 성인으로서 1867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성됩니다. 성인의 순교직전 분노한 반대파 군중들에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비텝스크의 시민 여러분은 나를 죽이려 합니다. 여러분은 거리에서도, 다리 위에서도, 도로에서도, 시장에서도, 도처에서 나를 해치려 음모를 꾸몄습니다. 나는 여기 여러분 가운데 목자로서 있으며 여러분도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성베드로와 그의 후계자인 교황의 수위권을 위하여 또한 거룩한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어 사제관에 난입한 폭도들을 꾸짖다 무참히 순교의 죽음을 당합니다.
“형제들이요! 당신들은 어찌해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였느냐? 나에게 불만이 있으면, 나를 상대할 것이 아닌가! 나는 숨거나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인간 무지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 깨닫습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빛입니다. 성 요사팟 역시 진리이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진리의 사람, 진리의 순교자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막연한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주 예수님이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 진리에의 순종은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 주님께 대한 순종으로 직결됩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의 셋째 서간이 아름답습니다. 역시 눈에 띠는 말마디는 진리입니다.
“나는 그대를 진리 안에서 사랑합니다.”
“나에게는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러한 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됩니다.”
‘진리의 협력자’ 참 아름다운 말마디입니다. 참 숭고한 삶이 진리의 협력자로, 진리의 연인으로, 진리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 또한 평생 진리 추구의 삶이었고, 진리에 대한 목마름, 진리에 대한 열정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진리의 협력자, 바로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사목 표어였습니다. 교황님의 인터뷰 대목입니다.
-“우리에겐 진리가 있고, 그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진리의 움직임을 따라가려고 노력합니다. ‘진리의 협력자’란 말마디는 요한의 셋째 서간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진리는 인격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에 협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진리를 존중하며, 거기에 의존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신학자로서 제게 주어진 전문적인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진리에 감동하여 더욱 진리에 가까이 다가간 신학자는 진리에 봉사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으며, 그 진리를 위해 협력할 채비가 되어 있습니다.”-
-“진리의 협력자” 이것을 교황님의 묘비명에 새기면 좋을 듯합니다.
“그렇군요. 그것이 제 삶의 지표라면, 묘비에 새길 수도 있다고 봅니다.”-
진리의 협력자, 비단 베네딕도 16세 교황님만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섬기는 노력을 다하는 이들 모두가 진리의 협력자입니다. 반면 성 아우구스티노는 ‘진리의 연인’으로 평생 진리를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참 행복도 진리의 연인으로, 진리의 협력자로, 진리의 증인으로 살 때 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물러나거나 포기하지 않고 집요히 간절히 항구히 불의한 재판관을 졸라댔던 과부야 말로 기도의 모범입니다. 계속 반복되는 중요한 말마디는, 꼭 필요한 말마디는 ‘올바른 판결’입니다. 올바른 판결을, 올바른 간청을 드려야 지체없이 응답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고무적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을 간직하는 방편은 언제나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참으로 올바른 판결을, 올바른 소원을 청하는 것이 본질적이요 결정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입니다. 한결같고 간절하며 항구한 믿음입니다. 제가 오늘의 가난한 과부라면 올바른 판결대신 다음 하나를 청하겠습니다.
“주님, 참으로 날로 믿음 깊어지는 진리의 협력자로, 진리의 연인으로, 진리의 증인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진리이신 당신을 날로 섬기며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는지요! 모든 성인들의 공통적 소원이요 욕구일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진리의 협력자로, 진리의 연인으로, 진리의 증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정말 오늘 화답송 시편의 행복한 의인처럼 살고 싶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그분 계명을 큰 낙으로 삼는 이!
부귀영화 그의 집에 넘치고,
그의 의로움이 길이 이어지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시편112장)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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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루카 18,5)
오늘 복음(루카18,1-8)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그리고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불의한 재판관이 미천한 과부의 청을 들어줍니다. 그 이유는 그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 줄곧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아주 귀찮게 졸라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불의한 재판관도 귀찮게 졸라대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한 이들의 간청을 물치시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태리로 단체 성지순례 갔을 때 로마에서 경험한 일인데, 길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우리를 보고 "빨리, 빨리!"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성지순례하면서 "빨리, 빨리!"를 외쳤으면 그들이 그렇게 말할까?
모든지 '빨리, 빨리!'입니다. 기도도 빨리, 먹는 것도 빨리, 은총을 받는 것도 빨리입니다. 마치 자판기에 일정액을 넣으면, 그에 상응하는 것이 즉시 나와야 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이나, 나의 기도가 빨리 들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쉽게 포기하기도 합니다. 쉽게 기도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은 기도하는 사람, 청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단지 기도할 뿐이고 청할 뿐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청을 들어주시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이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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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FjkEu5sVX7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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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 1)
가난한
우리들에겐
기도가 있습니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도
우리는
기도를 드립니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삶이 뜨거운 것은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가 보아야
알게되는 것이
우리들 삶입니다.
기쁨과
슬픔 사이에
끊임없이
기도하는
우리가 있습니다.
삶을
사랑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은
기도하는
기도의
선택입니다.
기도의 이야기는
희망의 간절한
이야기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를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로 사랑을
알게하시며
삶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로 태어나고
기도로 돌아가는
우리들 여정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기도는
공동체를 향하고
공동체는 기도가
중심이 됩니다.
매일매일이
기도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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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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