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플랑드르 출신 마스터의 이집트로의 피신(성 요셉) 농막 단상 글쓴이 : 반숙자 벨라뎃다 l 수필가
겨우내 아파트라는 닭장에서 사육 당하던 노인들이 농막에 왔다.
이곳은 우리 고장에서 눈이 가장 늦게 녹는 동네라서 기다리는 일이 지루했다.
아직은 경루 끝이라 썰렁해도 문이라는 문을 다 열어놓으니 천지가 다 품안이다.
앞쪽으로 멀리 늠름한 자태로 읍내를 굽어보는 가섭산의 기품이며 왼쪽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능선이 마치 여인네 가슴 같아서 바라보기만 해도 푸근하다.
바람은 어찌 이리 신선한고.
지도를 펴놓고 오대양 육대주를 더듬어 봐도 거기 도시보다 빈공간이 있어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초록별이라 하지 않던가.
햇빛결핍증으로 하얘진 얼굴들이 쌀쌀한 바람 탓인가 볼그레하다.
초점을 잃어가던 눈에 또렷한 영상이 맺히는지 두리번거리는 남편의 모습이 생기차다.
그도 그럴 것이 아파트라는 공간은 앞 베란다와 뒤 베란다가 전부인데 늘상 보이는
공간이 한정돼 있어서 외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꼴이다.
여기는 밖에도 한통인 하늘이고 산이고 들이고 밭이어서
지금 4월은 어여쁜 연두빛이 스멀거리며 다가선다.
마른나무 수피 같은 피부에도 연두색 물이 오르는 것 같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지, 커피를 두 잔 준비해서 뜰에 앉는다.
찻잔에 어리는 김도 풀빛이다. 커피 맛도 풀 맛이다.
사람은 직립보행 동물이라 머리는 햇빛을 받아야 살고 발은 흙을 밟아야 사느니
시멘트 숲속의 우리가 어찌 안락하기만 하겠는가. 더구나 시골태생인 우리네랴.
농막으로 들어가도 돌아가며 푸른 창이 있어 폐쇄느낌이 없다.
이 좋은 곳을 두고 20년 넘게 아파트에 살았으니.?
나의 타지마할
지난번 농막을 정리할 때 용역회사 손 사장은
트럭에 관리기를 싣고 와서 밭을 갈고 비닐을 씌웠다.
자기 부모연배 노인들 체력으로는 갈아먹기 힘든 자투리땅에
봄배추, 열무, 아욱씨를 뿌려주고, 파 모종도 두 판이나 사다가 심었다.
일주일 만에 올라왔다. 그 사이 흙빛 살을 가르고 푸른 기미를 들어올린다.
작은 씨앗들이 고개를 숙이고 올라오다가 저녁나절이 돼서야 고개를 든다.
저것을 일러 생명이라 하는 것,
땅은 씨를 품어 적절한 조건을 제공해서 새 생명을 움트게 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한 발짝 더 나가면 상생작용이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 요셉<남편 세례명>은 나에게 대지였다.
그에게 깃들어 나의 개성이 살아나고 영영 시들어버렸을 문학적 씨앗이 비로소 발아했다.
그 자신이라기보다 그를 품고 있는 이곳 과수원이다. 그는 나의 자양분이었다.
내가 과수원에 매료되어 꿈틀거리는 창작의 열정을 주체하지 못할 때
동네 복판에 번듯한 기와집을 두고 이 외딴 터 과수원에 집을 지었다.
인도의 무굴제국 황제인 샤 자한은 아내인 아루주만드 바누 베감을 기리기 위해
영묘 타지마할을 남겼는데 범부 요셉은
범부 나를 위해 리어카로 벽돌을 날라서 이 집을 지었다.
좀 더 넓게 지을 수 있었는데 인력이 너무 많이 들어서 아담하게 지은 것이다.
이 집에 나의 타지마할이 될 것이다.?
정글의 법칙
수요일까지 수업을 끝내면 목요일엔 어김없이 농장에 온다.
일주일에 3일은 농막, 4일은 아파트 생활이다.
벌써 배추랑 열무는 한 뼘이나마 자라서 솎아주기를 바라고 상추 잎도 너풀거린다.
당일치기하려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왔는데 산당화가 고와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운전경력 사십 년인 요셉은 의사의 권유로 차를 처분했다.
농장까지 택시로 이동하는데 지대가 높아서 택시기사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자니 짐을 갖고 다니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간식거리야 착실히 준비했지만 주신은 단 한 끼 분이다.
삼시 세끼 해결사가 근무태만에 직무유기도 보통이 아니다.
그래도 여지껏 쌓아온 배짱으로 밀고 가서 저녁까지는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두 노인네는 밤에도 밖에 나가 '좋다'를 연발하다 단잠에 들었다.
새벽빛이 부욤하기 무섭게 밭으로 나갔다.
낮에는 뜨거워서 일을 못하니 새벽이나 저녁때라야 풀을 뽑는다.
새벽 5시 삼라만상은 안개 속에 깨어나지 않고
밤나무 숲에서 자는 새들도 기침하지 않았는지 고요하다.
가만가만 텃밭에 앉는다. 도라지 밭에 풀을 매고 파밭도 풀을 맸다.
육체노동은 단순 반복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풀만 뽑는다. 흙 때문인지 생기가 난다.
속이 출출해서 더 이상 호미질이 어렵다.
주방 식탁에는 컵라면 한 개와 생수 두 병이 전부,
옛적에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 장정들을 먹이고
남은 것을 거두니 열두 광주리였다는데….
요셉을 깨웠다. 컵라면에 물을 넉넉하게 부어 뜰로 나왔다.
울타리처럼 처진 산당화가 이글이글 타오른다.
산당화가 밥이라도 된 듯 라면 한 젓갈 물고 '오! 곱다.'
또 한입 물고 '참 곱다.' 두 노인네가 곱다를 열창하다보니 빈대접이다.
오늘은 정글의 법칙으로 버티려고 하니 그리 알라고 했더니
요셉 왈 "잡아 묵을 게 있어야지?" 하고는 나를 빤히 바라본다.
순간 눈에 들어온 것, 벽난로 굴뚝에 새끼를 쳐놓고 먹이를 물어 나르는 어미 딱새,
총 아니라 총보다 더한 것이 있다 한들 어찌 저들을 겨냥하랴.
그때 뒷산에서 뻐국새가 울었다.
뻐국 ·뽀꾹·?뽀국 대접에 흥건히 고이는 뻐국새 소리
'아! 맛나다' 나는 대접에 입을 대고 꿀꺽 꿀꺽 마셨다.
- 출처: [청주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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