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문재인 정부의 북한 비핵화는 왜 실패했나
중앙일보
입력 2024.06.19 00:36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 경제학부
대통령의 지식과 판단력 부족이
지난 정부 북한 비핵화 실패 원인
제재할 때와 협상할 때를 모르고
지정학 읽지 못해 북·중 밀착 초래
과거를 제대로 평가해야 미래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최근 발간된 문재인 대통령의 회고록은 의미가 있다. 전직 대통령이 직접 북한 비핵화 관련 내용을 자세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대통령의 지식과 판단력 부족이 실패의 주된 이유임을 확인했다. 북한 비핵화를 둘러싼 복잡한 구조와 변화무쌍한 지정학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문제의 뿌리였다.
대통령은 김정은의 말만 믿은 채 구조를 보지 못했다. 김정은과 대화하고 북미회담을 주선하는 데 온 관심을 기울였을 뿐 비핵화 합의가 가능한 조건을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책의 여러 곳에서 나오듯 북한을 협상으로 이끈 가장 중요한 힘은 2016~17년에 발효된 경제제재였다. 그렇다면 이를 강화해 북핵의 매도호가를 떨어뜨려야 협상이 타결될 수 있었다. 성공 가능성은 있었다.
2017년 하반기의 제재 강도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2019년 정도에는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부분적 비핵화와 일부 제재 해제가 시작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김정은을 너무 빨리 협상에 불러냈다. 2018년 4월에 판문점회담이 열린 것이다. 또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제재라는 우군을 오히려 제약 조건으로 간주해 결과적으로 핵의 매도호가만 올려주었다. 하노이회담의 실패를 예견했다면 남한이 선제적으로 제재를 해제했을 것이라며 아쉬움마저 토로했다.
하노이회담의 노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대통령의 대답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 정부 내에서도 하노이회담에서 성과가 있을지 의심된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알고 있다. 필자는 정상회담 한 달여 전에 쓴 중앙시평에서 결과를 낙관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미국도 2019년 1월 북한 김영철의 방문 목적을 의아해했다. 2월에 열릴 정상회담 직전인 만큼 북한이 내놓을 비핵화 방안을 사전에 논의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아무 언급이 없었다. 뭔가 노림수가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 미국 관료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문가와 상의하지 않고는 김정은의 제안을 절대 받지 말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학자도 알고 있는 워싱턴 분위기를 한국 대통령이 몰랐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도대체 대통령은 무슨 이야기를 누구로부터만 듣고 있었나.
하노이회담 노딜이 미국의 변심 때문이라는 지적은 사실과 다르다. 대통령의 설명은 이렇다. 북한은 민생용 제재만이라도 풀어주면 영변 핵시설을 해체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미국이 갑자기 단계적 접근법을 버리고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 제안이 김정은의 노림수였음을 모른다. 북한이 주장하는 ‘민생 관련 제재’는 2016년 이후에 실행된 다섯 개의 경제제재다(민생이란 말 자체가 북한의 술수다). 그전의 대북 제재는 대량살상무기 생산을 막기 위한 제재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북한은 모든 제재 중 경제제재만 해제해 달라는 것이니 이는 단계적 접근법에 부합한다고 우겼다. 그러나 미국은 이것이 북한의 기만임을 알아차렸다. 얼렁뚱땅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비인도적인 민생 제재만 풀어달라는 식으로 가장해 실효성 있는 모든 제재를 해제하려는 은밀한 시도임을 간파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북한 요구를 왜 미국이 과다하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다’라며 오히려 미국을 겨냥했다. 그러면서 볼턴 같은 네오콘의 훼방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문제를 이유로 들었다. 이처럼 ‘중심’과 ‘변방’을 혼동한다.
지정학에 대한 이해 부족도 눈에 뜨인다. 정상회담 장소를 싱가포르로 선택한 미국의 고집 때문에 북·중 밀착이 일어났다고 대통령은 말한다. 싱가포르로 가기 위해 김정은은 중국 비행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시진핑과 정상회담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두 정상 간 회담은 이미 북미정상회담 전에 두 번이나 있었다. 시진핑은 판문점회담 한 달 전과 열흘 후 두 번에 걸쳐 중국에서 김정은을 만났다. 이때부터 북·중 관계가 복원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한국 정부가 한몫했다. 남북회담이 북·중 밀착이라는 지정학적 파급효과를 갖지 않게끔 노력해야 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판문점회담의 판을 너무 키웠다. 남한의 중재로 북한이 친미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 중국은 위기감을 느껴 김정은을 급히 초청했다. 그에게 중국의 지원을 확인시켜 주고 남한과 미국에 대응해 어떻게 협상할 것인지 조언했다. 그 결과 북한 비핵화는 훨씬 어려워졌다.
지식을 갖추고, 생각할 줄 알고, 균형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좋은 리더다. 회고록에선 이런 리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애는 썼지만 생각이 아니라 본능에 따라 움직였고, 목표만 보았을 뿐 문제의 복합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래서 『변방에서 중심으로』라는 제목은 와 닿지 않았다. 책에서 가장 동의하는 구절은 첫 쪽에 나오는 다음 문구다. “우리 국민은 언제든지 더 멀리 나아갈 저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대통령의 문제 아닌가.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