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나무라고 불리어지는 나무가 있습니다. 목재로 쓰기 위함이거나 관상용으로 심는데, 일본 남쪽 섬이 원산지입니다. 식물 중에서 비교적 단단하고 키도 10~25m에 이르지만 온대지역보다 추운 곳에서는 관목처럼 자랍니다. 잎은 굽은 창 모양이지만 끝이 단단하고 가시처럼 뾰족하며 앞면은 진한 초록색이고 광택이 나며, 씨는 크기가 2㎝이고 일본에서는 씨의 기름을 요리에 사용합니다. 비자나무의 생태계가 가장 좋은 곳은 일본 규슈의 산악지방으로 꼽히는데, 이곳은 태평양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강수량이 많고 일조량도 좋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 등지에서 자라고 있는데, 대표적인 곳으로는 제주 구좌읍 평대리의 비자나무 숲이 유명하며 그 중에는 8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거목도 있습니다. 전남 해남의 고산 윤선도 선생의 유적지인 ‘녹우당’ 뒤편 소나무 숲길을 걷다보면 원시림같은 비자나무숲길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절 전남 장성의 ‘백양사’ 뒤편 약수동 계곡으로 오르는 도중에도 비자나무 숲길을 만나게 되며 전남 고흥군 포두면의 ‘금탑사’를 오르는 길목에서도 비자나무 숲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둑판 중에서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을 최상품으로 꼽습니다. 비자나무의 특성으로는 우선 나이테가 균일하고 촘촘하며, 색상은 담황색으로 눈에 피로를 주지 않아 보기에 편안합니다. 나무 특유의 향기도 빼 놓을 수 없는데, 곤충과 벌레를 쫓는다는 은은한 향기는 정신을 맑게 해 줍니다.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은 바둑알을 놓을 때 맑은 소리가 나며, 탄력성과 복원력이 탁월해서 바둑판에 돌을 놓으면 약간 들어가는 느낌이 난다는 겁니다. 반상에 돌을 강하게 때리듯이 놓고 나면 곰보빵같은 자국이 생기는데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깨끗하게 사라진다고 합니다.
비자나무 바둑판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충격을 받아 몸통이 갈라지면, 그 갈라진 면을 깨끗하게 닦고 천으로 감싸 어두운 곳에 몇 년을 놔두면 원목에서 수액이 흘러나와 그 틈을 메우고 결국에는 머리카락과 같은 실선만을 남긴다고 하며 이런 바둑판은 그 희소성으로 인해 훨씬 높은 가격이 형성된다는 것은 비자나무의 특성 때문입니다. 또한, 고대 백제의 땅이었던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나온 관재의 대부분은 비자나무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아마도 당시 백제와 긴밀하게 지냈던 일본에서 공물로 바쳤던 관재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예상입니다.
바둑판 제작의 장인 중에는 한겨울에도 옷을 입고 줄을 긋다보면 혹여 먼지라도 들어갈까 염려되어 알몸으로 줄을 그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바둑판의 줄긋기 중에서 옻으로 그어진 줄은 바둑판의 색상과 은은하게 어울리면서 수 십 년은 족히 그 원형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일본의 전설적인 비자나무 명반은 400여 년 전 일본 열도 통일의 기초를 쌓은 “울지않는 두견새는 베어버린다.”는 명언의 풍운아 ‘오다 노부나가’가 만들었다는 비자나무 바둑판이 있는데, 바다에 둥둥 떠다니던 비자나무를 구한 ‘노부나가’는 이것을 바둑판으로 만들어 사용하다가 ‘본인방’ 가문에 선물로 하사했다고 하며 ‘본인방가’에 대대로 전해지던 이 바둑판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라지고 지금은 그 소장자가 확실하지 않다는 소문입니다.
말없는 비자나무는 계절이나 상황에도 변하지 않고 꿋꿋하게 그 늘 푸른빛 싱싱함을 잃지 않으므로 하여 진리와 정의를 상징하고 열매와 나무를 통하여 약용으로 가구로 변모하여 모든 이들에게 온 몸을 던져 희생 봉사하며 죽어 바둑판이 되어서도 상처의 놀라운 복원력 그리고 맑은 청음으로 그 주검을 통하여 맑고 청아한 자취를 남깁니다.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니 비자나무 바라보기에도 부끄러운 삶이었습니다. 로마의 정치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인생의 쓴맛 단맛 신맛을 다 본 후 노년의 일갈대로 “나이 들면 육체적 한계를 받아들이고, 몸 아닌 마음의 근육을 키워라!”는 조언은 되새김질할 만합니다. 그리하여, 1월로 출발하는 2018년이 별을 지닌 따스함이 가슴에 있으며 어려움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항상 신뢰와 용기를 잃지않는 시간들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첫댓글 비자나무가 그러케 만은뜻을풍기고잇나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