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산리 & 수월봉' 신석기 유적지.
..............고산리 신석기 유적지.................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는 약 1만년전에 시작되어
'BC 2,000년 ~ BC1,500년'까지 지속된 것으로 파악.
신석기인들은 강가,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불을 사용.
그릇은 진흙을 빚어 몸통에 무늬를 새긴.,빗살무늬토기.
무늬는 융기문과 압날문 계열에서 침선문 계열로.,변화.
도구는 구석기인들이 사용했던 도구보다 훨씬 정교하고
발달된 기술로 여러 형태의 용도로 갈아.,제작한 ‘간석기’
마제석기(磨製石器)를 사용,
주거는 원형이나 방형의 평면
형태를 가진 움집을 만들어 생활.
우리나라에서 가장 연대가 앞서는
신석기시대 유적지는.,제주도 고산리.
.
청동기나 철기를 사용하기 이전의 시대는
일반적으로 뗀석기를 사용한 구석기시대와
간석기를 사용하던 신석기시대로 구분한다.
우리나라 구석기시대는 70만년 전에 시작.
구석기인들은 동굴에서 주로 주거하였으며,
생계는 수렵, 식물 채집으로 이동생활 한 것.
도구는 돌과 돌끼리 서로 부딪치거나
두드려 떼어 제작한 ‘뗀석기’(타제석기)
최초의 구석기 유물이 확인된 것은
1930년대 두만강변 동관진유적(현 강안리)
1962년 함경남도 웅진군 굴포리 서포항유적.
1964년 충남 공주시 석장리유적에서 수습된 것.
1978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유적.,구석기 유적.
.
제주도 고산리에서
1만 수천년전 토기 발견.
당시 제주도는 섬이 아니라
한반도와 육지로 붙어 있었다.
.
이는 연해주(시베리아동부)
1만5천년전 토기와 같은 시대.
수메르 문명보다 무려 1만년쯤
가까이 빠른., 세계 최초의 유물.
.
세계고고학계.,'고인돌의 나라' 한국.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한반도에 세계 고인돌 절반 넘게 있다.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인돌도 한국에 있다.
( 8천년전 - 전남 화순.)
고인돌은
한반도 남부에서
세계최초로 생겨난 것.
전남
화순에는
283t이 넘는
고인돌도 있다.
근래 '탄소 동위 원소'로 측정한 결과
세계 최초 빗살무늬토기 원산지.,한국.
이로서 세계 최초 유물이., 또 하나 추가.
.
古代 우리나라
세계 최초.,유물.
1. 배만들기 역사...... 8천년전(경남 창녕군 부곡면 출토)
2. 고래잡이 역사.......8천년전(경남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
3. '논 농사' 볍씨.......1만 5천년전(충북 청원군 출토)
4. 신석기 돌도끼...,...2만년전 (전남 장흥군 출토)
5. 신석기 토기 류......1만 수천년전 (제주도 고산리 출토)
6. 청동기시대 고인돌..8천년전 (전남 화순군)
7. 빗살무늬토기........ 8천년전 (강원도 양양군 출토)
8천년전 이미 배를 타고 다닌.,삼한(三韓)시대
2005년 세계 최초 8천년전 배가 발견된 창녕군.
조선(朝鮮)에서 조선(造船: 배만들기)이 생긴 것.
조선(朝鮮) 선(鮮)
'물고기 어(魚)' 자.
물고기는 배가 있어야만
대량으로 잡을 수 있는 것.
세계 최초 '철갑선' 거북선.,조선술.
세계 최초로 8천년전 고래잡이와 목축.
영국 BBC도 이 사실을 보도.(2004년도)
반구대 암각화 - 영국 BBC
“한국 고래잡이는 세계 최초”
한국에서 1만5천년 전에 이미 벼농사.
중국보다 수천년 앞섰으며.,세계 최초.
충북 청원 발견 재배 볍씨(1만 5천년전 것)
.
이 볍씨들 중
[자포니카종]
[인디카종] 모두
한국에서 생겨난 재배
볍씨들이 세계로 퍼진 것.
자포니카 : 한국, 북중국, 일본의 둥글고 찰진 벼.
인디카 : 동남아, 남중국 등지의 길고 덜 찰진 벼.
2004년 2만년전 신석기 발견(전남 장흥군)
그 전에도 구석기 유적인 경남 진주 장흥리
집현과 대전 용호동에서 각각 1기씩 마제석기
(갈아만든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번엔 숫돌 발견.
세계 고고학계가 경악한 사건.,숫돌 출토.
그전까지 1만년전 중동(아랍) 신석기 출토.
그전, 일본 발굴 신석기는 한국에서 건너간 것.
고대 한국은 토기도 세계 최초.
'고대한국' 환국(동시베리아-만주-한반도)
후에 차차 동시베리아와 만주에는 문명의 발전
한반도가 고대한국(환국)의 정통을 이어 받게 된다.
마한(馬韓)
'말마 자' 馬는
한국어의 [마]라는
글자를 한자식으로
표기하기 위해 붙인 것.
물론 한국인이
말(馬)과도 친숙
했다는 뜻도 포함.
.
고구려 무사가 말타는., 고분 벽화.
특히, 말을 타고 뒤돌아 활쏘기 기량은
중국에서 흉내는 물론 상상조차 못한 것.
.
비파형 동검
(비파모양 청동검)
'고조선 특유' 청동검.
.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다.
전세계 고대 선진문명은
한국에서 시작된 것이 많다.
'얼마나 더 많은
고대 유물 유적들이
세계 최초로 밝혀질까?'
................................
.
수월봉 갱도진지
수월봉 갱도진지.
태평양전쟁 당시 제주도 전역에
일본군 군사시설이 구축된 곳이
370여 개의 오름 가운데 120여 곳.
수월봉 해안에는 미군이 진입할 경우
갱도에서 바다로 직접 발진하여 전함을
공격하는 일본군 자살 특공 보트와
탄약이 보관되었던 곳.
카이텐 어뢰 해군 자살특공대는
가미가제 자폭 공군 특공대와 함께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말기에 활약.
용수리 포구에 사철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포나무 등 난대식물 군락을
이루는 언덕에 절부암이란 바위가 있다.
일명 언덕동산이라 하며, 높이 70m 정도.
1981년 8월 26일 제주도 기념물 제9호로 지정.
이 바위는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조난당한 남편을
기다리다 못하여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곳.
절부암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
............절부암(節婦巖 ).................
조선말기 차귀촌(遮歸村) 출생의 고씨는
19세에 같은 마을 어부 강사철(康士喆)에게
출가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다.
하루는 남편이 고기잡이 나갔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표류하고 말았다.
.
고씨는 애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식음을 잊은 채 시체나마 찾으려고
며칠 낮밤을 가리지 않고 해안가를
배회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단다.
그러자 남편의 뒤를 따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여 소복단장하고
용수리 바닷가, 속칭 ‘언덕동산’ 숲에서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러자, 고씨가 목을 맨
바위의 나무 아래로 홀연히
남편의 시체가 떠올랐단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모두 중국
조아(曹娥)의 옛일 같다고 찬탄,
1866년(고종3) 이를 신통히 여긴
판관(判官) 신재우(愼裁佑)가 바위에
‘절부암(節婦岩)’이라 새기게 하고 부부 합장.
그리고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제전을 마련하여
용수리 주민으로 하여금 해마다 3월 5일에 제사.
마을에서는 이들 산소를 소분하고 제사를 지낸다.
.................................................................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는
'신창리 ~용수리 ~고산리' 가는 해안도로.
'곡민도등대~차귀도'는 제주의 독특한 경험.
주요 관광자원은 차귀도, 수월봉 등이 있다.
.
차귀도는 면적 0.16㎢.,무인도.
와도(5,058㎡), 대섬(죽도 2,281㎡) 및
지실이섬과 장군여, 썩은여 등 간출암과 함께
천연기념물 제422호 차귀도천연보호구역으로
2007년 7월 18일 지정. 보호구역 면적 6,721,395㎡.
차귀도
자구네 포구
차귀도(목여)
간출암
장군여
지실이섬
쌀 썩은여
'동해와 남해'의
경계선은 어딜까?
해양환경관리공단은
부산 기장(북위 35.3도)
'동해와 남해'의.,경계선.
.
서해와 남해 경계는
제주도 차귀도 서쪽에서
진도 서쪽 끝을 잇는 직선.
서해 남쪽 끝은
제주도 동쪽 끝 우도에서
일본 나가사키현에 후쿠에 섬
남쪽 끝을 잇는 직선으로 정했다.
국립해양조사원
"2013년 동해와
남해 경계를 '부산항 부근
고두말까지 연안'이라 정의."
고두말은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달맞이고개
해안가가 동해와 남해를
가르는 수준이 된다.
국립수산과학원은
'울산 울기등대'로,
기상청은
부산과 울산
해양 경계점으로,
.
...........차귀도...........
제주도 여러 섬 중에서도
자태가 빼어난 차귀도는
손에 잡힐 듯 바다에 잠긴
모습이 주는 당당함이
보는 이 넋을 놓게 한다.
옛날 호종단이라는 중국 사람이
장차 중국에 대항할 형상을 지녔다하여
이 섬의 지맥과 수맥을 끊어 놓고 가려 하는데
갑자기 한라산신이 날신 매가 되어 날아와서 이들이
탄 배를 침몰시켰다고 해서 차귀도라는 이름이 전한다.
본섬이 죽도와 오돌 지실섬으로 이루어진 차귀도.
바다와 섬과 석양이 연출하는 장관이 더욱 유명해
그 장엄함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이 늘 이어지는 곳.
전국적인 낚시터로 널리 알려져
낚시꾼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에서
전승되는 한라산 99골 유래에 대한 민담.
「아흔아홉골과 문사랑」은 제주 지역에서
범과 왕이 왜 나지 않는지를 이야기하는 유래담.
또한 왕이 될 뻔한 인물이 있었으나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역적이 된 이야기를
곁들여 영웅출현을 바라는 민중심리를 담고 있다.
............한라산 99골 문사랑 전설...............
한라산 어승생 북동쪽에는 크고 작은 골짜기가
마치 밭고랑처럼 뻗어 내린 ‘아흔아홉골’이 있다.
그곳 기봉이 100개를 채우지 못하여 숙명적으로
제주도에는 범과 왕이 나지 않는다고들 전한다.
언제인가 왕이 될 뻔한 인물이.,문사랑이었다.
문사랑은 국지리 소목사로부터 명당 자리 하나
얻고 바로 그 자리에 부친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그 자리가 바로 왕후지지(王侯之地).
그러나 3년 동안 꼼짝하지 않고 방안에
은거해 있어야만 왕이 될 수 있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백일밖에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서울 궁궐을 염탐하다가 들키고 말았다.
결국, 궁궐살이들이 문사랑을 결박하고
제주도로 내려와 왕후지지에 묻힌 그의
선묘를 파버렸다. 이로 인해 하늘을 나를듯
했던 그의 기운이 일시에 떨어져 버렸고,
임금이 되겠다던 뜻도 좌절되고 말았다.
.....................................................
.
영실 99골.,천왕사(天王寺)는
백제때 창건된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천왕(天王)’ 글자를 새긴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천왕사터.
제주시 1100로 2528-171 (노형동)
.................천왕사...................
한라산 중턱에 자리 잡은 천왕사는
제주도 내 여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그 창건 역사가 오래되지는 않았다.
천왕사 마당에 들어가니 머리위에서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며 날아다닌다.
신기해서 까마귀를 쫓아 눈을 돌리니
산 중턱에 신기한 기암괴석들이 보인다.
천불전 뒤산은 경복궁 근정전 뒤
용머리바위와 닮은 꼴이며 법당 앞에
참배객들이 쌓아 놓은 기원탑이 있다.
천왕사는 한라산 어승생악 올라가는 길목
불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
.
한라산 99골.,삼나무숲길.
차귀도 일몰
용수 포구.
제주 한라산은 자연휴식년제 실시 중인
돈내코 코스를 제외한 5 탐방코스가 있다.
'관음사, 어리목, 영실, 성판악, 어리목' 5코스.
한라산 등바 최고의 비경지대로는 단연 영실코스.
.
.........영실 등산 코스........
한라산 서측 99번 국도를 따라
어리목 입구 지나 1100고지 휴게소
넘어 약 4km쯤 가면 영실입구 삼거리.
삼거리에서 매표소까지는 3km
'매표소~영실휴게소' 30/40분 소요.
영실 탐방코스(영실∼윗세오름) 3.7km.
대략 1시간 40분 정도 소요된다.
영실휴게소를 출발하여 1km 남짓
비교적 완만한 길로 힘들이지 않고,
영실 계곡을 쉬엄쉬엄 오를 수 있다.
본격적으로 들쭉날쭉한 기암괴석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오르막길.
가파른 산길이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등산로 아래 깊은 영실계곡
주변을 둘러친 웅장한 거벽은
태고에 거대한 화산분출구인듯.
병풍바위를 지나면서부터는
다시금 평탄한 산길이 나타나고
윗세오름휴게소까지 이어진다.
한라산 영실의 첫번째 매력은
영주십경(瀛州十景)의 하나인
영실기암(해발 1,400∼1,600m)
거대한 계곡 우측에 천태만상
기암 괴석들이 하늘을 찌를듯.
옛부터 '오백나한', '오백장군'
병풍 바위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에
잠시 숨을 돌리고 땀을 식힌 다음,
윗세오름까지, 마치 광활한 활주로.
멀리 버티고 있는 백록담 화구벽은
영실산행의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여유가 있다면 윗세오름에서
북쪽 하산길 철쭉평전 만세동산,
사제비 동산을 지나., 어리목 하산.
모름지기 국토 최남단의 영산
'한라산의 진수'라 할 수 있다.
.......................................
제주도 1만 팔천
신들의 고향이자
전설의 고향.,영실.
........영실(靈室) 5백나한.......
한라산 백록담 서남쪽 해발 1,600m
아래로 약250m의 수직 암벽이 형성.
5백 기암이 병풍처럼 둘러싼 영실기암.
한라산을 대표하는 경승지
영주12경 중 제9경에 해당,
영실에서 내려다보는 산방산 일대는
마치 신선이 되어 세상을 내려다보는듯.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산(靈山)과 흡사.
하여 이곳을 영실(靈室)이라 불렀단다.
이곳 1,200여개 석주가 빙 둘러쳐져 있는
형상이 병풍을 쳐 놓은 것 같다하여 병풍바위
이 바위들이 설법을 경청하는
불제자 모습과 비슷해 오백나한.
억센 장군들과 같다하여 오백장군.
...............................................
.
2016.04.21 용수포구 봄 햇살
2015.02.02 용수포구 어촌마을
돈내코 충혼묘지.,가는 길
....................돈내코.......................
옛부터 멧돼지가 많이 출몰하여 "돗드르"
돗드르는 토평마을 지명 유래가 되고 있다.
돗은 돼지, '드르'는 들판을 가리키는 제주어.
멧돼지들이 물먹던 내 입구라 하여 돈내코
코는 입구를 내는 하천을 가리키는 제주어.
1920년대이후로 멧돼지가 보이지 않고 있다.
계곡 양편이 난대 상록수림으로 울창.
높이 5m 원앙폭포 (돈내코 입구에서 1.5㎞)와
작은 못이 있어 그 경치가 매우 수려한 피서지.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얼음같이 맑고 찬물
"백중날 (음력 7월 보름)에는 물을 맞으면
모든 신경통이 사라진다."는 얘기가 전한다.
돈내코 유원지 입구에서 계곡까지 700m 숲길.
나무가 울창하고 나무 벤치가 많은 산림욕 명소.
해발 400m 일대 한란과 겨울딸기 자생지로 유명.
.................................................................
돈내코 원앙폭포.
돈내코 탐방로.
'돈내코 ~어리목' 한라산 등산로
.
대정읍 충혼묘지
...........제주 충혼묘지.............
제주도 군경원호회가 주동이 되어
제주 4·3사건 때 박진경이 행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52년 11월 7일에 세웠다.
제주 4·3에 박진경은
강경 진압 작전의 상징.
제주도민들은 충혼묘지에
박진경 추모비가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다.
제주 4·3 진상규명이 이뤄지는 현재
박진경 추모비가 제주시 충혼묘지에
있어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99골 제주시 충혼묘지에는 제주 4·3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희생된 군
전사자와 경찰 전사자들의 유해가 안장
원래 이 유해는 사라봉 자락의
사라봉 충혼묘지에 안장돼 있다가
1985. 10. 26. 현재 위치로 옮겨진 것.
충혼묘지 안의 좌측은 경찰 묘역, 우측은 군인 묘역,
1990년 현재 총 639기(군인 494기, 경찰 145기)가 안장
충혼묘지 입구에는 1957년 제주도 공비완멸위원회에서
건립한 한라산공비완멸기념충혼비가 제주경찰서 내에서
옮겨왔으며, 제주도 군경원호회 건립 박진경 추모비가 있다.
박진경 중령은 1948년 5월 초,
9연대가 11연대로 바뀌면서 초대
11연대장으로 제주도에 부임했다.
박진경은 부임 초기부터 김익렬 연대장과는 달리
강경 진압으로 치달으며 많은 인명 희생을 초래했다.
박진경은 부임 한달만인 6월 18일 대령 진급 축하연이
끝나고 숙소에 돌아와 잠을 자다 부하들에게 암살되었다.
............................................................................
................제주 3.1절 발포사건.................
1947년 3·1절에 제주에서 일어난 경찰 발포사건.
이 사고로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1년 뒤 발생되는 제주 4·3 사건을 불러일으킨 씨앗.
미군정은 3·1기념 제주도대회가 좌익 주도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촉구와 조직의 정비라는
목표로 열리게된다는 것을 알고 시가행진을 허가
하지 않고 행사장소도 제주서비행장으로 하라 했지만,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엔 좌익이 동원한 남로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주주의청년동맹, 부녀동맹,
인민위원회에서 동원한 17,000명의 군중과
기타 군중 8,000명 등 3만 군중이 모여들었다.
경찰은 제주 경찰 330명과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 경찰 100명 등 430명으로 주변 경비 활동.
행사를 끝낸 군중은 가두 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때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여 소란.
기마 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몰랐는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무장을 한 응원경찰은 몰려오는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걸로 알고 발포하여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도립병원 검시 결과 희생자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총탄에 맞은 것으로 판명됐다고 한다.
이에 항의
3월 10일부터
민관 총파업 발생
일부 경찰도 파업에 동참.
파업에는 행정기관, 학교, 회사, 은행, 교통,
통신기관에 관련된 160개 단체, 4만여명이 참가
제주도 행정기능이 마비되었다. 제주도의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행정기관 대부분인 23개 기관,
105개의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등이 파업에 참여,
제주경찰의 20%도 파업에 참여하였다.
경찰은 3월 15일부터
파업 관련자 검거에 나섰고
200명이 이틀 사이에 검거되었다.
4월 10일까지 파업 관련된 사람 중
잠적해 버린 몇 사람을 제외하고
500명 가량을 검거하였다.
검거자 중 66명의 경찰이 파면되었고
결원은 서북청년회 소속으로 충원되었다.
이는 훗날 경찰로 충원된 서북청년회의
횡포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과
5.10 총선거에 반대하는 남로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의 활동등이 복합적으로
일어나 4.3사건으로 확산되는 계기.
5월에 제2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자
미군정은 좌우익 정당을 똑같이 대우하는
정책을 취하였는데, 남로당은 그런 상황에서
당원을 늘려나가 1948년 초에는 5,000 ~ 6,000 명의
당원을 모을 수 있었다. 남로당 핵심당원들은 500 ~700명
경찰은 경찰관에 대한 테러 사건이 일어나자
좌익에 대한 단속을 실시하여 2,500명을 검속
이 과정에서 3건의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였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1948년 3월에
조직을 군사부 중심으로 개편하고
'인민유격대'를 창설하고 총사령관에 김달삼,
특별경비대장에 이덕구를 임명하였다.
인민유격대에는 전투부대25부대와
직속부대 25부대, 그리고 각 읍,면 단위로
한 두개의 유격중대와 자위대가 각각 편성되었으며,
인민유격대의 본부는 한라산에 설치되었고
애월면 샛별 오름 하단의 들판에 훈련장을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
....샛별오름....
애월읍 봉성리과
한림읍 금악리 일대
서부 중산간지역이다.
바리메오름· 이달봉· 가베오름·
누운오름·괴오름·북돌아진오름·
폭낭오름·당오름·정물오름·금오름 등
동부 중산간지역의
송당 일대에 버금가는
높은 밀도.,오름지대이다.
남봉을 정점으로 남서, 북서, 북동방향으로
등성이가 있으며, 등성이마다 봉우리가 있다.
서쪽은 삼태기모양, 북쪽은 우묵하게 패여 있다.
마치 별표처럼
둥그런 표창같은
5개 봉우리가 존재.
전체적으로 풀밭을 이루나
북쪽사면에 일부 잡목이 형성
서북쪽 사면에 공동묘지가 조성.
저녁하늘에 샛별 같이 외롭게
서 있다하여 명명된.,샛별오름.
표고 : 519.3m
비고 : 119m
둘레 : 2,713m
면적 : 522,216㎡
저경 : 654m
2000년부터 매년 제주들불축제 개최.
1997년부터 정월대보름 전후로 열린다.
제주도에서는 밭 경작과 작물운반 목적으로
농가마다 소를 길렀는데, 농한기에 마을별로
중산간 초지대에 소를 방목하여 관리하였다.
.
이때 방목을 맡았던 테우리(목동 : 제주어)가
오래된 풀을 없애고, 해충을 구제하기 위하여
늦겨울부터 경칩 사이에 초지대에 불을 놓았다.
제주도의 오랜 목축문화라고 할 수 있는
불놓기를 계승한 축제가 제주들불축제이며,
오름 전체가 초지로 이루어져 있는 새별오름의
남사면에서 오름 불놓기 행사가 치러지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5년에 우수 축제로
지정한.,'제주들불축제'
...............................
................제주 4.3 사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
제주도 전체직장 95% 이상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
미군정은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해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 대거 제주로 파견.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검속 한달 만에 500명이 체포,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서북청년회(이하 ‘서청’)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 구금자에 대한 경찰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 일선경찰지서에서 3건의 고문치사 사건.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며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 신호탄.
350명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등 슬로건.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미군정은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군대에 진압출동 명령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김익렬 중령은
경찰·서청과 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이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귀순작전을
추진해 4월 말 무장대측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
그러나 대동청년단원이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평화협상 결렬,
제9연대장은 교체되었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에 파견하여 5·10 선거를 추진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됐다.
그러나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
결국 5·10 선거 후 강도 높은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정권 정통성 도전으로 인식.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 선포된 후,
중산간 지대는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해 2월까지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 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설치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 발표.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
1949년 5월 10일 재선거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 전면 개방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린다.
1980년대 이후 4·3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4·3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
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다.
이후 4·3평화공원 등이 조성되었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2011. 1. 26 현재), 희생자로 14,032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1,255명이 결정됐다.
4·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4·3특별법 공포 이후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
2017.08.02
.........용수리(龍水里)......
옛 이름은 지삿개와 벗개다.
지삿개는 기와를 구웠던 곳.
벗개는 뜻이 확실하지 않다.
용수리는 좋은 물이 많이 나는 곳
또는 용당리에 있는 용못의 한자어
1418년(태종 18) 왜적이 차귀 등지에
침입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거주는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
19세기 중반까지도 대정현에 속
19세기 후반부터 행정상 독립마을.
본래 제주군 구우면 지역으로
용못이 있으므로 용수라 하며,
바닷가가 되므로 지세포·지사개·
지사포·와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용수리.
1946년 북제주군에 편입,
1956년 한경면에 편입되었다.
포구를 중심으로 한 어업활동과
주변 넓은 평탄한 지역에 마을과
밭이 분포하여 농업도 활발하다.
면의 서쪽 해안에 있으며,
2007년 8월 면적은 5.24㎢,
203세대 468명(남 224, 여 244)
총 면적 524㏊
밭 227㏊, 과수원 3㏊,
임야 124㏊, 기타 170㏊
경지 면적이 약 43%에 이른다.
해안마을이면서 농업비중이 크다.
주요 농산물은 마늘이 주 소득원
감자·양파·콩·보리 재배도 활발하다.
어업도 발달되어 있으며,
최근에는 전복 양식을 통하여
농어가 수입에 도움을 주고 있다.
절부암을 비롯하여
마을 앞 바다를 소재로 한
차귀도 관광지구가 지정되어 개발.
김대건 신부가 라파엘호를 타고
제주에 첫발을 디딘 마을인 곳으로,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기념관이 개관.
동쪽에는
국도 12번 도로가
북쪽 신창리에서
남쪽의 대정읍을
지나며, 이 외에도
위로는 신창리와
아래로는 고산리와도
연결된 도로가 있다.
.........................
2013.03.27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제주 용수리 포구)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등
일행 13명과 ‘라파엘호’를 타고 오다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 이곳 용수해안에
표착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첫 미사.
이를 기념하여
성당과 기념관을
제주 이곳에 세웠다.
.
......김대건 신부(1822~1846).........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자 순교자.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모방 신부를 통해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 교육을 받았고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임명되었다.
조선에 돌아와 전교 활동과 선교사들의
입국을 돕던 그는 기해박해 때 순교당했다.
그의 열성적 전교 활동과 경건하고 당당한
신앙자세는 이후 천주교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
탁트인 바닷가 올레길이 멋있는., 용수포구.
올레 12코스 종착점이자, 올레 13코스 출발점.
바람이 많이 불어와서 몸이 날아갈 것 같은데도
제주에서 이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 더 무섭다.
‘누이를 목 놓아 부르는 동생의 눈물’이란 곳이 있다.
차귀도 선착장 지나 당산봉 넘어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에 도착.
김대건 신부 펴착기념관은 배 모양으로 된 2층 건물.
'우리나라 최초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등 일행 13명과
‘라파엘호’ 타고 오다 폭풍을 만나 표류 중 용수해안에 표착한 것.
감사하면서 첫 미사를 올린 것을
기념하여 성당과 기념관을 세웠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정성지
대정성지에 있는 정난주 마리아 묘소
정난주 마리아는 백서사건으로 순교한
황사영 알렉시오 부인으로, 정약전・정약종・
정약용 형 정약현과 이벽 누이 사이에서 출생.
황사영은 16세 장원급제후 정조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로 영특한 인재였으나,
이승훈・정약종 등에게 교리를 배웠으며
천주교 입교후 교회 일을 하며 관직 포기.
정난주 마리아는 결혼 10년째인 1800년에
아들 경한을 낳았으나 황사영이 백서사건으로
1801년 11월 5일 능지처사 판결을 받자 연좌제로
인해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유배되었으나,
관비 담당 관리로부터 인품을 높이 사 자유로운 생활.
비밀리 기도생활에 전념,
‘한양 할머니’라 불리면서
양어머니 같이 봉양 받다가
1838년 2월 1일 65세로 사망.
130년이 지난
1973년 무덤을 찾아
1994년 대정성지에 안장.
그녀가 남편을 잃은뒤 두살 아들을 데리고
하염없이 뱃길을 가야 했던 곳이 바로 제주.
.
용수해안
애월 해안도로., 올레13코스 맛집
용수~저지
의자마을
........아홉굿마을(의자마을)..........
아홉굿 마을은 '9개의 샘이 있는 마을'
2003년 전통 테마마을, 2005년 공원터.
2007년 부터 만든 1,000개 의자 조형물.
재치있는 문구들을 새겨넣음으로써
마을 내 의자 테마공원을 완성하였다.
화산회토가 대부분인 제주 다른 지역과 다르게
아홉굿 마을은 물이 풍부하고 양질의 점토가 많아
사계절 특색에 맞는 다양한 제철 농작물을 재배하며,
마을에서 수확하는 농산물과 보리를 이용한 보리피자,
보리빵 등을 직접 만들고 시식할 수 있는 건강 먹거리 체험.
의자마을에 걸맞는 미니 의자 만들기 체험이 준비되어 있다.
...............................................................................
.....................저지오름...........................
한경면 저지리(옛이름:닥몰) 저청초등학교에서
북서쪽 수동으로 가는 도로 우측에 우뚝 선 오름,
산상의 분화구를 중심으로 어느쪽 사면이나 경사와
거리가 비슷한 둥근산체를 이루고 있으며, 둘레 900m,
깊이 60m, 매우 가파른 깔때기형 산상분화구 화산체
.
오름 각 사면에는 해송이 주종을 이루며
잡목과 함께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으며,
분화구안에는 낙엽수림과 상록수림이 울창.
안사면에 보리수나무, 찔레나무,
닥나무 등이 빽빽이 우거져 있어
화구 안으로의 접근이 매우 어렵다.
"저지오름(楮旨岳)" 호칭은
마을이름이 '저지'로 되면서
부터 생긴 한자명이라 한다.
그전까지는 '닥몰오름',
옛이름이 '닥모루'(닥몰).
닥나무(楮)가 많았던데서 연유.
한자 이름은 한자 뜻을 빌어 표기.
2007년 제 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생명상(대상) 수상
.....................................
천년숲인 구좌 비자림과,
생긴 지 50년밖에 안 되는
한경면 저지오름숲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의 보설핌은
약일까? 독일까?'
북제주군 구좌읍 평대리의 비자림
500~800년생 비자나무 2,800여 그루.
굵기 네 아름 쯤에 키 14미터.,‘천년숲’.
그에 비해 아직 어리고 어린 저지오름 숲.
낙천 의자공원
2012.11.06 제주 올레길 13코스(용수포구~저지마을)
2013.06.23 올레 13코스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해변
2013.05.14.
2012.06.27
2014.12.04
2017.04.07
2014.12.01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순례자의 교회'
세계에서 제일 작은 교회 중에서.,한 곳.
'차귀도 일몰'
구경 가는 길목.
오고 가며 한번씩
'눈길이 간다.'는.,곳.
2017.5.17
제주 올레 13코스
햇살한줌
곶자왈 환상숲
제주의 허파.,곶자왈
저지오름
저지마을회관 ~한림항 19.3km(올레14코스)
명월포
................목호의 난..............
1374년 명나라가 북원(北元)을 물리치려고
제주마 2,000필을 요구해옴에 따라 고려에서는
문하평리 한방언을 제주에 보내 말을 취하게 했더니,
목호들은 "세조황제가 방축한 말을 원나라 적 명나라에
보낼 수 없다"며 말의 공출을 거부한 후 300필만 내놓았다.
이에 명나라 사신 임밀과 채빈이 2,000필이 안 되면
돌아갈 수 없다고 하자 공민왕은 할 수 없이 최영 등을
파견해 목호를 토벌했는데 이때 동원된 토벌군의 규모는
전함 314척 예졸 2만 5,600명, 지나치다 할 정도로 대규모.
이는 당시 목호를 중심으로 한 제주세력이
그만큼 강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최영은 군사를 거느리고 제주에 들어가
반란군 및 주동자 3명을 처단해 난을 평정.
한편, 제주가 평정된 뒤 고려는
나머지 말 1,700필을 채우고자
서둘렀으나 명나라 사신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말 200필만 가지고 돌아갔는데
(300필 중 허약한 말 100필은 제외),
일행이 개주참에 이르렀을 때 호송을 맡았던
김의(金義)가 갑자기 채빈을 죽이고 임밀을 생포해
200필의 말을 가지고 북원으로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고려와 명나라 관계는 경색.
이후에 복잡한 외교문제가 발생했다.
................................................
......북원(北元, 1368년 ~ 1635년)......
명나라의 주원장에게 밀려 몽골 고원의
초원지대로 돌아간 이후 원나라를 부르는 말.
1368년 원 순제(토곤 테무르)는
대도(大都)를 버리고 만리장성
북쪽의 상도(上都)로 패주했다.
1370년 토곤 테무르는 응창(應昌)에서 훙거.
이로써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토곤 테무르의 아들인 원 소종(元昭宗)은
외몽골로 들어갔고 1372년 명 원정군을 격파.
그러나, 코케 테무르가 죽고, 나하추가 명에 항복.
북원 세력은 더욱 쇠퇴하고, 1388년 '브이르 노르'
동북에서 명군에게 대패하였으며, 소종 뒤를 이은
동생 토구스 테무르도 투울강 기슭에서 살해되었다.
이로서 쿠빌라이 가문은 단절되었다.
................................................
.
.....................
저지 예술인마을
......................
............저지문화예술인마을............
2001년 3만평 황무지에 예술인마을 조성
사업이 시작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2013년 서울 대학로와 인사동, 인천 개항장,
파주 헤이리에 이어 5번째 문화 지구로 지정.
저지리는 예술인마을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한라산 서북쪽 중산간 오지.
오름, 곶자왈 등 제주의 독특한
자연 환경이 그대로 살아있는 곳.
현재 세 코스 올레길을 잇는 길목.
.
마을은 작가 30여 명의 작업실과 갤러리,
야외 공연장, 제주현대미술관으로 구성.
집마다 울창한 숲이 담을 대신할 정도로
산책로가 잘 가꿔져 있어, 거닐기 좋다.
체험 프로그램은 따로 없지만
마을 전체가 자연 예술체험장.
........................................
.
제주 현대미술관
2017.05.10 제주미술관이 전시 중인., 故 김흥수 화백 작품
한국의 피카소 95세로 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