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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놓은 욕망이 일렁이는 곳. 음침한 조명 아래 시장 바구니를 끼고
몰래 찾아든 춤바람난 중년 여인과 포마드 기름을 발라 넘긴 머리의 능글맞은
남성. 춤과 알코올, 그리고 하루살이 같은 사랑과 욕정이 음악에 묻혀 출렁이는
지하 댄스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카바레의 이미지다.
그러나 1881년 카바레가 탄생했을 때 그곳은 시인과 음악가, 연출가들의 도전
적인 정신이 모인 곳이었다. 카바레는 원래 '포도주 창고' 또는 '선술집'을 뜻하
는 프랑스어. 라틴어 cavus(구멍)· cave(지하실) 및
아랍어의 khamaret(목로주점)이 어원이다.
처음 파리에서 시작될 때는 예술가끼리 작품을 선보이고 즉흥공연을 하는
화합의 장소, 작지만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레뷔(춤과 노래, 시사풍자 등을
엮어 구성한 가벼운 촌극)의 공연장으로서 역할을 했다.
폴란드 출신의 작가 리사 아피냐네시가 지은 '카바레-새로운 예술공간의
탄생'은 시대정신의 산실인 카바레의 역사를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전복을 꿈꾸는 비주류들이 자욱한 연기 속에 모여 앉은 파리의 '검은 고양이'를
비롯해 유럽 전역의 카바레를 거쳐 현대의 미국과 영국에 이르기까지 예술가
들의 아지트, 카바레를 순례했다.
피카소의 작품을 처음 선보인 바르셀로나의 '네 마리 고양이'나, 1912년 모더
니즘 아방가르드가 모여들었던 런던의 '금송아지 굴', 러시아 혁명전 상트페테
르부르크 의 보헤미안들에게 사령부 구실을 한 '길 잃은 개', 냉전시기 동베를
린의 '디스텔', 공산주의 치하에서도 명맥을 유지해 온 폴란드 쿠라쿠프의 '양
머리 아래 지하실' 등을 두루 순례하며 풍자와 저항의 시대정신을 고취해 온
예술가들의 삶을 되살리 있다.
카바레 탄생의 도화선은 '이드로파트'('물 치료 요양자들'이란 뜻). 1878년
젊은 시인 에밀 구도가 결성한 예술가 모임이다.
시와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매주 모여 작품을 선보이고 시와 노래, 일인극,
짤막한 소품을 공연하기도 했다. 대중적인 풍자와 저항의 노래가 코드였다.
그때부터 이 두 가지는 카바레의 대표적인 특징이 됐다.
이들과 함께 최초의 예술 카바레 '검은 고양이'를 세운 이가 로돌프 살리다.
그는 몽마르트를 선택했다. 당시만 해도 그곳은 시골 정서를 간직한 변두리.
몽마르트라고 하면 떠오르는 풍차가 서 있던 곳이다. 그때 살던 사람들이
카나이유, 즉 어중이떠중이 하층민이었다.
초창기 '검은 고양이'는 회원제 클럽의 성격이었다.
살리의 친구인 시인과 작곡가, 작가, 화가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고 책을 읽고,
작품을 시연했다. 이런 폐쇄성은 오히려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고, 소문은
프랑스 전역에 퍼져나가게 됐다.
독일 최초의 카바레는 엄격한 도덕과 공연 예술에 대한 공권력 개입에 저항한
예술가와 학생들에 의해 비롯됐다. 카바레를 열자는 데 뜻을 모은 이들은 자신
들을 옥죄는 법을 처형하러 나서겠다며 그 이름을 '11인의 처형인'이라고 지었
다. 바이마르 독일과 1,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에 이어 또 한번의 세기말을
거치면 서 카바레는 끊임없이 창조하고, 재창조해왔다. 예술과 오락이 만나 서
로 자극하며 영향을 주고받은 카바레의 역사는 흥미롭다.
특히 현실에 안주하지 않은 예술가들이 꿈꾸던 '전복의 아지트'였다는 점이
한국에 서 굴곡된 카바레와 큰 차이를 보여준다. 408쪽. 1만 8천 원.
첫댓글 쓰던 컴이 아니라 수정할수록 이상합니다..글자크기나 행이 의도한대로 잘 되지 않네요...컴도 주인 알아 보는지?..- 연장나무라고 있네,..ㅎㅎ-
뽀글 파마와 빨간 립스틱,장바구니를 들고 이리저리 주의을 정탐하고 나서 쑥~~~~~ 진입하는 캬바레, 이런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는 장면들과 꽃뱀, 제비들의 원조가 된 곳이기도 한가요? 제비의 느끼함과 완벽한 매너, 꽃뱀의 유혹을 조심하시고 예술적인 하루를....ㅎ ㅎ
캬바레=목로주점. 그렇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