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추억속의 벗님 들
혈압과 혈당치에 관심을 가져야 만이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어느 큰 병원에서 종합 진단을 받고 그에 필요한 약을 하루에 한 차례씩 복용
해 온지도 벌써 5년이나 되었다. 최초 발병 당시에는 그 두 가지를 1주일에 한
번씩 첵크 하더니만, 3개월이 지나자 상태가 급속도로 호전되고 있다면서 2주
일에 한 번, 그로부터 3달이 지나면서 1달에 한 번, 작년 가을부터는 2달 간격
으로 혈액 검사를 하고 처방약을 지어준다.
병원에 들러 지난 2달간의 치료효과를 체크해 보니 혈압은 110-70, 혈당치
는 94로 정상궤도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정한 약을 제때
에 복용하면서 1만 보 이상 걷기 운동을 열심히 한 효과라고 담당의사가 말해
준다. 사실 혈압 160-110에 혈당치 432를 나타낼 때에는 금방이라도 꼴까닥
해버릴까 봐 겁이 벌컥 났었는데 이처럼 바람직한 상태가 지속된다니 불행 중
다행이라는 넋두리를 하며 지내는 요즈음의 ‘나‘란 사람이다.
대비소희(大悲小喜) 천려일득(千慮一得)의 착잡한 심정이 서린 채 이 생각
저 궁리하며 공원길을 빙빙 돌고 있으려니 호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린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할 사람이란 시도 때도 없이 여가만 있으면 애비의
안부를 묻는 둘째딸 녀석뿐이기에 핸드폰을 열자마자 다짜고짜로 "이젠 걱정
안 해도 된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그게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리고 혈당치도
혈압도 모두 정상이라고 하니 역시 산 사람은 살기 마련인가 보다. 비록 약물
효과이기는 하지만.“
그러고서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아녜요. 저 변순이 입니다. 동창생 변순이 모르겠어요?"
"모르긴 왜 몰라요, 참말 오랜만입니다. 모두들 편안하시지요?"
"지금 방순이 하고 둘이 본순 이 칠순잔치에 왔다가 내려가려고 고속 터미널에
있거든요. 방순이가 기왕 온 김이니 녹야 친구 얼굴이나 보고 가자고 그러네요."
이 두 사람은 나의 초등학교 동창생들이다. 이들은 나의 모교인 B국민학교에
5학년까지 다니다가 6학년 때에 대도시의 학교로 전학을 했다. 그러니 졸업생
명부에도 없고, 졸업 기념사진에도 없는 동창생 들이다. 원래 이름은 따로 있는
데, 우리들은 이 세 사람을 가리켜, 각각 변덕이 심하다고 변순이, 이상한 것만
보면 방방 뛴다고 방순이, 본대로 들은 대로 거짓말 못한다고 본순이, 이렇게
불렀고 그들도 이런 별명을 불러 주는 것이 좋았던지 나중엔 싫어하지도 아니
했다.
이들은 얼굴 잘 생기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기에
주위의 친구들은 물론, 선후배 동문들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변순이는 대학을, 방순이는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본순이는 국민학교 졸업이 그
의 최종 학력이다. 내가 고속터미널 대합실로 가 보니 주름살 잡히고 검버섯이
돋기 시작하는 두 할매가 무엇이 그다지도 즐거운지 희희낙락 주거니 받거니 사
람이 다가서도 모르고 대화에만 열을 올리고 서있다.
그들의 얼굴을 본지 30년도 더 지났으니 길거리에서 지나쳐도 일아 보질 못
할 만큼 변해 있었다. 나는 10m 이내에 있는 사람의 귀에는 들릴 수 있을 정도
의 큰 소리로 마치 국민학교 때 소년처럼 외쳤다.
"방순이랑 변순이랑 그만 지꺼리고 날 좀 보라니께."
"여기 있잖어, 눈앞에 두고선, 왜 고함이여 고함이, 남부끄럽게."
"아니잖아, 할망구들 말고, 내 동창생 변순이 방순이 찾는 다니까."
"그 넘의 장난끼는 육십 여년이 지나도 변치를 안 해, 흐흐 ㅎㅎㅎ"
만년소녀 같을 줄 알았던 그들이었는데 세월의 흐름에는 대적할 길이 없었
던지 고목처럼 변해버리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거울 앞에 선 나의 자화상과
다를 게 없었다. 방순이와 변순이의 옆지기 영감들은 3,4년 연상이었는데 일흔
살을 넘기지 못하고 십여년 전에 이 세상을 버렸다. 본순이의 영감은 올해 일흔
아홉인데도 오십대의 젊은이 처럼 젊고 건장해 보이더라고 그들이 전한다.
본순이의 사는 모습을 보니 언젠가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랍니다' 라는 영
화제목이 생각나더라고 한다. 가정환경도 가방 끈도 자기네 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던 본순이었는데, 일흔 살을 훨씬 넘긴 오늘의 시점에서 대조해보니 그가 가
장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국민(초등)학교 4학년 때의 어느 봄날, 어머니를 따라 우리 집에서 이십 리쯤
되는 마을에 살고 있는 이종누님 댁을 간 적이 있었다. 가는 길 가운데에 있는
어느 마을 앞을 지나려니 십여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내 또래의 한 소녀가 밭 언
덕에 앉아서 부지런히 나물을 캐고 있다. 봄 날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차가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때 들녘에서 일을 하다니 그
소녀가 참말 가련하게 여겨졌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니 그 애가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해 한다. 그 애의 취
하는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지 어머니께서 혹시 저 애를 잘 아느냐고 물으
셨다. 그 애는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자신이 창피스러웠던지 등을 돌리고
서서 고개를 들질 않는다.
어머니께서 "너를 아는 아이가 분명하다." 고 말씀하셨다. 그러는 순간 그 소
녀가 고개를 쳐드는 것을 보니 본순이가 아닌가! 그때 우리들은 겨우 11살 된
어린이들이었지만, 막상 외딴 곳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니 그렇게도 반가울 수
가 없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더 없이 많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어찌나 내 자
신이 수즙은지, 인사말 한 마디 하질 못하고, 2,3분 동안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가 아쉬운 눈빛을 간직한 채, 앞서 가고 계신 어머니의 뒤를 급히 따라 가
고야 말았다.
본순이의 집은 너무나도 가난했던 까닭에 어려서부터 논밭일 다하고 들에
나가서는 나물을 캐고 산에 올라가서는 땔나무를 해오고, 계집앤지 사낸지 분
간이 안될 만큼 억세게 일을 해야 했다. 그녀는 18살 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다. 5남매의 큰딸인 그녀는 중매쟁이의 말만 믿고 시가가 부자인 줄
알고 결혼을 했다.
집안 형편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터여서 혼수라고는 한 가지도 갖추지
못하였음은 물론, 입고 갈 옷도 신고 갈 신발도 없어서 옷은 변순이 것을, 신발
(흰 고무신)은 방순이 것을 빌려 신고서 시집을 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신랑이 몹시 선량한 사람이어서 이런 부끄러운 사실들을 밖으로 세어나지 않게
철저히 숨기었다고 한다.
본순이의 신랑은 5살이 위였고 대도시 무슨 사업소의 직원이었는데, 그의 벌
이(수입) 가지고는 친정에 도움은 엄두도 낼 수 없었고, 시가의 대식구가 먹고
살기에도 힘겨웠다. 여기에서 본순이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돈 버는 일이라면
도적질만 빼고는 물불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야겠다는 것을,
천만 다행스러운 것은 농촌과는 달리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대도시여서 소위 밑
바닥이라 할 일자리야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결혼 후 반년도 안 되어 신랑이란 사람이 무슨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되어 직
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본순이는 이것이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남편을
설득하여 부부가 빈손 쥐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가 1950년대 중반 무렵이었
다. 남편은 서울역을 서성거리며 잡히는 대로 막일을 하고 본순이는 시장, 식당,
청소부, 가정부, 여관, 목욕탕 가릴 것 없이 잡일하는 곳이면 어디고 덤벼들어
돈벌이를 했다.
그들은 회기동 언덕바지에 셋방을 얻어 살았는데 처음 일 년 동안은 무척 고
생을 했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남편이 어느 제과점 사장의 눈에 들게 되어 그 직
장에 취직을 하면서 살기가 다소 부드러워 졌다. 본순이는 큰 대중목욕탕 때밀
이를 하면서 짭짤하게 돈을 모았고, 남편은 월급을 받으면 일원 한 장 쓰질 않고
본순이에게 맡겨 활용토록 했다.
본순이는 그 돈을 상인들에게 빌려주어 불리고, 다시 서교동, 갈현동 쪽의
체비지를 불하받기도 하고, 봉천동, 구로동 싼 땅을 사고팔고 했는데 그때마다
돈이 눈덩이 구르듯 쌓여만 갔다. 가정부(파출부) 노릇하고 때밀이 할 적에는
천덕꾸러기 취급만 당하던 본순이가 만고풍상 갖은 고생을 겪고서 여관 목욕탕
오락실 식당 등을 경영하는 의젓한 사장(?)이 되니 별별 명사란 자들이 자세를
낮추고서 그녀에게 접근해 오더라는 것이다.
변순이와 방순이는 슬하에 각각 2남 1녀를, 본순이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이 자녀들 모두가 배울 만큼 배우고서 사회에 진출하여 중견간부들로서 활약
하고 있고, 또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이 문화인답게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변순이는 많은 말을 주고받은 끝에 조금 색다른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살만큼 살았으니 말인데, 사람의 생각도 평가도 나이 먹을수록 달라지는 가
봐, 칠십 평생을 되돌아보면,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가방끈의 길이에 정비례
(正比例)하는 것은 아니야, 그 말은 맞는 것 같아, 그런데 학교시절의 우등생
이 사회에 나와선 열등생이라는 말, 이건 틀린 것 같고, 또 행복은 학교의 성
적순이 아니란 말, 이것도 맞지 않는 것 같더라니."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인데?"
"살면서 보면 예외적인 현상이 너무나도 많더라니까. 가방끈으로 따지자면 나
변순이가 대학원까지 나왔으니, 제일 잘살아야 할 터인데 그렇지가 않거든,
학교 다닐 때 본순이는 집안일 하느라 공부할 시간도 없었지만 시험 보면 언
제나 일등이었잖아, 지금도 본순이 이야길 들어 보면 나와 방순이는 꿈에도
모를 삶의 지혜를 지녔더라니께, 남학생들도 마찬가지잖아? 학교 시절의 우등
생들, 지금 모두 잘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우리 5학년 때의 성적순으로 말
이여, 방순아 그렇지 않냐?"
"그 말이 맞아, 우린 6학년 되면서 전학 가버렸으니까 졸업 성적순위는 모르겠
지만, 5학년 때 성적순대로 K씨 G씨 P씨 B씨 A씨 M씨 그 순위에 맞춘 것처럼
잘 사는 것 같잖아, 그러니 나는 사회에 나와서도 3등 인생이라니께.ㅎㅎㅎ"
"허허허 이 사람 무슨 소리? 삼등 인생이 자가용 몰고, 비행기 타고, 심심하면
골프치고, 외국 관광여행가고, 적십자 회비 5만 원씩 내고, 재산세 종부세 천
몇 백만 원씩 내고, 그러는 거여?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방순이 같은 3등 인생
만 된다면 그거야말로 지상천국 지상낙원 아니겠는가?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고?"
“다른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런 이야기 들으면 이구동성 우리들 세
사람을 가리켜 웃기는 늙은이들이 비싼 밥 먹고 헛소리 한다고 할걸세. 4천 8백
만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다 아는 상식도 모르느냐고 비꼴게 틀림 없단 말이야,
안 그런가? 줄 잘 서고, 돈 많고, 빽 좋으면 그만이지, 공부 잘해 우등생이 별거
냐? 그럴 거야. 요새 출세했다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세가지 조건을 갖춘 부류들
아니던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맘대로 지껄여 대는 세상 아닌가?"
그러니 우린 헛소리 한다고 갑오 식기 망신이나 하는거지 뭐, 빈축살 말 자초
하지 말고 버스에 몸싣고 마음싣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며 차창밖으로 전개되는
아름다운 산야경관이나 실컨 감상하시길! 우리도 남들처럼 9988 이삼셋 그러자
이 말일세 흐흐흐 하하하ㅋㅋㅋ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남 주나? 2011.8.25.
영산홍 - 김용임
영산홍 붉게 핀 언덕 기슭에
가신 님 불러도 대답은 없고
세월만 무심히 흘러 가더라
애타는 내 마음 님은 알 리 없건만
영산홍 붉은 꽃잎 하도 고와서
가신 님 그리워 눈물 뿌렸소
가사 출처 : Daum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