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7주일설교 숨기고 싶은 이야기(누가복음22:54-62)
본문: 누가복음22:54-62
제목: 숨기고 싶은 이야기
오늘은 누가복음22:54=62의 말씀을 가지고
“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숨기고 싶은 이야기”
나이가 들면서 좋았던 때를 생각합니다.
아름다웠던 시절, 건강했던 시절,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던 시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그것을 리즈시절이라고 합니다.
어른들은 왕년에 어땠다고 말을 합니다.
지금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때를 생각하며
그때의 모습을 자랑하고 싶어하며
그것을 통해서 위로 받고 싶은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자랑하고 싶습니까?
무엇을 생각하면 위로가 됩니까?
이처럼 자랑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반대로 숨기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너무나 부끄러워서
내 인생에 그런 일이 절대 없었기를
바라는 사건이나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 생각이 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럽고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일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참으로 부끄럽고
잊어버리고 싶은 그래서 지워버렸으면 하는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 지도자로서
우뚝 서 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많은 영향력이 있었고
그의 사도로서 모습은
많은 존경과 따르고 싶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 사도가 실족하여 넘어진
사건을 오늘 분문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조금 넘어진 것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그것도 비참하게
넘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기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넘어짐은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말씀이며
많은 영혼을 멸망으로부터 구해내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성경이니 이런 기록이 있는 것이지
다른 데서는 이런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사도 중 한 사람이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그 사건을 살펴보면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들어야 할 주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깨달아 행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입맙춤으로 배신을 해서
그가 이끌고 온 무리들에게 붙들려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붙들려 가서 심문당하는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실족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아주 사소한 일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큰 죄에 굴러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시몬 베드로에게
사탄이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흔들어 댈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한 경고를 듣고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가고,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장담했던 베드로는
예수님과 옥에 가기는커녕
예수님이 잡히신 자리도 같이 가지 못하고
그저 멀찍이 떨어져 뒤따랐을 뿐입니다.
베드로는 교만한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절대로 예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감옥도 죽는 자리도 함께 가겠다고
교만한 자신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할지라도
자신만은 절대로 그렇지 않겠다고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주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죽음의 자리에도 갈 각오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각오는 했지만
그 일을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말로서 모든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짐하고 맹세한다고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신자는 신앙적인 일을 하려면,
믿음으로 행동 하고 싶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는 그 길에
죽음이 다가오는 그 길에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깨어 있지 못하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하는데
나태해져서 기도를 소홀히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원수들이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했을 때
그들과 맞서 싸우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잠시뿐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고
멀찍이서 바라보았습니다.
충동적으로 칼을 뽑았지만
그 거대한 권력의 무리 앞에
베드로는 머뭇거리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잡혀가서 심문당하고 있는데
같이 가서 예수님을 보호하거나 같이 맞서지 못하고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더 문제는 멀찍이서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악한 무리들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그는 대제사장 집에 들어가서
하인들과 함께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숯불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은 전혀 예수님과 관련이 없는 자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처럼
그들이 하는 말을 그들이 하는 악한 행위들을
보고 듣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행동한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들로부터
갑자기 예수님의 제자라는 혐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혐의를 받았을 때
베드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마치 올가미에 씌워진 짐승과 같이
도망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자신 스스로가 함정에 들어갔으며
올가미를 씌운 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찬양받으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갑자기 된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전에 실수가 있었기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부인하는 것은 이제 곪기 시작하는 질병일 뿐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타락의 시작을 조심해야 합니다.
일단 주님을 떠나면
주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적고 사소한 것이지만
나쁜 습관이나 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위험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죄가 시작되면 그것은 싹이 되어
자라게 되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바늘 도둑이 그것을 끊어 내지 않으면
소도둑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에 작은 일에도 자기의 마음을
부지런히 지키는 그리스도인은
커다란 실수나 죄악에서 보호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첫 번째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그것을 깨닫고 주님께 마음을 돌려 행하였더라면
두 번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2.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믿는자가 타락할 수 있는 지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받은 자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어떤 사람들보다 더
큰 영적인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는 주님의 만찬을 그것도 직접 방금 전에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4,15,16장에 있는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는 감동적이고 놀라운 설교를 방금 들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베드로에게 그가 빠질 위험에 대해서
명백하게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큰 소리로 무슨 일을 당하든지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함께 죽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그의 자비하신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그리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고상한 성도라고 해도
기껏해야 연약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겉보기에는 공정하고 깨끗한 행동을 했을망정
그 속에는 무한한 죄악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가 붙들어 주지 않으면
그리고 우리가 깨어 기도하여 주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빠져들 수 있는 엄청난 죄악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신앙의 선배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등등
그들이 넘어진 사건을 읽고 들을 때
우리 중 누구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읽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장담해서는 안 되고
넘어진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멸시하며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교만해서도 안됩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기를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3.주님의 자비밖에는 없다.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닭이 세 번 울었으며
주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는 똑바로 보셨습니다.
모욕하며 피에 굶주린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몸서리치는 횡포와 불의한 재판과
고통스러운 죽음 등을 앞에 두고 계시면서도
주님은 자신을 악한 자들 앞에서 배반하는
불쌍한 제자를 돌아보셨습니다.
왜 그렇게 돌아보셨을까요?
책망하기 위해서 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얼굴은 슬픈 표정으로
그러나 노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그 고난의 자리에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왜 이렇게 보셨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사랑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태양 빛이라고 한다면
베드로의 주님의 사랑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베드로를 주님은
사랑의 눈으로 연민의 눈으로
용서하시는 눈으로 바라 보시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어떠한 상황에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인임을 알았을 때
죄를 깨달았을 때
아무리 깊은 타락의 상태일지라도
두려워 말고 주님의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아무리 타락했다고 해도
주님께 돌아오면 낙심한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법정에서 죄수로 계실 때에도
그렇게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타락했음에도
이토록 자비하셨다면
지금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지금은 얼마나 더 자비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베드로가 어떻게 사도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까?
그가 무슨 노력을 하였습니까?
무엇을 하였습니까?
그것은 단 하나 주님께서
그를 찾아와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숯불 앞에 있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신하였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나 잡으로 가자고
갈릴리로 돌아가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갈릴리 바다에서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베드로를 초청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숯불이었지만
주님과 떨어져 있는 숯불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리로 가게 하였지만
주님 앞에 있는 숯불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리의 숯불 앞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죄를 짓고 회개하였습니다.
아니 처음에는 그 자신의 어리석고
비참한 모습에 통곡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을 팔고
자신의 죄악된 모습에 통곡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떠났기에
주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지 않고
절망의 자리, 죽음의 자리로 갔기에
그는 영원히 저주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끄러워도 주님 앞을 떠나지 않았던 베드로
주님이 부르실 때 절망적인 자신의 모습이어도
주님 앞에 앉았기에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 음성에 순종하였기에 위대한 사도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 넘어집니다.
물론 넘어지지 않기를 기도며
주님께 붙어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부끄러워도 엄청난 타락을 했어도
주님 앞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순종하여 나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으며
주님이 원하는 자리에서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