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곰나루21의 오랍들이
※ 오랍들이 : 집주위를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
Ⅰ. 나와 카페지기와의 회상
천자문에는‘春’이라는 글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자문은 중국 남쪽나라인 양(梁)나라 사람인 주흥사가 지었기 때문입니다. 일년 내내 따뜻하면 봄이라는 계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봄은 땡땡 얼어붙은 얼음장 밑에서, 수정 고드름이나 칼바람 속에서, 뽀드득 뽀드득 눈밭 속에서 옵니다. 봄은 연하고 순한 흙에 뿌리박고 새순을 틔우는 보리싹 같은 땅기운에서 오기도 하지만 매콤하고 쌉싸래한 달래무침이나 술꾼들이 간 다스리는 데 더할나위 없이 좋은 냉이국과 같은 입맛에서도 옵니다. 새싹이 움트는 봄의 기운이 서서히 우리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 온누리는 온갖 생명들이 우두둑 우두둑 손마디를 풀면서 봄 잔치를 위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집 거실에도 연분홍 색깔의 영산홍과 붉은 군자란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봄꽃의 향기로움 속에 따스한 햇살이 비치고 있는 거실에서 따끈한 홍차 한 잔을 마시고 있노라니 새삼스럽게 지금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지난날이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 내가 태어나서 봉래초등학교 3학년까지 성장한 곳은 서울역 뒤에 자리한 만리동이라는 곳입니다.
아마 대여섯살 때의 기억으로 생각합니다. 이 때 내 기억 속의 잔상은 6·25 종전 직후 페허화된 한국의 수도 서울의 참담한 모습으로 오로지 춥고 어둡고 쌀쌀함이 뼈를 파고드는 그런 느낌 뿐이었습니다. 눈이 내리고 있는 한겨울 추위에도 불구하고 맨살이 드러나는 찢어진 옷을 걸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제일 잘 입은 사람이라야 염색한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거리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꼬방이라고 부르는 판자집 뿐이었습니다. 그 때 내가 하던 일은 내 또래들과 함께 하루 종일 쓰레기 더미를 뒤지면서 돌아다니는 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운이 좋으면 구리로 만든 것이나 탄피를 주웠을 때이고, 대부분은 전기줄이나 철사를 주워 그것을 팔아 돈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이 당시 서울에 살면서 내가 가장 무서워했던 기억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살았던 집이 지금의 아파트 같은 건물로 몇 층인지는 모르지만(아마 3층 건물이었을 것이다) 맨 끝이기 때문에 세수하고 난 물을 아래로 그냥 내버렸는데 고층이기 때문에 무서워서 아래를 쳐다보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둘째는 내가 살았던 이 건물에 한밤중에 불이 나서 건물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피신하여 불타는 장면을 바라보며 무서워했던 것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경부선 열차 차장으로 일 주일에 한 번 정도 집에 들리셨는데 그 때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모처럼 볼 수 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가지고 오는 설탕, 커피. 초코렛이었습니다. 초코렛을 가지고 또래 친구들에게 무척이나 자랑하고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세째는 특히 추운 밤이 되면 알루미늄으로 만든 럭비공(유담뽀)에 뜨거운 물을 넣어 발 아래 놓아두고 잤는데, 한밤중 소변이 마려워 잠이 깨면 들리는 딱따기 소리가 무척 무서웠습니다. 사실 이것은 막대기 두 개를 두드리면서 방범을 도는 순찰이었는데 어찌했던 그 때는 이 역시 지금까지 무서움이라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이 당시 지금까지 가사를 알고 있는 내 기억의 노래로서는
‘저 산 저 멀리 저 언덕에는 무슨 꽃잎이 피어있을까
달이 뜨며는 해가 지며는 꽃은 외로워 울지 않을까
에야호 에야호 에야호 에야호
나비와 같이 훨훨 날아서 나는 가고파 에이야호’
나는 어렸을 때 내가 외우고 있던 이 노래가 그 당시 아이들이 불렀던 동요인지, 아니면 그 때 아이들이 좋아했던 라디오의 드라마 주제가이었는지가 퍽 궁금했었는데 이 의문이 풀린 것은 몇 년 전 공주에 있는 ‘청주해장국’집에서였습니다. 그 때 감내형, 몽골리안형과 셋이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는데 이 의문을 얘기했더니 그건 가수 금수향(현 88세)이 부른 노래라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연륜이 있어야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까지도 나는 이 노래를 어린 시절 한양을 생각할 때면 즐겨 부르고 있으며 어쩌면 이렇게도 곡조나 가사가 아이들의 동요 같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곰나루21 회원은 지금부터 47년 전 공주사범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여 이원구, 임헌도, 강귀수, 조재훈, 하동호 은사님에게 훈민정음의 위대함을 배웠으며, 공주라는 공간에서 같이 생활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곰나루21 카페는 지금부터 12년전 2003년 1월13일 개업을 했으며 카페지기는 故 최병두이었습니다. 개업 직전 경주에서의 모임에서 길림, 백두산과 함께 카페에 관한 이야기도 나와 아래와 같이 개업을 하였습니다.
‘경주에서의 의견을 받들어 카페를 개설하였습니다. 앞으로 적극적인 참여 바라면서 게시판을 나름대로 몇 개 만들었습니다. 다른 좋은 게시판 이름 있으시면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남은 게시판은 3개입니다. 현재 만든 게시판 이름도 필요 없거나 고칠 것이 있으시면 고견 주시고 새로운 게시판 이름도 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제 11시 30분에 도착하였기에 주인백(대문)을 꾸미지 못했습니다. 오늘 오후에는 간단히 꾸며볼까 합니다. 빨리 빨리 가입들 하세요’(2003.01.13 카페 개설사)
대학 다닐 때 최병두 카페지기와 얽힌 이야기입니다. 1970년 6월15일 총 유권자 953명 중 919명이 선거에 참여, 98%의 투표율을 보인 학생회 정·부회장 선거에서 회장에는 임성만, 부회장에는 장재만이 당선되었는데, 이 때 나는 부회장 후보로 출마한 충주고 출신 박종은(생물과)의 선거 운동을 하느라고 거의 한달 동안을 집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장재만이 449표, 박종은이 431표로 18표의 근소한 차이로 낙선이었습니다. 이어 6월 27일에는 대의원 정기총회에서 5부장을 간선하였고, 여기에서 나는 문화부장 후보로 홀로 나와 당선되었습니다.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몇 달이 지난 후 카페지기가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도 문화부장에 출마할 의향을 가지고 6월 어느 날, 이미 후보로 출마를 한 나를 집으로 찾아왔었으나 만나지를 못했다고. 이 때가 학생회 정·부회장 선거 운동으로 집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인 것 같습니다. 그 때 나와 만났으면 문화부장 후보 단일화를 논의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 당시 수요문학회에서 주요 활동을 했었던 최병두로 단일화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후보로 출마하여 경쟁을 하지 않고, 만나지 못했다고 스스로 말없이 사퇴한 최병두의 속 깊은 마음이 짠하고 아련하게 다가옵니다.
최병두 카페지기를 떠올리게 하는 또 다른 장면이 나에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역시 카페지기가 2학년일 때 싸락눈이 흩날리는 공주시 봉황동 허름한 술집 안의 모습입니다. 연탄난로에서는 돼지 뼈다귀를 넣은 콩비지 찌개가 부글부글 끓고 있고, 이를 안주 삼아 카페지기 혼자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있는 장면입니다. 시인 윤석산이 운영하던 한일 인쇄소, 이 인쇄소에 필경사로 일하고 있던 카페지기가 운영의 어려움으로 문을 닫는다는 말을 전해듣고 싸락눈이 휘날리는 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앞으로의 생활을 걱정하는 장면입니다.(시집 ‘주신 사랑 영원히’ 발문에서)
암과 투병하고 있는 카페지기를 다소 나마 힘을 주고 위로하기 위하여 2011년 7월 19일 ‘병두 위문! 인천 방문’ 이라는 꼭지를 카페에 올렸었습니다. 그 때의 글을 인용합니다.(카페 곰나루21 618)
장마가 지나간 뒤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뙤약볕이 너무 뜨거워,
후드득 창문을 두드리는 작달비나
뭇매를 치듯 휘몰아치는 모다깃비가 벌써 그리워집니다.
항암제를 맞아가며 암과 투병하고 있는,
사십년지기 병두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되려고,
아래와 같이 병두와 점심을 같이 하면서 ,
부디 꼭 완치할 수 있도록 곰나루 회원 모두의 힘찬 응원을 보내려 합니다..
시간이 되는 고마들은 자리를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일박하지 않고 점심식사 후 귀가합니다.
- 일시 : 2011.07.21(목) 12시 30분.
- 장소 : 설악칡냉면(032-423-8882)
(인천시외버스터미날하차-관교초등학교옆)
-안내 : 임윤수(010-5593-1611)
회장님과 둘이서 카페지기를 만난 후 카페지기가 댓글을 쓴 ‘인천에서 또 만나 반갑고, 고맙고, 즐겁고- 사진 두어 장’을 인용합니다.(카페 곰나루21 620)
2011년 7월 21일 오후에 회장님과 윤수, 그리고 유경희와 병두 넷이서
인천 송도 유원지 뒷산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에 올랐습니다.
기념탑과 기념관 내를 구경하고, 인천 박물관을 관람한 뒤
월미도에 가서 유람선에서 쇼도 구경하고
강화도로 가서 회장님 장남 정현절 선생님께서 강화에서도 유명한 기와집의 붕어찜을 대접 받았어요.
회장님은 학술원 회원이시라는 박사 친구댁으로 가시고
남은 셋은 최병두 집(새로 이사했어요.)에 와서 정담 나누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22일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윤수는 청주 친구네 문상을 위해 청주로 떠났습니다.
만나 반갑고, 고맙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여러 친구들 기도 덕분에 건강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 또 감사드리며
열심히 건강 돌보며 살아가겠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다음 만날 날을 기다려봅니다.
복규 마음 잘 받았고,
준곤이 허리 빨리 쾌유하기를 빌고
수홍 형님도 늘 건강하시기 바라며
우리 친구들 모두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옛날은 가고 없어 그리움 남아,
찔레꽃 향으로, 뻐꾹새는 울어
몇 해 전인데 새롭습니다. 어언 망팔이 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