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를 받들어 선천을 계승한 마고성의 존재를
인류 앞에 최초로 알려주신 분은 신라의 충신 충렬공 박제상 선생이십니다.
충렬공은 꿈에서 금척을 신선으로 부터 받아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의 후예입니다.
당시 신라 눌지왕이 임금이 된 후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을 몹시
보고 싶어 했는데 충렬공은 명을 받아 먼저 고구려로 가서 복호를 구출해냈습니다
그리고는 가족들이 기다리는 양산의 집으로 배를 타고 오는 도중 다시 왜국으로
미사흔을 구하러 가라는 왕 명에 뱃머리를 돌려 자신을 손꼽아 기다리는 가족을
뒤로 한 채 일본 섬으로 향하게 됩니다.
당시 충렬공의 가족은 부인과 아기, 아영, 아경 3 녀와 겨우 5 살 된 막내 아들 문량
(백결선생)이었다고 하는데 집안의 대를 이을 귀한 자손을 내심 축원했을 아버지로서
얼마나 어린 아들이 보고 싶고 이내 못 잊으셨을까요...
그 애절했을 심정을 차마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충렬공께서는 비록 성인의 심법으로
나라를 위해 충절을 바쳤지만 한 분 인간이셨을 테니까요
그때 공은 이미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오기 어려움을 예견하고 왜의 보복을 피해 현재
박제상 유적지가 있는 울산 울주군 치산서원~ 치술령 산속으로 가족들을 피신시켜
달라는 부탁을 하고 떠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험난한 파도를 타고 왜에 도착한 공은 미사흔을 무사히 귀국시켰으나 일이 탄로나
붙잡혔고 자신의 신하가 되면 많은 상을 주겠다고 왜왕이 달랬지만 박제상은 끝내 신라
신하임을 맹세..왜왕은 심한 고문을 가해도 소용이 없자 그를 화형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들은 공의 부인은 딸들과 치술령에 올라 왜국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두 딸과 자진하여 죽었는데 그 몸은 돌로 변하여 망부석이 되고 그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가 은을암隱乙巖에 숨었다고 전합니다. 사람들은 충렬공의 부인을 치술
신모라 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사당자리에 치산서원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차차 재고해 보았으면 하는 점은 추정 14,000년 한민족 시원의 마고성
역사를 기록한 부도지를 지은 분이 박제상 선생인데요. 부도지가 일각에서 위서 논란과
정확한 근거가 없다하여 박제상 유적지의 관광 해설 내용에는 부도지를 지었다는 내용이
일절 언급되지 않으며 그 외 충렬공의 탁월한 면모와 위대한 업적이 되는 부분 [아직은 시기
상조라고 봅니다만]이 묻혀 있어 못내 아쉽습니다.
어언 1500 여년이 흐른 지금, 부도지에 소개된 마고성과 금척을 재발견하여 아름답고 장대한
천부 시원문화를 알아가고 마고대성의 실상을 알아가는 차제에 충렬공의 고단했을 충절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하루 아침에 불어닥친 천추에 여한으로 남을 비운을 새겨보면 무어라
위로와 감사를 드려야 할지요...
삼가 황궁씨 이래 오늘에 이르기 까지 역사상 천부 국통을 잇고
널리 사해의 백성을 이롭게 하고자 힘쓰고 헌신하셨던 선조 제위님들과 호국 영령들께
깊은 연민의 정으로 경의와 감사를 바치나이다. 저희 모두 감사합니다.
첫댓글 부도지는 신라사관으로 편찬된 책이다...북부여가 신라로 이어졌다는 책이다..그러나 북부여는 고구려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