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왜 왔니?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왜 왔니?’라고 시작하는 노래를 부르며 놀이를 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상대방은 ‘꽃을 찾으러 왔다’고 대답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누군가의 집에 방문할 때에는 특정한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떤 부자가 사는 집 대문 앞에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습니다. 라자로의 목적은 배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합니다. 사람들의 목적은 여러 가지입니다.
관광을 오기도 하고, 일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환대 받고, 또 어떤 이들은 라자로처럼 차별을 받습니다.
교황님은 이번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담화문에서 하느님 나라의 건설은
모든 이들을 필요로 하며, 그 누구도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힘없는 이주민과 난민들을 환대하고 보호하며,
사회 안에서 함께 성장하여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넘을 수 없는 간격은 또 다른 갈등과 단절을 일으킵니다. 복음의 마지막처럼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주민과 난민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그들을 배척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간격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은 환대하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라자로 옆에 아브라함과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사회의 불균형과 무관심은 다양성을 잃게 만들고, 폭력과 갈등으로 많은 이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습니다. 우리를 방문하는 많은 이들이 가진 소중한 가치와 능력들은
우리 사회 안에 모든 이들을 더 빛나게 할 수 있는 보물입니다. 우리 집에 온 이유를
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기 바라십니다.
우리의 자비로운 마음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이웃에게 스며듭니다.
분명히 우리 사회는 많은 갈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도성을 짓기 위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낮은 출산율과 초 고령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이미 많은 이주민들은 우리 사회의 작은 모퉁잇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퉁잇돌이 빠진다면 아름답게 건설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도성은
무너질 지도 모릅니다. 미래에 대한 준비를 우리는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미래는 바로 오늘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간격은 점점 멀어져 갑니다.
그것은 우리와 하느님의 간격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이 질문이 갈등을 만들어내는 질문이 아니라,
간격을 좁힐 수 있는 사랑과 관심의 질문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글 : 유상혁 세례자요한 신부 –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부캐 클라라
요즘 엠제트(MZ) 세대 사이에서는 ‘부캐’라는 단어가 인기가 많습니다.
본캐(본래 캐릭터)는 원래 본인이 가지고 있는 본래 자아를 말하고,
부캐(부가 캐릭터)는 본캐와는 다른 새로운 자아를 일컫습니다. 클라라가 성당에서는
저의 세례명이지만 지인들 사이에서는 저의 부캐를 클라라라고 말합니다.
별명처럼 불리는 클라라라는 부캐는 가톨릭평화방송에서 제작한 <성경원정대>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생긴 별명입니다.
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항상 제 기도를 들어주셨는데, 방송을 시작할 때부터
저는 저의 색깔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다양한 방송을 하고 싶다고 기도했습니다.
현재 정말 감사하게도 저만의 색깔을 잘 찾아 다양한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톨릭평화방송에서도 방송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곳에서 <성경원정대>라는 프로그램을 함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원정대>는 해당 방송사에서 처음 시도하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는데,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주일학교에 나가지 못하는 친구들을 위해서
성경원정대원들이 나서서 퀴즈를 풀고 대결을 해서,
이긴 팀의 본당에 간식을 배달해 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온전히 성경원정대 녹화를 위해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하루에 2편씩 촬영했고, 가톨릭평화방송 역사상 가장 많은 카메라와 인력을
동원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촬영에서 제작진과 출연진들 모두 손발을 맞추는 일이
수월하기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과 부딪히면서도
신앙 안에서 많은 대화와 같은 지향으로 함께 잘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신앙의 끈을 놓으려 할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신기하게 계속 그 끈을 놓지
못하도록 연결해 주셔서, 교사가 끝나고 나서는 복음화학교로 가게 하셨고,
방송을 하면서는 가톨릭계 방송을 할 수 있게 하셨고, 지금은 이렇게 주보에 글을
쓰도록 불러 주셨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봐도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함께 작용하게
하셔서 선으로 이끄신다는 말씀이 정말 맞다는 것을 살면서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허송연 클라라인 것을 제 주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성당에서는 당연한
세례명이 밖에서는 부캐 클라라라는 별명으로 성당에서보다 생활 속에서 더 많이
불리게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하느님의 딸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어서
불편함(?)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저 때문에 하느님을 잘못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더 조심하게 되고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한 번 더 불러주는 클라라라는 부캐 덕분에 저는 오늘도 생활 속에서
속상할 때는 주님께 하소연하고, 힘든 사람을 보면 내 일처럼 함께 슬퍼하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늘 좋게 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사람들에게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만 전하는 허송연 클라라로 살고 있습니다.
글; 허송연 클라라 /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