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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밑에 사는 사람들
인왕산은 그 독특한 바위와 풍광으로 예로부터 서울의 서북부 풍경을 상징하였다. 청음은 형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북악과 인왕산 아래에 터전을 마련하여 그 후손들이 20세기 초반까지 대를 이어 살았다. 조선 후기 명문가를 대표하는 이 집안은 현재의 청와대에서 옥인동까지 넓게 퍼진 곳을 터전으로 삼아 곳곳에 유적을 남겼다. 지금도 청운초등학교 옆 청운현대아파트의 큰 바위에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각자가 있다. 당시의 주소는 순화방(順化坊) 창의동(彰義洞) 청풍계(淸風溪)로 김상용의 집이 있던 곳이다.
북악과 인왕산은 저택의 뒷산이라 자주 올랐을 법하지만 놀랍게도 청음은 태어난 이래 45년 동안 한 번도 인왕산에 오르지 않았다. 늘 가까이 접하고 있기에 굳이 오를 필요가 없었노라고 핑계를 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뒷산을 한 번도 오르지 않은 것은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무심한 청음을 인왕산으로 이끈 것은 어머니의 병환이었다.
45세 때 올라간 인왕산
1614년 가을 그의 나이 45세에 어머니의 눈병에 인왕산 샘물이 효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형 김상용과 아들과 조카 둘을 데리고 약수를 뜨러 산에 올랐다. 산에 오른 동기치고는 멋스럽지 않다. 인왕동 초입에서 청음이 처음 맞닥뜨린 것은 중종 때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蘇世讓)의 옛 집터 청심당(淸心堂)이었다. 을씨년스러운 폐가 건물은 바로 영고성쇠의 감회를 자아냈다. 부귀를 누린 소세양은 건축에 안목이 있고 당대의 문인들과 친해 후세에 명성과 명작을 남길 법도 하건마는 그저 폐가만 남아 있다. 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훌륭한 삶으 로 뒷시대에 이름을 남길까? 청심당을 보니 문득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다.
청음이 청심당을 들르고 이태 뒤인 1616년에는 광해군이 여기에 왕기(王氣)가 있다 하여 인경궁(仁慶宮)을 지었다. 현재 자수궁터라는 표지석으로 기념하는 바로 그 곳이다. 소세양의 흔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여기서부터 천천히 산으로 올라갔다. 절벽의 폭포에서는 물을 뿌리고, 산언덕에는 푸른 이끼가 뒤덮였다. 가파른 돌길을 만나고부터 말을 내려 걸어서 올라갔다. 청풍계 골짜기로 들어섰다. 거기서 일행은 큰 바위 아래 흘러나오는 샘물을 발견하였다. 거기가 바로 약수가 영험하다는 샘물이었다. 수맥이 가늘어 천천히 채워지는 물을 떴다. 지금의 석굴암이 있는 장소로 무당이 치성을 드리는 기도처였다. 인왕산은 영험한 기도처로 알려져 현재도 곳곳에 기도하는 곳이 많은데 과거에도 마찬가지라 샘물 곁에는 지전(紙錢)이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청음은 석굴암 주위를 훑어보고서 옛날에 있었다는 인왕사(仁王寺) 터로 추정하였다. 조선 태조가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하고, 그 절로 인해 산을 인왕산이라 불렀다. 약수를 뜨고 나서 청음은 인왕산을 위로 아래로 둘러보고 다음과 같이 산을 품평하였다.
산은 바위 하나로 이루어져 산마루부터 중턱까지 높다란 석대와 가파른 바위,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와 첩첩한 절벽이 곧추서거나 옆으로 늘어서 있어서 올려다보면 병기를 세워놓고 갑옷을 쌓아둔 듯하여 기이하고 웅장한 그 모습은 형용이 어렵다. 산줄기가 이어져 묏부리가 되고, 묏부리들이 나눠져 골짜기를 이루었는데 골짜기마다 모두 샘이 있어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혀 수많은 옥돌이 쟁그랑거리듯 하니, 물과 바위의 경치가 참으로 도성 안에서 제일가는 곳이다.
평소에 듣고 생각하던 인상에다 직접 올라와서 본 것을 종합하여 인왕산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이처럼 평가하였다. 통바위로 이루어진 인왕산의 안팎 특징을 그리 많지 않은 언어로 잘 표현해내고 있다.
도성을 바라보다
그러나 청음은 가파른 정상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또 인왕산을 가로질러 난 성곽을 따라가보지도 못했다. 한양도성에서 가장 가파른 구간이 인왕산에서 북악 길이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마흔 중반의 나이에 노쇠함을 탓하며 가파른 성곽길을 오르지 못하고 탄식하는 청음을 보면 고금의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청음 일행은 도성을 제대로 조망하는 장소까지는 가지 못했다. 도회지 주변에 있는 산을 오르는 가장 흔한 목적은 도회지를 조망하는 것이었다. 샘물을 뜨기 위해 인왕산을 오른 것은 표면의 동기일 뿐, 진정한 동기는 바로 도성의 조망에 있었다. 청음 일행은 남쪽 봉우리 곧, 지금의 범바위라 하는 곳에 올라 도성을 내려다보았다.
도성을 조망한다면 대체로는 즐비한 여염집의 장관에 우람한 궁궐과 관아와 사대문, 그리고 종로를 비롯한 큰길의 인파와 남산과 북악 등의 산천을 보고 번화함에 감탄해야 옳다. 그러나 청음은 딴판이었다. 봉우리 아래 거대한 술창고를 보고 세상 사람을 술 취한 미친놈으로 만들까 우려했고, 남산에 구불구불 이어진 성곽을 보고 용이 누운 듯한 꼴에서 나라를 구할 와룡(臥龍) 선생이 그 아래 살고 있기를 바랐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3년이 지나 전쟁의 상흔도 아물고 남자만 해도 수십만 명이 되련만 임금을 요순 임금으로 만들 인재 하나 나오지 않았다고 푸념하였다. 폐허로 변해 잡초만 무성한 경복궁을 보고는 정궁을 저렇게 만든 것은 간신배의 소행이라 분노하였다.
서울의 장관과 화려함을 예찬하며 가슴 벅차하기는 커녕 오히려 걱정하고 분노하였다. 창덕궁의 장관도 그다지 즐겁지 않고, 웅장한 흥인문 안쪽 종로 거리를 오가는 인파도 이익만 좇는 사람뿐이라고 하였다. 멀리 불암산이 동쪽에 보여 남산과 북악, 인왕산과 함께 이 도성을 감싸고 지켜주면 좋을 텐데 혼자서 멀리 떨어져 앉아 아쉽다고만 하였다. 남들은 일부러라도 올라 도성의 장관을 구경하며 감탄할 바로 그 자리에서 청음은 탄식과 걱정만을 늘어놓았다. 40여 평생에 처음 올라 서울을 조망한 처지에서는 너무하지 않을까?
사대부의 걱정 어린 눈길
누군들 눈 아래 장관을 조망하며 찬탄을 호쾌하게 터트리고 싶지 않겠는가? 청음은 나라의 안위를 자기 일로 생각한 충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당시는 위태위태하고 조마조마한 광해군 치하를 살고 있었다. 왜란을 거쳐 안정을 찾아가는 서울을 한눈으로 내려다보며 기쁨보 다는 걱정이, 안도감보다는 불안감이 앞섰다. 풍경이란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달리 보인다. 도대체 인왕산 아래 서울을 누가 지켜야 하나? 수십만 도회민 가운데 나라를 구할 와룡 선생 제갈량(諸葛亮) 같은 인걸은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종로 큰길을 오가는 이들은 이익만을 뒤쫓고 있을 뿐, 나라를 걱정하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술이란 광약(狂藥)을 먹고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언제 다시 인왕산에 오를지 기약하지는 못하나 그날에는 오늘의 기분과는 전혀 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 남산 아래에 살던 신흠(申欽) 선생은 김포로 쫓겨나갔고, 필운산에 살던 백사 이항복 선생도 저 불암산 아래로 숨어버렸다. 청음도 사실은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인왕산 범바위에서 서울을 바라보는 청음의 가슴을 짓누르는 불안감은 결국 현실로 나타났다. 인조반정과 뒤이은 병자호란의 소용돌이에서 청음은 인왕산 아래에 편안히 살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