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 28일
LA 흑인폭동으로 58명 사망, 2천383명 부상
흑인폭동으로 건물들이 불타고 있다.
1992년 4월 29일부터 미국 LA지역을 무법천지로 몰아넣은 흑인폭동은 미국 사회의 암적 요소인 인종간 불평등과 상호갈등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LA 폭동은 ‘로드니 킹 사건’이 촉발했다. 흑인청년 로드니 킹을 백인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현장이 TV로 공개되면서 피소된 사건이다. 하지만 흑인은 한 명도 없이 백인 10명을 포함한 배심원 12명은 4월 29일 경찰관들에게 무죄 평결을 냈다.
이날 저녁부터 흑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주방위군 6000명과 연방군 1000명이 사태를 장악하기까지 58명이 사망하고 2,383명이 부상했으며 3010명이 연행됐다. LA 폭동은 근본적으로 백인 주류사회에 대한 증오의 폭발이었다. 인구 12%를 차지하는 흑인들은 열악한 생활여건에 시달려왔다. 흑인 가구당 수입은 미국 평균치의 60%밖에 안되고, 실업률은 2배를 넘었다. 25년 동안 공화당 행정부 아래 지속된 ‘가진 자만을 위한 보수적 인종정책’이 갈등을 부채질했다. 그로인해 교포들만 애꿎게 집중적인 화를 입었다. 재산피해 3억달러로 총 피해액 5억500만달러의 절반을 넘었다.
흑인촌도 불사하는 억척스러움이, 그리고 흑인촌에 코리아타운이 인접한 게 ‘죄’였다. 코리아타운은 폭도들에게 초토화됨으로써 북쪽 백인 주택가에 불똥이 튀지않게 하는 방화벽 구실을 했다. 미국 언론은 경찰력이 보호해주지 않는 가게를 지키려고 총격전도 불사하는 한인들을 클로스업하면서 사태를 한-흑갈등으로 보도하려는 경향마저 보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인사회의 성숙한 적응규범과 화합윤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반성을 일깨우기도 했다. 흑백갈등은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로 남아 있다.
[역사 파노라마] LA 흑인폭동
그 해, 오늘 무슨일이… 총42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