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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주덕읍 제내리 豊德마을을 방문했다. 제내리는 풍덕마을과 성동(聖洞)마을 두 마을로 나누어지는데 붙어있다. 2017년에 근처를 지나가다 멀리서 사진만 찍고 왔는데, 정작 비각은 훼손을 우려해 담장으로 둘러쳐져 접근할 수 없었다. 최근에 가보니 담장은 없어졌다. 그래도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게 만들었다.
《충주의 금석문, 2006년》에서 원문과 번역문을 옮겨 실었다. 그리고 표점정리하고 번역문을 새로 달았다. 잘못된 한자는 표시했다.
한문이 죽은 언어가 되면 곤란하다. 누군가 읽으라고 썼는데 언어장벽으로 편하게 읽지 못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漢文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의 책임이 큰데, 유감스럽지만 앞으로 그 분들의 자리가 좁아질 것이다.
막상 정리해보니 일부 한자를 제외하고는 그리 어려운 한문이 아니었다. 단, 족보를 옮겨온 듯한 인물들의 나열이 복잡했다. 지금 시점에서 외부인에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곳에 누대에 살았다는 전주이씨 집안 사람들에게 번역문은 반가울테고 옛날 비문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도 반가울 것이다.
성동(聖洞)을 발음하는대로 승동이라 썼다. 대소원면 성마루를 승마루라 부르는 것과 같다. 예전 농촌에서 4H활동을 하던 분들은 이제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에 접어들었다.
위 사진들은 2017년 8월 26일 찍은 것이다.
덕신초등학교는 2026년 현재 재학생수가 61명이라고 한다.
아래 사진들은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블로그에서 옮긴 것이다. 최근 사진들은 아니다.
<원문>
橫額 : 贈戶曹參判李公墓碣銘
縱額 : 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五衛都總府副總管李公墓碑銘幷序
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五衛都總府副總管李公墓碣銘 幷序
《贈戶曹參判李公墓碣銘》
山洞芳村古有厚德長者曰李公廷芝其人也 余亦累拜於席前知其有古人風今見家狀信然按公字聖瑞系出璿源太祖大王第一子鎭安大君諱芳雨九世孫也 曾祖諱義宗祖諱軾贈寺正 考諱德樑贈參議 妣草溪鄭氏諱德麟女也 公生於萬曆丙午六月十日 稟質忠懿性又篤孝自在幼稚曲有深愛雖閭里遊嬉之時反必拜見旣長務玆稼穡以厚奉養幹蠱大小少無貽憂於父母其孝友之行任恤之誼雖古人經生學士無以過之母夫人晚有奇疾積年沉痼公晝夜憂遑不解衣帶藥餌飲啖親自調嘗竟以甲戌夏棄世公於喪葬祭祀情文備至自合禮節一自喪慈之後專意於嚴侍衣服飲食之外起居凡百一毫無違先公安於忠養鰥居十八年絶無酸辛色丙子虜亂先公以爲渾眷不可團聚以當凶鋒分送別處獨與公奔竄又有叔父倚同居而不能自行公乃親策親騎遞負叔父內外趒亂於百里之外蔟足匍匐盡誠侍奉且爲壇於所寓之傍夜必泣禱以冀國亂易平老親速還此可見忠孝之根於性也難已返還廬復修舊業先公嘗有疾欲
嘗生鯉時久旱川竭無處可得公親往鯉潭力索不得中心悽惶只自號天還到中路忽然大雨霶沛川渠漲溢見有雙鯉齊首上灘公乃得歸人皆以爲孝感所致至于辛卯先公以天年終公之殮殯居瘠一如前喪有一中表久病內擁窮不自治公甚矜之躬駕迎歸以醫藥飲食之誠扶護厥疾得瘳且於賓客之奉務爲豐潔含杯慇懃傾囷廩人莫不以公爲歸非親舊素味亦然宅南有堤畔有路暮天炊煙行客蹰躇則公必迎入款遇若舊人無貴賤一視同仁一日偶沿前川至一成潭處畔有卓錫而不見蹤跡公甚恠之俯潭諦視則有一禿頭頹倒潭底公卽解衣挽出以視猶有生意以袖盛沙加之腹上移時得甦與之同歸將攝以送家頗豐殖田庄有裕量宜耕稼以濟家累餘分族鄰仕其農作亦不責稅內自至親外至鄰里喪病必救飢寒必周人之仰之者心醉而誠服不惟公袖長而善舞盖(蓋)其素性然也公年踰八旬以國家例恩陞堂上階又進嘉善 公旣耆艾而不以衰老自懈 日必盥
擳衣冠端坐終日 子孫少年或不盥不巾則公必峻責曰身無重慼且無疾病何乃囚首而至見長者乎 公之自警而警於人者如是 辛未夏因母夫人諱辰哀毀踰節氣之呻吟一旬 竟以七月八日考終 享年八十六 非有終身之慕者能若是乎 病中諄諄誡飭者敦親睦尙忠信恭謹不與人爭長競短以己餘無及焉 可謂知貽後之道也 葬于先公墓右 後以季子同樞公貴 贈參判 榮及三代 噫 以公之質之才 出而事君 則其於致身也 何有 卜子曰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言而有信 誰曰未學 吾必謂之學矣 者其在斯人歟 其在斯人歟 配長淵盧氏 忠秀女也 生質柔順 克承夫子之志 事舅姑奉祭祀 接賓客御婢僕 少無違德 實爲閨門之懿範 癸卯生 先公十四年而歿 與公合墓 視公秩贈貞夫人 後二十六年丙申移窆于公之舊宅後園艮坐原 又後八年甲辰以向背不利 稍上數步而改窆 即黃金谷堤內未向地也 有四男 長震昌 次震發耆職(원문에는 老로 써있으나 기직(耆職)이 맞다.)折衝 出繼 次震望先供早歿 次震說登武科 卒官同樞 次震郁 孫男世行 世術 世衍 世徹 女權一經 金翰里 長房出 世春 世夏 女吳錫周 朴齊亮 李世老 次房出 世逸 世遯 女朴弘道 三房出 世廸 世遇 世建 四房出 世榮 世文 震郁出 世行 男億休出繼 及二女 世術 男億煥 及三女 次男億秋一幼 四女 世衍 繼子億休 世徹 男億熙 及四女 世春 男億祚武科 億祿出繼 億祥 億福 次二幼 及二女 世夏 繼子億祿 世逸 男億烣 及一女 世遯 男女幼 世廸 男億亨 世建 男億壽 億耈 及一女 世榮 世文 各有男女 億年 男宗垕 億休 男宗鎭 宗安 億煥(원문에는 億壽煥인데 壽는 잘못 들어간 글자다.) 男宗城 宗坤 億熙 男幼 億祚 男宗俊 餘幼 億祿 三女幼 億恢 二男三女幼 億壽(원문에는 燾자이나 誤字다.) 男女幼 億亨 三男一女 幼內外曾玄男女摠二百餘人 噫 同樞公纘承先懿 言行可信 余常敬服而情最密 嘗謂余曰 先人有至德懿行不可泯滅 而子孫不大墓顔缺飾 幸君爲記一言 以爲地下重 余旣以諾之倏焉之間 同樞公亦不可復見 今於先公墓文之託 其何忍辭玆(원문에는 慈로 써있으나 誤字다.)敢撮其跡而爲之銘
銘曰
少焉躬稼以贍曾養 中以德施 惠及鄰黨 末乃壽考 命服煌煌 人曰夫公 食祿宜昌 孝思不匱 公有季子 推恩隆贈 泉塗亦侈况(況)復曾玄 旣多且盛 我撮其跡 以述銘章
崇禎 甲申後二 庚戌十二月 日
通訓大夫前行王子師傅 李世煥 撰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趙彥臣 書
通政大夫行忠原縣監兼春秋館編修官 鄭益河 篆
四庚子十一月 日 移豎
四癸丑二月 日 移豎
<표점>
橫額 : 贈戶曹參判李公墓碣銘
縱額 : 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五衛都總府副總管李公墓碑銘幷序
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五衛都總府副總管李公墓碣銘 幷序
《贈戶曹參判李公墓碣銘》
山洞芳村古有厚德長者,曰李公廷芝,其人也。余亦累拜於席前,知其有古人風。今見家狀,信然。按,公字聖瑞,系出璿源太祖大王第一子鎭安大君諱芳雨九世孫也。曾祖諱義宗,祖諱軾,贈寺正。考諱德樑,贈參議。妣草溪鄭氏,諱德麟女也。
公生於萬曆丙午六月十日。稟質忠懿,性又篤孝,自在幼稚,曲有深愛。雖閭里遊嬉之時,反必拜見。旣長,務玆稼穡,以厚奉養。幹蠱大小,少無貽憂於父母。其孝友之行、任恤之誼,雖古人經生學士,無以過之。母夫人晚有奇疾,積年沉痼,公晝夜憂遑,不解衣帶,藥餌飲啖,親自調嘗,竟以甲戌夏棄世。公於喪葬祭祀,情文備至,自合禮節。
一自喪慈之後,專意於嚴侍,衣服飲食之外,起居凡百,一毫無違,先公安於忠養。鰥居十八年,絶無酸辛色。丙子虜亂,先公以爲渾眷不可團聚以當凶鋒,分送別處,獨與公奔竄。又有叔父倚同居而不能自行,公乃親策親騎,遞負叔父,內外蔟亂於百里之外,蔟足匍匐,盡誠侍奉。且爲壇於所寓之傍,夜必泣禱,以冀國亂易平、老親速還,此可見忠孝之根於性也,難已。
返還廬復修舊業。先公嘗有疾,欲嘗生鯉,時久旱川竭,無處可得。公親往鯉潭,力索不得,中心悽惶,只自號天。還到中路,忽然大雨霶沛,川渠漲溢,見有雙鯉齊首上灘,公乃得歸。人皆以爲孝感所致。
至于辛卯,先公以天年終。公之殮殯居瘠,一如前喪。有一中表久病內擁,窮不自治,公甚矜之,躬駕迎歸,以醫藥飲食之誠扶護,厥疾得瘳。且於賓客之奉,務爲豐潔,含杯慇懃,傾囷廩,人莫不以公爲歸,非親舊素味亦然。宅南有堤,畔有路,暮天炊烟,行客蹰躇,則公必迎入款遇,若舊人,無貴賤一視同仁。
一日,偶沿前川至一成潭處,畔有卓錫而不見蹤跡,公甚恠之。俯潭諦視,則有一禿頭頹倒潭底,公卽解衣挽出以視,猶有生意,以袖盛沙加之腹上,移時得甦,與之同歸將攝以送。
家頗豐殖,田庄有裕,量宜耕稼,以濟家累,餘分族鄰。仕其農作,亦不責稅。內自至親,外至鄰里,喪病必救,飢寒必周,人之仰之者,心醉而誠服。不惟公袖長而善舞,盖(蓋)其素性然也。
公年踰八旬,以國家例恩陞堂上階,又進嘉善。公旣耆艾,而不以衰老自懈,日必盥擳衣冠,端坐終日。子孫少年或不盥不巾,則公必峻責曰:「身無重慼,且無疾病,何乃囚首而至見長者乎?」公之自警而警於人者如是。
辛未夏,因母夫人諱辰,哀毀踰節,氣之呻吟一旬,竟以七月八日考終,享年八十六。非有終身之慕者,能若是乎?病中諄諄誡飭者,敦親睦、尙忠信、恭謹、不與人爭長競短,以己餘無及焉,可謂知貽後之道也。
葬于先公墓右。後以季子同樞公貴,贈參判,榮及三代。
噫!以公之質之才,出而事君,則其於致身也,何有?卜子曰:「賢賢易色,事父母能竭其力,事君能致其身,與朋友交言而有信,誰曰未學?吾必謂之學矣。」者,其在斯人歟?其在斯人歟?
配長淵盧氏,忠秀女也。生質柔順,克承夫子之志,事舅姑、奉祭祀、接賓客、御婢僕,少無違德,實爲閨門之懿範。癸卯生,先公十四年而歿,與公合墓。視公秩,贈貞夫人。後二十六年丙申,移窆于公之舊宅後園艮坐原。又後八年甲辰,以向背不利,稍上數步而改窆,即黃金谷堤內未向地也。
有四男:長震昌,次震發(耆職折衝,出繼),次震望(先供早歿),次震說(登武科,卒官同樞),次震郁。 孫男:世行、世術、世衍、世徹、女權一經、金翰里(長房出);世春、世夏、女吳錫周、朴齊亮、李世老(次房出);世逸、世遯、女朴弘道(三房出);世廸、世遇、世建(四房出);世榮、世文(震郁出)。 世行男億休(出繼),及二女;世術男億煥,及三女;次男億秋一幼,四女;世衍繼子億休;世徹男億熙,及四女;世春男億祚(武科)、億祿(出繼)、億祥、億福,次二幼,及二女;世夏繼子億祿;世逸男億烣及一女;世遯男女幼;世廸男億亨;世建男億壽、億耈,及一女;世榮、世文各有男女。
億年男宗垕;億休男宗鎭、宗安;億煥 男宗城、宗坤;億熙男幼;億祚男宗俊,餘幼;億祿三女幼;億恢二男三女幼;億壽(원문에는 燾자이나 誤字다.)男女幼;億亨三男一女幼。內外曾玄男女摠二百餘人。
噫!同樞公纘承先懿,言行可信,余常敬服而情最密。嘗謂余曰:「先人有至德懿行,不可泯滅,而子孙不大墓顔缺飾,幸君爲記一言,以為地下重。」余旣以諾之,倏焉之間,同樞公亦不可復見。今於先公墓文之託,其何忍辭?玆敢撮其跡而爲之銘。
銘曰: 少焉躬稼,以贍曾養。 中以德施,惠及鄰黨。 末乃壽考,命服煌煌。 人曰夫公,食祿宜昌。 孝思不匱,公有季子。 推恩隆贈,泉塗亦侈。 况(況)複曾玄,旣多且盛。 我撮其跡,以述銘章。
崇禎 甲申後二 庚戌十二月 日 通訓大夫前行王子師傅 李世煥 撰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趙彥臣 書
通政大夫行忠原縣監兼春秋館編修官 鄭益河 篆
四庚子十一月 日 移豎
四癸丑二月 日 移豎
<번역문>
횡액(橫額, 가로 제목):
증 호조참판 이공 묘갈명 (贈戶曹參判李公墓碣銘)
종액(縱額, 세로 제목):
유명 조선국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이공 묘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五衛都總府副總管李公墓碑銘幷序)
[본문]
《유명 조선국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이공 묘갈명 병서》
《증 호조참판 이공 묘갈명》
산동(山洞, 산골) 방촌(芳村)에 옛날부터 덕이 두터운 장자(長者, 큰부자)가 있었으니, 이공(李公) 정지(廷芝)라는 분이 바로 그 사람이다. 나 역시 일찍이 그 분이 사시던 곳에 찾아가 여러 번 절하며 고인(古人)의 풍모가 있음을 알고 있었는데(余亦累拜於席前知其有古人風),
이제 가장(家狀)을 보니 참으로 그러하였다.
살펴보건대 공의 자(字)는 성서(聖瑞)이고, 본관은 전주(璿源, 왕실의 혈통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태조대왕의 첫째 아들인 진안대군(鎭安大君) 휘(諱) 방우(芳雨)의 9세손이다. 증조부의 휘는 의종(義宗)이고, 조부의 휘는 식(軾)으로 사복시 정(寺正)에 증직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덕량(德樑)으로 사헌부 집의(參議)에 증직되었고, 어머니는 초계 정씨(草溪 鄭氏)로 휘 덕린(德麟)의 딸이다.
공(公)은 만력 병오년(1606년) 6월 10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충성스럽고 의로웠으며 성품 또한 지극한 효성이 있어, 어릴 때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마을에서 놀 때에도 반드시 돌아와 부모를 뵙고 절하였다. 자라서는 농사에 힘써 부모를 두텁게 봉양하였으며,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능히 가다듬어 부모에게 조금도 근심을 남겨드리지 않았다. 그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과 남을 돕는 의리는 비록 옛 글 읽는 선비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 정씨 부인이 늙어 희귀한 병에 걸려 여러 해 동안 골수 깊이 병석에 눕게 되자(母夫人晚有奇疾積年沉痼), 공은 밤낮으로 근심하여 옷의 띠를 풀지 못하고 약과 음식, 먹거리를 친히 조리하고 맛보았으나 결국 갑술년(1634년)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공은 상장(喪葬)과 제사에 애통한 정과 예절을 구비하여 절절히 예법에 맞게 하였다.
어머니를 여읜 뒤로는 아버지(嚴侍)를 모시는 데에 전념하여, 의복과 음식 외에 일상생활의 모든 일을 한 치의 어긋남이 없게 하니, 선공(先公: 아버지)이 공의 충성스러운 봉양에 안도하였다. 홀로된 아버지가 홀로 거처한 18년 동안 조금도 찌푸리는 기색이 없었다.
병자호란(丙子虜亂, 1636년) 때 선공(先公)이 온 집안 식구가 한데 모여 칼날을 맞설 수는 없다 하여 여러 곳으로 나누어 보내고, 오직 공(公)과 함께 피란하였다.
또 동거하던 숙부가 병들어 스스로 행하지 못하자(有叔父倚同居而不能自行), 공은 친히 채찍을 잡고 말을 타며 숙부를 번갈아 짊어지고 안팎이 어지러운 백 리 길 밖으로 피란하면서 발을 부르트며 기어 다니듯 온 정성을 다해 모셨다.
또 피란지 옆에 단(壇)을 만들고 밤마다 눈물로 기도하며 국란이 어서 평정되고 늙은 부친이 속히 돌아가기를 바랐으니(國亂易平老親速還), 이로써 충효가 본성에 근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난리가 평정된 후 돌아와 옛 가업(舊業)을 다시 가꾸었다. 선공(부친)이 일찍이 병이 나 잉어(生鯉: 산 잉어)를 맛보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오랜 가뭄으로 시냇물이 말라 구할 곳이 없었다. 공이 친히 이담(鯉潭, 주덕읍지를 보면 아버지 이덕량이 감물면 주월리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괴산군 감물면에 이담리가 있다. 鯉潭을 꼭 감물면 이담으로 한정해서 볼 이유는 없다고 본다. 잉어소는 흔한 보통명사다.)으로 가서 애써 찾았으나 얻지 못해 마음속으로 슬프고 황망하여 오직 하늘을 바라보며 부르짖을 뿐이었다.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큰비가 쏟아져 시냇물이 넘쳐나더니, 잉어 한 쌍이 머리를 맞대고 여울을 올라오는 것이 보여 공이 마침내 가지고 돌아왔으니, 사람들 모두 효성에 감동하여 이루어진 일이라 하였다.
※효자전에 단골로 나오는 것이 잉어와 자라인데 전기문(傳記文)의 특성이다. 실제로 여울에 올라오는 잉어를 잡을 수도 있겠지만 작가(作家)의 입장에서는 무언가 효자임을 들어내야 하기에 소재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후손이 번성한 집안 인물의 비문이니 이왕이면 좋게 써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문을 써주었는데 그 집안에서 그냥 지나갈 수는 없는 일이고 사례하고 인사를 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글의 주인공인 李廷芝는 농사를 크게 짓고 집안을 일으킨 입지전적인 인물임에 틀림없고 국량(局量)이 큰 인물이었을 것이다. 農事를 크게 지은 인물이면 사물의 이치나 세상물정에 무지할 수는 없는 법이고 이재(理財)에 밝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
신묘년(1651년)에 이르러 선공(先公, 부친)이 천수(天壽, 天年終)를 다하고 돌아가셨다. 공이 염습하고 빈소를 지키며 몸이 마르도록 슬퍼함은 전 상사 때와 똑같았다(公之殮殯居瘠一如前喪).
어느 외사촌 하나가 오랜 병으로 몸을 가누지 못해 가난하여 스스로 치료하지 못하자, 공이 매우 불쌍히 여겨 직접 수레를 끌고 와 모셔온 뒤 의약과 음식으로 정성을 다해 간호하여 그 병을 낫게 하였다.(有一中表久病內擁窮不自治公甚矜之躬駕迎歸以醫藥飲食之誠扶護厥疾得瘳, 中表의 中은 고모의 자녀를 뜻하는 內表를 의미하고, 表는 외삼촌이나 이모의 자녀는 外表를 의미한다. 고모나 외가쪽 사촌 친척을 통틀어 中表라 한다.)
또 손님을 대접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풍성하고 깨끗하게 하여, 잔을 건네며 은근히 정을 나누고 곳간을 털어 대접하니, 공에게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친척이나 오랜 친구가 아닌 낯선 사람에게도 역시 그러하였다.
집 남쪽에 둑이 있고 둑 옆에 길이 있어, 날이 저물어 밥 짓는 연기가 날 때 나그네가 주저하고 있으면, 공은 반드시 맞이하여 마치 옛 친구처럼 정성껏 대접하였으며, 귀천을 따지지 않고 일시동인(一視同仁,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고 공평하게 대한다는 뜻.)으로 대하였다.
하루는 우연히 앞 시냇가를 따라 물웅덩이가 형성된 곳에 이르렀는데, 언덕 위에 지팡이(卓錫, 탁석은 錫杖을 세워 놓는다는 뜻. 불교에서 나온 말.)가 놓여 있으나 사람의 자취는 보이지 않아 공이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연못을 굽어 자세히 살펴보니 어떤 스님이 연못 바닥에 넘어져 누워 있었다. 공이 즉시 옷을 벗고 건져내어 보니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지라, 소매에 모래를 담아 배 위에 얹어두니 시간이 지나 소생하였다. 그를 함께 집으로 데려와 음식을 대접하고 보호하여 보내주었다.
집안이 자못 넉넉해지고 전답에 여유가 생기자, 형편에 맞게 농사를 지어 가계의 어려움을 돕고 남은 것은 친족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소작농(佃戶, 佃農)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면서도 세금을 억지로 독촉하지 않았고(仕其農作亦不責稅), 안으로는 지친(至親)으로부터 밖으로는 이웃에 이르기까지 상사나 질병이 있으면 반드시 구제하고 굶주림과 추위는 반드시 돌보아주니, 사람들이 흠모하여 마음으로 감복하였다. 이는 단지 공이 완숙한 능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公袖長而善舞, 韓非子의 長袖善舞에서 나온 말), 대개 그 본성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공의 나이 80세가 넘자 국가의 예우에 따라 당상관 계급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공은 이미 늙었음에도 쇠약하다 하여 스스로 게을리하지 않고, 매일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한 뒤 하루 종일 정좌하였다. 자손들 중 젊은이가 혹은 세수를 하지 않거나 두건을 쓰지 않으면 공이 반드시 엄하게 책망하며 말하기를, "몸에 중한 근심이 없고 또한 질병이 없는데 어찌 머리를 더럽게 하고(囚首, 죄수의 머리) 장자(長者)를 뵈러 오느냐?" 하였으니, 공이 스스로를 경계하고 남을 경계함이 이와 같았다.
신미년(1691년) 여름, 어머니 정씨 부인의 기일을 맞아 애통해함이 예절을 넘어서 숨을 헐떡이며 열흘 동안 신음하다가, 마침내 7월 8일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 86세였다. 평생 동안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병석에서 간곡하게 경계하고 정성을 다한 것은 친족 간에 두텁게 화목하고 충성과 신의를 숭상하며, 공손하고 침착하여 남과 더불어 잘남과 못남을 다투지 말라는 것이었으니, 자손에게 후세를 물려주는 도리를 아는 분이라 이를 만하다.
선공(아버지)의 무덤 오른쪽에 하장(下葬)하였다(葬于先公墓右). 후에 셋째 아들 동추공(同樞公)의 귀함으로 인하여 참판에 증직되니, 영광이 3대에 미쳤다.
아! 공의 바탕과 재주로 세상에 나아가 임금을 섬겼다면 그 몸을 바침에 있어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복자(卜子: 자하)가 이르기를 "현인(賢人)을 존경하되 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꾸며,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고, 임금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바치며, 친구와 교유함에 말이 신의가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말하리라" 한 것이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논어(論語)》 〈학이(學而)〉 편 제7장에 나오는 자하(子夏, 卜商)의 구절이다.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배위(配位)는 장연 노씨(長淵盧氏)로 충수(忠秀)의 딸이다. 타고난 성품이 부드럽고 순종하여 남편의 뜻을 잘 따랐으며, 시부모를 섬기고 제사를 받들며 손님을 맞이하고 (奉祭祀 接賓客, 봉제사 접빈객이 宗家집 宗婦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한다.) 노비를 부림에 조금도 덕에 위배됨이 없었으니, 실로 집안의 모범이 되었다. 계묘년(1603년)에 태어나 선공(남편)이 죽은지(1691년) 14년 후에 죽어 공과 합장하였다. 공의 품계에 따라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그 후 26년 뒤인 병신년(1716년)에 공의 옛 집 후원 간좌(艮坐: 북동향) 언덕으로 이장하였다가, 또 그 후 8년 뒤인 갑진년(1724년)에 좌향(坐向)이 불리하다 하여 약간 위쪽으로 몇 걸음 옮겨 개장하였으니, 곧 황금곡(黃金谷) 제방 안쪽 미향(未向: 남서향)의 땅이다.
4남(총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원문에는 4남으로 써있다. 진창, 진발, 진망, 진열, 진욱. 震發이 出係(養子로 들어 갔기 때문에 제외한 것 같다.)을 두었으니, 장남은 진창(震昌)이고, 다음은 진발(震發: 기직 절충장군으로 출계함)이며, 다음은 진망(震望: 선공보다 먼저 일찍 죽음)이고, 다음은 진열(震說: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동추에 만료됨)이며, 다음은 진욱(震郁)이다.
손자는 세행(世行)·세술(世術)·세연(世衍)·세철(世徹)이며, 딸은 권일경(權一經)·김한리(金翰里)에게 시집갔다(이상 장남 진창의 소출).
세춘(世春)·세하(世夏)이며, 딸은 오석주(吳錫周)·박제량(朴齊亮)·이세로(李世老)에게 시집갔다(이상 차남 진발의 소출).
세일(世逸)·세둔(世遯)이며, 딸은 박홍도(朴弘道)에게 시집갔다(이상 3남 진망의 소출).
세적(世廸)·세우(世遇)·세건(世建)이다(이상 4남 진열의 소출).
세영(世榮)·세문(世文)이다(이상 진욱의 소출).
세행의 아들은 억휴(億休: 출계함)이고 딸이 둘이다. 세술의 아들은 억환(億煥)이고 딸이 셋이며, 둘째 아들 억추(億秋)는 어리고 딸이 넷이다. 세연의 계자는 억휴(億休)이다. 세철의 아들은 억희(億熙)이고 딸이 넷이다.
세춘의 아들은 억조(億祚: 무과)·억록(億祿: 출계함)·억상(億祥)·억복(億福)이며, 그 다음 둘은 어리고 딸이 둘이다. 세하의 계자는 억록(億祿)이다.
세일의 아들은 억회(億恢)이고 딸이 하나이다. 세둔의 아들과 딸은 어리다.
세적의 아들은 억형(億亨)이다. 세건의 아들은 억수(億壽)·억구(億耈)이고 딸이 하나이다.
세영과 세문은 각각 남녀 자식이 있다.
억년의 아들은 종후(宗垕)이다.
억휴의 아들은 종진(宗鎭)·종안(宗安)이다. 억환의 아들은 종성(宗城)·종곤(宗坤)이다. 억희의 아들은 어리다. 억조의 아들은 종준(宗俊)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억록의 세 딸은 어리다. 억회의 두 아들과 세 딸은 어리다. 억수의 남녀 자식은 어리다. 억형의 세 아들과 한 딸은 어리다. 내외 증손과 현손 남녀를 합치면 모두 200여 명이다.
아! 동추공(同樞公: 넷째 아들 진열)이 선대의 아름다운 덕을 이어서 행실과 말이 신실하니, 내가 항상 경복(敬服)하여 사귐의 정이 가장 밀접하였다.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선친께 지극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어 사라지게 할 수 없는데, 자손이 번창하지 못하여 묘갈의 단장을 결여하였습니다. 바라건대 그대가 한 말씀 글을 지어 지하의 영혼을 빛나게 해주시오" 하였다. 내가 이미 승낙하였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동추공 또한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선공의 묘갈문을 부탁받았으니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이에 감히 그 자취를 모아 명(銘)을 짓는다.
[명문 (銘文)]
젊어서는 친히 농사지어 어버이를 봉양하고, 중년에는 덕을 베풀어 혜택이 이웃에 미쳤도다. 말년에는 장수하여 관복이 찬란하니, 사람들이 말하길 "공은 벼슬과 복을 누림이 마땅하다" 하였네. 효성이 끊이지 않더니 공에게 셋째(막내) 아들이 있어, 은혜를 미루어 높은 직급을 증직 받으니 저승길 또한 화려하도다. 하물며 증손과 현손이 이미 많고 번창함에랴, 내가 그 자취를 모아 이 명장(銘章)을 서술하노라.
숭정 갑신후 두 번째 경술년(1710년, 숙종 36년) 12월 일 통훈대부 전 행왕자사부 이세환(李世煥) 글을 지음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조언신(趙彥臣) 글씨를 씀
통정대부 행충원현감 겸 춘추관편수관 정익하(鄭益河) 전액을 씀.
경자년(1720년) 11월 일 옮겨 세움.
계축년(1733년) 2월 일 옮겨 세움.
《충주의 금석문》
<번역문>
유명 조선국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리공 묘갈명 병서
산골방촌에 예전에 후덕한 장자가 있으니, 말하기를 리공 정자 지자 그 분이시니, 나도 또한 여러 번 자리에 절하고 보여서 그분에게 고인의 풍채가 있음을 알았더니 이제 행장을 보니 징험할 수가 있었다.
공의 자는 성자 서자시요, 선원으로 이어 나오시고 태조대왕 제일 남이신 진안대군 휘는 방자우자의 구세손이시라. 증조의 휘는 의자 종자시요, 조부의 휘는 식자시요, 사복시정을 증직 받으셨고, 고의 휘는 덕자양자시니, 참의로 증직을 받으셨고, 비는 초계정씨시니, 휘는 덕자 인자의 따님이시라.
공은 만력 병오 유월 십일에 출생하였다. 천품이 충성스럽고 아름다우시며 천성이 또한 효를 두터이 하시어 어릴 때로부터 극진히 깊이 사랑함이 있으시어 비록 동리에서 놀 때에도 돌아오시면 반드시 절하고 보였으며, 이미 장성하사 농사에 힘쓰시어 봉양을 두터이 하시고, 대소사를 주관하사 부모님께 근심을 끼치지 않으시고, 그 효우의 행실과 애휼하는 의가 비록 고인과 도학군자라도 지날 수 없으며, 어머니께서 늦게 기이한 병이 있으시어 여러 해 고질병으로 고생을 하시자, 공은 낮과 밤으로 근심이 가득하여 의대를 풀지 않으시고 약을 친히 맛보시고 드리시더니 갑술년 여름에 돌아가셨는지라, 공은 상례 제례에 정문을 갖추어 예절에 부합하였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효의 뜻을 아버지께 쏟으시어 의복이나 음식이외에도 기거범백(起居凡百)을 일호도 어김없이 하여 충실한 효양에 아버님이 편하시고, 십팔 년 동안 환거로 계시면서 절대 괴로운 빛이 없이 지내시었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아버님이 말씀하시길 식솔이 한군데 있다가 침변을 당할 수는 없다 하시고 여러 곳으로 나누어 보내실 새 공에게 홀로 피난 가길 명하시거늘 또 숙부가 있어 같이 사시다가 능히 행보를 못하시는지라 공은 친히 부축해서 숙부 내외분을 번갈아 업어 백리 밖으로 피난가실 때 발이 부르트고 포복을 하시며 정성을 다해 봉양했으며 또 단을 나그네집의 곁에 만들고 밤이면 반드시 울며 빌기를 국란이 쉬이 평정이 되어 노친께서 속히 돌아오시길 바라였다.
이는 가히 충효에 근원이 천성적임을 봄이라 난리가 평정되고 집으로 돌아오시어 다시 구업을 닦고 아버님이 일찍 병환이 있으시니 산 잉어를 잡수시고 싶다 하심에 때가 오랜 가뭄으로 냇물이 말라 얻을 곳이 없으므로 공은 친히 잉어못에 가서 힘써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마음이 처량하여 다만 하늘에 부르짖고 돌아오시는 도중에 홀연 큰비가 쏟아져 냇물이 창일 한지라 보니 한 쌍의 잉어가 물길을 쫓아 올라오는지라 잡아서 돌아오시니 동리 사람들이 효감소치(孝感所致)라 일컬었다.
신묘년을 당하여 아버님이 천명으로 돌아가시니 상례 제례에 임하심이 어머니상 때와 같았다. 또 내외종이 오랜 내종병을 앓고 있을 때 궁핍하여 능히 치료치 못하고 있으므로 공은 심히 측은히 여겨 몸소 가서 맞아드리고 의약과 음식을 정성으로 간호하여 병을 낫게 했으며, 빈객 대접하기를 넉넉하면서 깔끔하게 하니 궁핍한 사람이 공에게로 가지 않은 사람이 없고, 친구가 아닐지라도 대접을 역시 그렇게 하였으며, 집의 남쪽 언덕위에 길이 있어 저녁때 행객이 주저하면 공은 반드시 맞아드려 관대히 대접하고, 친구 귀천을 막론하고 인의를 베풀었다.
하루는 냇물을 따라 한 못을 이룬 곳에 이르니 둑에 지팡이만 있고 사람의 종적이 없는지라 공이 심이 괴이 여기어 못에 꾸부려 자세히 본즉 중이 물에 빠져 거꾸로 박힌지라 공은 곧 옷을 벗고 들어 가 꺼내보니 숨결이 있음 즉 하여, 옷소매로써 모래를 담아 배위를 눌러주니 조금 있다가 소생하였다. 엎고 집으로 돌아와 구원해서 보냈다.
전장을 많이 장만하여 많은 수확을 얻어 호구를 하고, 남은 곡식은 종족이나 이웃의 곤궁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고, 농사를 지음에 세금이 많다고 책을 아니 하였으며 친척으로부터 이웃 동리까지 초상이나 병환을 반드시 구해주며 굶주린 사람을 구제해서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진실로 복종하니, 공은 오지랖이 넓어 그러한 것이 아니고 천성이 본래 그러하다고 칭송하였다.
공의 연세 팔순이 넘어서 국가의 범례로 당상직의 증직을 받으시고, 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려주었다. 공은 이미 칠팔십이 되어 노쇠하다하여 스스로 게을리 아니하시고 매일 세수하고 머리 빗으시며 의관을 정제히 하고 종일 단정히 앉자 자손 중 젊은이가 혹 세수를 않고 의관을 않으면 공이 준엄히 꾸짖어 말씀하시길 몸에 중한 슬픔이 없고 또한 질병이 없는 한 어찌 죄수처럼 어른을 뵈느냐 하시며 호령하시고 공이 스스로 깨우친바 남을 깨우친 자 또한 이와 같음이라.
신미년 여름에 모부인 돌아가신 날을 임하여 슬퍼하심이 과도하시다가 기력이 떨어지어 신음하신지 열흘만에 마침내 칠월 팔일에 돌아가시니 수는 여든 여섯이라 종시토록 부모를 생각지 않는 자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을 것인가?
병환 중에도 자손을 경계해 훈계하시길 종족의 친목을 두터이 하고 충성되어 믿음직하고 공손하고 삼가함을 숭상하여 남과 더불어 길고 짧은 것을 다투지 말라 하셨다. 여훈이 미칠 수 없으나 가히 후손에게 훈계하는 도를 아심이라 이를 것이다.
선공의 묘 오른쪽 뒤에 장사지냈으며 끝의 아들 동추공이 귀함으로써 참판에 증직을 받으시고 영화가 삼대에 미침이라, 슬프다 공의 재질로 인군을 섬긴즉 그 몸을 이루었으리라.
자하 가로대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기를 색 바뀌듯 하고 부모 섬기기를 능히 그 힘을 다하고 인군 섬기기를 능히 그 몸을 이루고 붕우와 더불어 사귐에 있어 믿음이 있으면 비록 가로대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 이르리라 한자 어딘가 있으니 이분에게 있으며 이분에게 있음인 저 배위는 장연노씨시니 충자 수자의 따님이시다. 출생하시어 천성이 유순하사 능히 남편의 뜻을 이어 받들며, 시부모를 섬기고 제사를 받들고 빈객을 대접하고 노복을 거느림에 조금도 덕에 어김이 없으며 실로 규문의 아름다운 법이 되었다.
신묘년 출생하고 공보다 십사년 먼저 돌아가셨다. 산소는 후에 공과 합묘하였고, 공의 관직을 보아 정부인을 증직하여 내리었다. 공이 돌아가신 뒤 이십육년 되던 해 병신년에 공의 구택 후원 간좌 언덕에 면봉 하였다가 또 팔년 뒤인 갑진년에 향배가 이롭지 못하다 하여 두어 발짝 올려서 면봉 해드리니 곧 방죽안 뒤 축좌 미향이다.
사남을 두셨으니 장남은 진자 창자시고 차남은 진자 발자시니 노직으로 절충장군이신데 출계를 하시고 삼남은 진자 망자시니 공보다 먼저 조졸하시고 사남에 진자 열자시니 무과에 등과하여 동추 벼슬을 하시고, 일자는 진자 욱자시라.
손자에 세자행자 세자술자 세자연자 세자철자 여에 권일경씨 김한 리장씨는 진자창자에서 낳고, 세자춘자 세자하자 여에 오석주씨 박제양씨 이세노씨는 진자발자에서 낳고, 세자일자 세자둔자 여에 박홍도씨는 진자망자에 사위요, 세자적자 세자우자 세자건자는 진자열자에서 낳고, 세자영자 세자문자는 진자욱자에서 낳았다. 세자행자의 남은 억자년자 억자휴자는 출계를 하고 두따님이 있었고, 세자술자의 남은 일남에 억자 환자 및 삼녀와 이남에 억자 추자와 삼남은 어리고 사녀를 두었고, 세자연자는 계자에 억자휴자요 세자 철자는 억자 희자와 사녀를 두시고 세리 춘자는 일남에 억자조자니 무과를 하시고 이남억자록자는 출계를 하고 억자상자 억자복자 밑으로 두 어린이와 두 딸이 있으며 세자하자는 계자 억자록자요 세자일자는 남에 억자회자 및 일녀요 세자둔자는 남녀가 어리고 세자적자는 억자도자 및 이녀를 두고 세자우자는 남에 억자형자요 세자건자는 남에 억자수자와 억자구자 및 일녀요 세자영자 세자문자는 각각 남녀를 두었다. 억자연자의 남은 종자구자요 억자 휴자 남은 종자진자 종자안자요 억자환자의 남은 종자성자 종자곤자요 억자희자의남은 어리고 억자조자의 남은 종자준자며 나머지는 어리며 억자록자는 삼녀와 어린이요 억자희자는 이남삼녀가 어리고 억자도자는 남녀가 어리고 억자형자는 삼남일녀가 어리고 내외 증손현손 남녀가 총이백여인이다.
슬프다 동추공이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르고 이어서 언행이 가히 믿음직 한지라 내가 항상 공경하고 복종해서 정의가 가장 친밀함으로 일찍이 나더러 일러 가로대 선인의 지극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음을 가히 멸하지 못할것이 거늘 자손이 크지 못하여 산소를 수칙함이 부족했더니 그대가 한말을 기록해서 지하에 중하게 됨을 바라노라 하거늘 내 이미 허락했더니 홀연히 동추공이 또한 가히 다시 보지 못함이라
이제 선공 묘문을 부탁하니 그 어찌 차마 사양하리요. 감히 그 자취를 모아 명을 하니 명에 가로대 젊어서는 몸소 농사지어 증자의 봉양을 이루었고 중년에는 덕으로써 향당에 은혜를 베풀었으며 말년에 수를하사 사대부의 옷이 빛나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무릇 공은 식록이 마땅히 창성하고 효의 생각이 다하지않아서 공의 끝에 아들이 있으사 나라 은혜로 높으심으로 구천길에 또한 높은 증직을 받아 황천길이 화려했으며 하물며 다시 증손 현손이 이미 많고 또한 착하도다 내가 그 자취를 모아 써서 명을 지어 밝히노라.
숭정 갑신후 둘째 경술년 십이월 일
통훈대부 전 행왕자사부 이세환 짓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조언신 쓰고
통훈대부 행 충원현감 겸 춘추관 편수관 정익하는 전하다
넷째 경자 십이월 일 옮겨 세우고
넷째 계축 이월 일 옮겨 세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