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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금요일. - 고립이 아니라 고독을 사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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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사순 제5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고립이 아니라 고독을 사는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예언자 예레미야와 주님은 반대자들에게 둘러싸이고,
박해자들로부터 죽임당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마르고 미싸빕'이 뜻하듯 예레미야는 완전 사면초가이고, 고립 상태입니다.
주님도 지금은 제자들이 옆에 있지만, 곧 사면초가, 고립 상태가 될 것입니다.
고립이란 고독과 다릅니다.
고립이 물리적, 심리적, 정신적으로 외부와 단절된 폐쇄 상태를 뜻한다면
고독은 관계가 단절된 상태가 아니더라도 곧 내 옆에 누가 있더라도
혼자인 상태이거나 혼자임을 느끼는 상태를 뜻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처럼 깨달은 사람이나 심리 정신적으로 강건한 사람은
옆에 사람이 많거나 적거나 본래 나는 혼자라는 것을 알고
고립을 살지 않고 절대고독을 살아낼 줄 알지요.
그렇습니다.
자폐적 고립이든 집단 따돌림에 의한 고립이든 우리는 고립을 살지 말아야 하지만
고독은 고독할 줄 모르고 고독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니 살아야 하고,
특히 신앙인인 우리는 영적인 의미의 고독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고독이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고독이요 하느님을 만나는 고독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레미야나 주님처럼 반대자에게 포위되었을 때
그리고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과는 단절되었을 때
고립되지 말고 영적 고독으로 승화해야 할 것입니다.
반대자의 포위가 좁혀올 때 하늘로 오르는 것이지요.
전후좌우가 막히면 위로 뚫고 올라야 하듯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주님처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고,
예레미야처럼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곁에 계심을” 느끼며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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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구원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탓하지 않고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게 됩니다. 남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기보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성찰합니다. 그야말로 회개의 삶을 삽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인 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에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1,4).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분명,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한다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이요, 신입니다’(요한10,35). 주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을 하시되 우리를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고 희망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 하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장가간 아들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요, 며느리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요, 딸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랍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여야 하지만 마음과 같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느님과의 관계는 얼마나 어려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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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성전 봉헌축일 때, 솔로몬 주랑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의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시오.”(요한 10,24)라는 질문에 대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예수님의 증언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돌로 치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이는 ‘아버지의 일’과 ‘예수님의 일’이 같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을 북돋우고 창조를 완성해 가는 일이요,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믿게 되면, 곧 사랑을 완성해가는 이 일을 믿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0,38).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아는 바를 받아들여 체험하여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안에 내재할 때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이들 안에서 말씀이 되는 일, 곧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사랑이신 말씀을 받아 사랑을 완성해 가고, 생명이신 말씀을 받아 생명을 완성해 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느님이 됩니다. 이를 흔히 ‘신화’(θεοσισ)라고 합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하신 “폐기 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36)라는 말씀을 비추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이 될 것이요, 마귀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는 마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누구의 말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모독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들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따름으로써 하느님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 말씀을 따름 안에서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한다.”(요한 10,34)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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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앙은 두 개의 날개가 있어야 건강합니다. 신앙은 두 개의 날개가 기쁜 소식이 됩니다. 신앙은 두 개의 날개가 있어야 신비가 됩니다. 하나는 ‘이성(理性)’입니다. 이성은 물을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이성은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신앙에서 이성은 교리가 되고, 제도가 되고, 신학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를 비롯해서 교부들은 신앙을 위한 이성의 탑을 굳건하게 세웠습니다. 저도 신학교에서 신앙을 위한 이성을 배웠습니다. 철학, 심리학, 인간학은 이성을 다지는 학문입니다. 성서신학, 윤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 교의신학, 교회법, 사목신학은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는 학문입니다. 이성은 냉철해서 마치 얼음과 같습니다. 이성은 나무의 뿌리와 같아서 유혹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성이 결여된 신앙은 자칫 광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성이 결여된 신앙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유혹의 바람이 불면 쉽게 무너지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감성(感性)’입니다. 감성은 이성이라는 그릇에 담긴 물과 같습니다. 감성은 이성의 ‘틀’을 넘어서는 성령의 이끄심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성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성으로도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감성은 ‘표징’이 되었습니다. 이성의 눈으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을 밝히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성의 눈으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는 것을 밝히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성의 눈으로 물위를 걷는 예수님의 모습을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이성의 눈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 태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은 이성의 힘으로는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감성은 ‘믿음’의 다른 말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이성의 ‘틀’을 넘어서는 것을 뜻합니다.
꽃동네에서 주관하는 피정에 함께 했습니다. 묵주기도, 찬양, 강의, 미사가 있었습니다. 미사 중에 성령께 청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기도를 주관하였습니다. 저도 함께 안수를 하였습니다. 강의 때와는 다른 모습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언어로 기도하면서 많은 분들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이티에서 살고 있는 신부님은 수녀님, 수사님과 함께 매주 성령기도회를 한다고 합니다. 성령께 청하지 않으면 아이티에서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렵다고 합니다. 사탄은 이성의 힘으로 아이티를 떠나야하는 이유를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매주 성령기도회를 하지 않았으면 10년 넘게 아이티에 머무는 것은 고통의 바다에 떠 있는 것 같았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300명의 꽃동네 가족들을 생각하며 힘을 낸다고 합니다. 피부병에 걸려서 온 몸이 짓무른 환자를 옮기면서 피부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나는 피부병에 걸려도 좋으니 고통 중에 있는 저 환자를 하느님의 품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였다고 합니다. 나의 신앙이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이루는 신앙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는 사람들에 의해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려던 예레미야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예레미야의 모습은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려야 했던 예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하는 일들이라도 믿어 주십시오.’ 그러나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검찰과 판사가 되어서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리려고 합니다. 이들이 부당하게 예수님을 고발하고 재판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군중들의 무관심도 한 몫을 하였습니다. 내가 하는 자선, 희생, 선행은 힘이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하는 나눔, 사랑, 봉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 발, 가슴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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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학창 시절 저의 지구력은 형편없었습니다. 단거리 달리기는 반 계주 대표로 나갈 만큼 빨랐지만, 1Km 이상은 좋은 성적을 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 포기하지 않고 완주했던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한 뒤, 학교 축제 때 마라톤 경기가 있었습니다. 전교생이 예외 없이 참석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또 5등까지 주어지는 상품도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장거리 달리기에서 좋은 성적을 얻는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마라톤이 시작되었습니다. 완주만 해도 성공했다고 생각하면서 나름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열심히 달렸습니다. 이제 마지막 코스만 돌면 결승선이었습니다. 완주했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아직도 힘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성적은 좋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5등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상도 없으니 속도를 줄여 그냥 걸었습니다. 몇 명이 저를 앞질러 갔습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습니다. 저의 목표는 완주였기 때문입니다.
결승선에 도착했습니다. 결승선에서는 들어온 순서에 맞춰서 등수를 알려주었습니다. 글쎄 저의 등수가 8등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코스 전에 제 앞으로 많은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끝까지 열심히 달렸으면 충분히 5등 안에도 들어올 수 있었는데 포기했던 것입니다.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레짐작으로 이제 틀렸다고 판단하면서 포기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판단만을 내세워서 포기합니다. 어떻게든 힘을 내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때, 쉽게 포기하고 할 수 없음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포기하지 않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포기해야 하는 이유만을 찾습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유다인들의 감정이 점점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즉,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의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인 동시에 하느님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토록 하느님을 찾았고, 메시아가 오시길 간절하게 빌었으면서도, 예수님을 보고서는 그 간절함을 포기합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했기에, 예수님을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믿음으로만 하느님의 이 놀라운 신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세상의 관점만을 내세우면서 주님을 보고도 쉽게 포기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보고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관점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믿음을 갖춘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 찾기를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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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랑의 치료 약은 없다(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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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자녀답게-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시편18,2)
오늘은 성요셉성월, 3월의 끝날이자 내일은 4월의 첫날입니다. 끝은 늘 새로운 시작임을 배웁니다.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만개하기 시작한 파스카의 봄꽃들이 벌써 주님 부활을 앞당겨 경축하는 축제 분위기의 날들입니다.
진리 탐구에 전념했던 분들의 말씀은 종파를 초월하여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다음 불가 선사의 말씀도 흡사 사막교부들을 연상케 합니다. 어제 선물받은 책안에 나오는 봉암사의 조실이자 조계종 8대 종정이었던 서암스님의 일화입니다.
-“스님께서 입적하시고 나서 사람들이 스님의 열반송을 물으면 어떻게 할까요?”
“나는 그런 것 없다.”
“그래도 한평생 사시고 남기실 말씀이 없습니까?”
“달리 할 말이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생(生)을 어떻게 정리하시렵니까?”
“이 좋은 그대로.”
“극락과 같습니까?”
“같다.”-
얼마나 멋진지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참으로 진리를 살았던 구도자 서암 고승이었음을 봅니다. 사찰의 두 자산은 노승老僧이요 노목老木이라 하는데 고승高僧인 노승이면 더욱 좋겠고 천주교 수도원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진리이겠습니다. 어제 오후는 참 흡족한 날이었습니다. 세상 한 복판에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산 분들 여덟분에게 고백성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자녀답게 영적승리의 삶을 사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성녀처럼 사셨네요. 축하드립니다.”
“겸손과 사랑의 훈련장에서 참 성실히 사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구도자처럼 사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격려의 조언을 드렸더니 모두 파스카의 봄꽃들처럼 환히 피어나는 얼굴들이 그대로 자녀답게 살았음을 입증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미사전례의 절정은 성체 모시기 전 마치 만세 부르는 자세로 양손을 펴들고 함께, ‘하느님의 자녀되어 삼가 아뢰오니’로 시작되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일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삶의 중심적 가르침이 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하느님의 중심의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으로 완고했던 무지한 유다인들은 주님을 믿지 못했지만 우리는 다음 예수님 말씀을 믿습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와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일치의 삶을 살았던 예수님은 믿는 이들의 영원한 삶의 모델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일치의 삶이 깊어져 신적일수록 더욱 인간적인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신적임과 인간적임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신적神的이자 인간적人間的인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 될 것이며 믿는 이들 삶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사면초가의 위기 상황중에도 하느님의 아드님답게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던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분이 제1독서의 예레미야입니다. 예수님처럼 적대자들에 포위된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예레미야의 상황이 예수님과 흡사합니다. “사방에서 공포가”라는 뜻의 “마고로 비싸빕”이란 말마디가 예레미야의 위기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하느님 중심의 삶은 얼마나 견고한지 다음 두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던 자들이 비틀 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하느님의 이름은 “I AM”이라 했습니다. 이를 보강하여 “I AM with you(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I AM for you(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하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잘 드러납니다. 어제 병상에 있는 분에게 보내드린 격려성 응원의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자매님이 나을 때까지 저와 제 절친이신 예수님께서 늘 동행하실 것입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입니다. 넉넉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호흡은 길고 깊게 하세요.”
오늘 제1독서 즉시 이어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양노래의 고백도 힘이 납니다. 찬미, 찬양보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는 수행도 없습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여기 가난한 이들은 아나뷤으로 온전히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참으로 마음 가난한, 겸손한 이들을 뜻하니 바로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앞서 생략된 구절을 인용합니다. 예레미야의 말씀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말하지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이사20,9)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예언자 예레미야인지요!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화답송 후렴이 은혜롭습니다.
“곤경 중에 주님을 불렀더니 내 목소리 들으셨네.”(시편18,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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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따돌림’이라는 말 아시죠. ‘이지메’라는 용어로 학교에서 집단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들이 사회적인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우리 주변에 존재하리라 생각합니다.
따돌림을 가하는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저 아이를 따돌리니? 그랬더니 답이 천차만별입니다.
그냥 저 애의 말투가 기분 나빠서요.
그냥 기분 나쁘게 생겨서요.
우리 집 가는 방향으로 저 애도 걸어가서요.
사실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는 그저 평범한 학생인데 갑자기 특별한 이유도 없이 따돌림의 대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꼭 따돌림의 이유가 특별히 없이 그냥 기분 나빠서 따돌리는 것처럼 유다인들은 우리 주님을 집단으로 따돌리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했는데, 하느님의 뜻을 전했을 뿐인데. 주님께서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한 것을 꼬투리로 삼습니다. 사실 미워하는 특별한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그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집단 이기주의, 우리와 다른 이는 우리의 적이라는 저급한 모습들. 유다인들은 이러한 마음 때문에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혹시, 혹시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을까요? 우리와 다르면 우리 적이야. 그래서 우리와 어울릴 수 없어. 혹시 다른 누군가에게 우리 주님의 아픔을 선물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제2의 유다인이 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내면을 통해 하느님의 빛을 발견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뭣이 더 중한디?
돈이 더 중요한가요.
시간이 더 중요한가요?
유대인들의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돈을 시간보다 소중히 여기지만,
그로 인해 잃어버린 시간은 돈으론 살 수 없다.-
뭣이 더 중한가요? 돈? 시간?
우리고 누리고 있는 오늘, 지금, 이 시간을
천만금을 주고 사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눈앞에 죽음이 드리운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나 살 수 없습니다. 물론 팔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간을 지금 소유하고 있습니다.
천만금으로도 살 수 없는 그 시간을 말입니다.
이 시간을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소중한 오늘이라는 시간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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