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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분노를 느낄 때
출 5: 22 - 6: 7
▶ 하나님께 분노하는 크리스천이 있다.
하나님께 실망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올리면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불경스럽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있을 수 없는 일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흔한 일은 아닙니다만,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께 실망을 하거나 서운한 마음을 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그러한 감정이 악화되어 고인 분노를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성도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도와주시지 않고 기도에도 응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데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감정이 상한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믿음 약한 어떤 평신도에게 해당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한 개척교회 목사님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골목에 주차해 놓은 차량들을 방화한 놀라운 소식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차량들을 불태운 이유가 참 기가 찹니다. 개척교회를 했는데 도무지 성장하지도 않고 있던 성도들도 떠났기 때문에 홧김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제가 개척교회 목사이기 때문에 감이 오는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화를 낸 대상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오지 않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떠나간 야속한 성도들에게도 서운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을 것입니다. 실력 없고 능력 없는 자신을 무던히 한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대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더 이상 자신의 도움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그는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꼈을 것입니다. 돈도 없고, 배경도 없고, 능력도 없는 자기자신을 생각하며 주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침묵하신 것입니다. 무슨 뜻이 있겠지 기다려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분통이 터진 것입니다.
1921년에 스웨덴의 스톡홀롬에 사는 한 쌍의 젊은 부부가 아프리카로 가서 선교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데이빗(David)과 스비아 플러드(Svea Flood) 였습니다. 그들은 벨기에 콩고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남은 삶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콩고로 떠났습니다. 오지인 콩고에 도착하자마자, 벌레들의 사정없는 공격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벌채용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두 살인 데이빗 2세를 등에 엎고 밀림을 지나 먼 길을 걸었습니다. 가는 도중 이들은 그만 모두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고열 속에서도,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위해 순교하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오지의 한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부족민들은 선교사들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백인들이 들어와서 우리의 신을 화나게 할 수 없다”며 막았습니다. 그들은 두 번째 마을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도 거절당했습니다. 주위에 마을이 하나도 없었기에 지치고 기진맥진한 부부는 그곳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글의 중간에 나무를 잘라 개척지를 만들고, 진흙 오두막을 지어 살 곳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한 달이 지나도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곧 외로움과 병과 영양실조에 걸려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데이빗 2세도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여섯 달이 지날 때,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숨을 걸고 주님께 헌신하기로 다짐하고 기꺼이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임신한 아내는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면서도 “데이빗, 나는 내 아기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나기를 원해요. 저는 이곳에서 나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어요"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몇 달 동안을 시비아는 그렇게 펄펄 끊는 열과 싸우면서도 근처 마을에서 작은 소년 하나에게 정성을 기울여 개종하도록 도왔습니다. 몇 달 동안 얻은 것은 소년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비아는 말라라아가 매우 심해져서 쓰러졌고, 사경을 헤매며 건강한 여자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인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녀는 “이 아기를 에이나(Aina)라고 불러줘요”라는 마지막 말만 남기고, 참으로 허무하게도, 데이빗의 곁을 영원히 떠났습니다.
아내의 죽음에 데이빗 플러드는 넋이 나갔습니다. 마지막 힘을 다해 그는 스비아를 넣을 작은 나무 관을 만들었습니다. 산허리에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묻었습니다. 그리고 관 옆에 서서 울고 있는 어린 아들을 내려보았습니다. 순간 데이빗의 목젖을 타고 형언할 수 없는 눈물과 분노가 터져 올랐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이 상황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런 일을 내게 하시는 겁니까? 우리는 생명을 바치러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이 꼴이 무엇입니까? 능력 많고 아름다웠던 나의 아내는 이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27세의 젊은 나이로 말입니다. 지금 제게 남겨진 것이라곤 두 살 난 아들과 갓난 여자아이입니다. 그리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작은 마을 소년뿐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버리셨습니다. 나는 당신을 저주합니다......”
▶ 모세가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다.
본문에도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22절에서 23절을 읽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지금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고 있습니다. 모세는 세계최강 애굽 바로의 궁에서 황태자로 자란 사람입니다. 그는 가만히 있으면 천하를 호령하는 사람으로 살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히브리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권도 없고 영토도 없고 왕도 없이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있는 불쌍한 히브리 민족의 아들임을 알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영화를 다 버려서라도 자기 백성을 구하기로 맘먹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민족 앞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바치기도 맘먹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신앙이었고 애국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그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돕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힘으로 애를 썼지만 그는 실패하고 광야의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용암이 굳어 이루어진 시내산 근처에서, 그는 용암처럼 굳어버린 모든 꿈과 야망을 40년 동안 쓸어 내리며 쓸쓸하게 살아갑니다. 그는 신앙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다 망친 사람이었습니다. 나라를 사랑한 것 때문에 초야에 묻혀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수도 없이 울었을 것입니다. 애굽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원망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무능력과 무모함을 탓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그가 가장 실망하고 분노한 대상이 누구인지를......
그러던 어느 날 침묵하던 바로 그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힘이 없고 무능해서 꿈을 접어야 했던 모세 앞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떨기나무에 꺼지지 않는 불로 임하신 하나님은 그의 가슴에 다시 불을 질렀습니다. 꺼지지 않는 비전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보내면서 바로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일을 모세를 통해서 이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번에는 하나님이 힘을 써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합니다. 다시 한 번 주님께 인생을 드립니다. 그래서 바로 앞에 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신 대로 모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내 놓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확인한 것은 전능자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바로는 코웃음을 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주기는커녕, 게을러서 허튼 생각을 한다고 하면서 이스라엘에 견딜 수 없는 고역을 부과합니다. 짚을 받아 벽돌을 굽기도 힘든 판에 이제부터는 짚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모세에 대한 원망이 쏟아집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비난합니다. 원망합니다. 죽이려고 합니다...... 견디다 견디다 모세가 지칩니다. 모세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실망이 싹틉니다. 서운함이 생깁니다. 원망이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내를 터뜨립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하게 합니까? 이럴 거면 날 뭐 하려고 보냈습니까? 어디 내 맘대로 했습니까?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바로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왜 당신은 돕지 않습니까? 그 많은 힘 놔두었다 뭐 하려고 합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려울 때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힘들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도와주시기를 소원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섬세하게 도와주십니다. 어떨 때는 생각지도 않는 방법으로 우리는 감동시키기도 합니다. 탄복하게도 합니다. 그러나 어떨 때, 혹은 결정적일 때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느끼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기도하고 애원을 해도 도와주시기 않을 때에 무엇을 느낍니까? 현재의 나의 고통에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무엇을 느낍니까? 서운하지 않던가요? 원망스럽지 않던가요? 그리고 그 감정이 싸이면 분노를 느끼지 않나요?
▶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분노의 감정이 치밀 때까지 끌고 가시는 것일까요? 그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정이 그렇게 상할 때까지 왜 내버려두실까요? 우리는 여기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야 합니다. 뿌리와 근원으로 올라서 매듭을 풀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신앙합니까?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우리가 어려울 때 승리하기 위해서인가요? 사업에 실패하거나 외롭고 쓸쓸할 때 힘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인생이 죄 가운데서 연약해 지고 무능해 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통해서 힘을 얻고 위로를 얻고 명예를 회복하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신앙합니까? 옳습니다만,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우리는 전능자의 힘을 빌어 삶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신앙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근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의 목적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믿음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믿게 하십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의 요구와 하나님의 요구와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힘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요구합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그 능력이 나의 도움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알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 살아봐야 여호와 하나님을 안다.
본문 2절과 3절을 읽습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의 능력과 힘을 요구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또 다른 계시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여호와이신 하나님에 대한 계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리시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십니다. “맞다. 네가 지금 요구하는 대로, 지금까지는 내가 전능자로 나타났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이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제 나에 대한 다른 계시를 알리기를 원한다. 그것은 내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계시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계시할 것이다. 이제 내가 바로의 수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것이다. 그렇게 구원하면 너희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전능자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나의 이유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6-7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리라”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그것 뻔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다 압니다. 벌써 다 압니다. 이렇게 우리가 고생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어렵게 말씀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몇 번 읽고, 좋은 신앙서적 읽고, 제자훈련반에 들어가서 강의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리시려는 계시는 그렇게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알아듣는 것이 참된 앎이 아닙니다. 3절에 ‘알리지 아니하였고’라는 말과 7절에 ‘너희가 알리라’라는 말에서 ‘안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라는 말인데, 이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알고 아내가 남편을 아는 것 같은 지식을 뜻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아는 것은 치러보고 아는 것입니다. 체험적인 지식입니다. 함께 살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많은 부부들이 결혼생활하고 실망합니다. 그리고 이혼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난 그런 사람인줄 몰랐어......” 치러보니까 알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결혼 전에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치러보니까 실상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치러봐야 정말 압니다. 특별히 인격적인 대상은 치러봐야 압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는 것은 쉽습니다. 나의 죄를 씻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혼인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혼인했으면 살아야 합니다. 살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 신앙적인 앎은 체험적인 것입니다. 겪으면서 아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이 그것을 체험하면서 알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하면 도와주시는 분, 능력이 많으신 분, 바로도 꼼짝 못하고 야곱도 꺾고야 마는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참된 구원을 배워야 합니다. 힘도 좋지만 힘보다 구원이 더 좋습니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구원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제 구원자 하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계시가 임하는 것입니다. 바로에게 사로잡혀서 영원히 종노릇해야 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통해서, 사단에게 사로잡혀서 고통 당하는 인생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 고통은 여호와를 아는 통로이다.
그러려면 먼저 고통 속에 있어야 합니다. 바로에게 극한적으로 시달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세 가지를 통렬하게 느껴야 합니다. 첫째는 고역을 통해서 바로 아래에서 하루 세끼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지를 느껴야 합니다. 둘째는 거기에는 희망이 없음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가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다 하수에 던지도록 하는 일까지 허용하십니다. 당시에 아들은 가문의 희망이었습니다. 희망이 나인강에 떠나가는 일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셋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헤어나올 수 없다는 절망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의 의미를 압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구원의 하나님을 계시하십니다. 죄 아래에서 하루 세끼 먹는 게 너무 힘든 인생을 통해서, 그렇게 피곤하게 살면서도 희망 없는 인생을 통해서, 그 절망을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통해서 구원의 하나님을 알리십니다. 귀 있는 자는 이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전에 이스라엘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5절입니다.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구원 직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기억하시고 일을 시작하기 직전에 무엇이 있습니까? 신음이 있습니다. 고통스럽게 내뱉는 신음소리가 있습니다. 이 신음소리가 하나님의 사역의 시작을 알립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여호와를 체험하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너무나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아직 모릅니다. 생명이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모릅니다. 바로에게 잡혀 살았던 것처럼, 마귀 사탄 손아귀에서 고생하는 삶이 얼마나 고단한 삶인지를 아직 모릅니다. 아직도 우리는 사탄 아래에서 하루 세끼 먹으려고 이렇게 고생하며 사는데도 그 실상을 모릅니다. 바로에게 희망인 아들을 빼앗긴 것처럼, 세상에 희망이 없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세상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의 힘 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사탄에게 벗어 날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절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영혼 귀한 줄 모릅니다. 복음이 소중한 줄 모릅니다. 전하지 않고도 맘 아파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생하며 사는 지도 모릅니다. 귀 있는 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신음소리를 듣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심한 분이 아니십니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음소리를 다 듣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게 아니랍니다. 외면하고 계시는 게 아니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중에 신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듣고 계십니다. 그 분은 여러분의 고통을 다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약속한 언약을 잊으신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언약하신 약속을 이스라엘의 신음 속에서 기억하시던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에 대한 약속을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몰인정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심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실망스런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서운해 할만큼 무관심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화내고 분을 낼만큼 잔인한 분이 아닙니다. 다 듣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에 대한 귀한 계시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때를 조절하고 계신 것입니다.
▶ 기가 막힌 방법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을 통해서 당신을 알리십니다. 콩고 오지에서 아내를 잃고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던 데이빗 가정의 소식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아내를 잃은 데이빗은 스톡홀롬으로 돌아옵니다. 스톡홀롬에 돌아와서 그는 수입 회사를 차려 돈을 벌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그의 앞에서 '하나님'의 '하'자도 꺼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란 말만 들어도 분노가 혈관을 타고 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끝내 그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에이나는 아버지의 양육을 더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더(Arthur)와 아나 버그(Anna Berg)라는 착한 미국인 부부에게 맡겨집니다. 에이나 장성해서 드위 허스트(Dewey Hurst)라는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는 후에 미네폴리스에 있는 기독교 학교 총회인 노스웨스트 바이블 대학(Northwest Bible College)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성인이 된 에이나는 그녀의 아버지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십 년 동안 에이나는 아버지를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를 찾아 스웨덴으로 가는 도중 런던에서 잠시 하차하여 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로얄 알버트 홀을 거닐며 산책을 하다가 선교 집회가 그곳에서 열리고 있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회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한 흑인 목사님이 자이레에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를 간증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벨기에 콩고에 있는 자이레에 대해 말입니다. 에이나는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이 끝난 후 그녀는 목사님에게 다가가 “혹시 데이빗과 스비아 플루드라는 선교사님을 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흑인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스비아 플루드 선교님이 아이었던 저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신 분이시죠. 어린 딸 하나가 있었는데 그녀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제가 그 아이예요. 제가 바로 에이나에요.” 그녀는 소리쳤습니다. 목사님은 에이나 다가갔습니다.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부둥켜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어머니에 의해 회심한 그 어린 소년이 32개의 선교국과 몇 개의 성경 학교, 120개의 침대가 있는 병원과 110,000명의 크리스천이 있는 나라의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에이나 구 후 결국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알콜 중독자로 살아가던 아버지에게 그 흑인 목사님에 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를 통해 그 나라가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전도되었는지를 말입니다. 그 순간 성령이 데이빗 플루드에게 임했고 그는 쓰러졌습니다. 슬픔과 후회의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고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감격의 해후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빗 플루드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신비한 분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흔히 경험하는 신앙의 갈등을 취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에게는 깊이 와 닿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깊이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더 기도하시고, 더 매달려서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얻으십시오. 그렇게 해서 얻은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고백은 여러분을 정금같이 빛나게 할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얻으실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희한한 작전
출 5: 22 - 6: 8
옛날 중국 역사에 한 나라 시절에 재상을 지낸 장량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시황에 의해 자신의 나라가 멸망당하고 집안까지 몰락하자, 그는 진시황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시골에서 숨어 지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마을 밖의 다리를 지나다가 한 초라한 노인과 마주쳤습니다. 장량을 본 그 노인이 갑자기 자기 신발을 벗어 다리 아래로 던지더니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서 집어 오너라,” 장량은 기가 막혔습니다. ‘나를 언제 봤다고, 다리 밑으로 던진 신발을 가져오라는 거야. 자기가 던졌으면 자기가 주워와야지. 왜 나에게 시키는 거야.’하는 마음이 들면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러나 장량은 꾹 참고 다리 밑으로 내려가서 노인네가 던진 신발을 주워 왔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신발을 주워왔으면 신겨야 할 것 아닌가? 자, 빨리 내 발에 신기라.”고 하며 자기의 발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장량은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고 그 노인네에게 신발을 신겨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너는 쓸만한 데가 있구나.”라고 말하면서 ‘태공망 여상’이라는 사람이 지은, 세상에 둘도 없는 병법책을 그에게 주고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노인네는 희한한 방법을 가지고 장량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장량은 그 노인네의 테스트를 통과한 후, 천하에 둘도 없는 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장량은 그 노인네가 주고 간 그 병법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후 그는 유방장군을 도와 한나라를 일으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장량을 희한한 방법으로 테스트한 그 노인네와 같은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여호수아 5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이라는 곳에 도착한 장면이 나옵니다. 길갈은 금성철벽이라고 할 수 있는 여리고 성으로부터 약 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입니다. 뒤로는 요단강이 출렁거리고 있어서 뒤로 물러설 수도 없습니다
.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희한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2Km 전방에 있는 여리고 성에 있는 적들이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모든 남자가 할례를 행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투 능력을 상실해 버려서 아무 대항도 하지 못한 채 전멸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말도 안 되는 희한한 작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한한 작전은 이 뿐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또 다시 희한한 작전을 말씀하십니다.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돌아라. 그리고 일곱 번째 되는 날에는 일곱 바퀴 돌아라.”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라서 그렇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한, 두 명도 아니고 무려 200만, 300만 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리고 성을 뱅글뱅글 돌라는 하나님의 작전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또 메뚜기 같이 중다하고 해변의 모래같이 수다한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연합군대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32,000명의 군사를 거느린 기드온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32,000명의 군사가 많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두려워 떠는 22,000명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10,000명이 남았는데, 아직도 숫자가 많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300명만 남았는데, 그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 연합군대를 공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칼과 활과 창을 놓아둔 채,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되 빈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춘 후 미디안 연합군을 공격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희한한 작전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희한한 작전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성경 곳곳에 하나님의 희한한 작전이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희한한 작전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불러 그에게 출애굽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애굽의 바로 왕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바로 왕에게 ‘우리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게 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미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며 요청했습니다
. 모세의 요청을 받은 바로 왕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래, 알았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데 누가 거절하겠는가? 너는 네 백성을 데리고 가도록 하라.”고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 주기는 커녕, 더 힘든 노동을 시켰습니다. 과거 바로 왕은 지푸라기를 공급해주면서 벽돌을 굽게 했는데, 모세의 말을 들은 후부터는 감독자들에게 아예 지푸라기도 주지 않고 더 힘들게 벽돌을 찍어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정해놓은 수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난리를 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생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심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바로 왕을 만난 이후부터 더 심한 고역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부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20절과 2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 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모세, 너 혼자 바로 왕에게 미운 털 박혔으면 되었지. 왜 너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고생해야 하느냐? 이제 우리는 너 때문에 죽게 생겼다.” 모세는 애굽의 바로 왕과 바로 왕의 신하들에게 뿐 아니라, 자기 동족들에게까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모세는 절망 가운데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호소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22~23절) 여기에서 ’어찌하여‘라는 단어가 모세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말씀하신대로 했는데, 어찌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내가 공격을 당해야 합니까? 분명히 저는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상황이 이렇게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뭡니까?‘ 모세의 이 호소는 어떻게 보면, 우리의 호소일 수도 있습니다. 모세의 하나님께 대한 이 질문은 바로 우리의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했는데, 없는 시간을 쪼개서 열심히 맡겨진 직분을 감당했는데, 없는 물질이지만, 정성을 모아 물질로 섬겼는데, 칭찬이나 격려는 커녕, 오히려 심한 모욕과 핍박이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모세처럼,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모욕을 내가 당해야 합니까? 하나님, 억울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에게 이러한 고통을 당하게 하십니까?“라고 호소합니다. 남들과 달리 새벽잠 자지 않고 1년 내내 눈비비고 나와 새벽 제단을 쌓았는데, 상황은 더 어렵게 되어 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모세처럼 ”하나님, 제가 지난 1년 동안 새벽 제단을 쌓은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 우리 가정이 어려움을 겪습니까? 어찌하여 1년이 지나도 왜 우리 집안이 이 모양, 이 꼴 입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뭡니까?“라고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저도 그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모세처럼 하나님께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범죄 하기 싶습니다.
옛날 거울이 귀하던 시절에 한 농사꾼이 시장에서 거울 하나를 사왔습니다. 농사꾼은 시장에서 사온 거울이 하도 신기해서 장롱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심심하면 꺼내보고 혼자 웃곤 했습니다. 어느 날 부인은 남편의 행동이 수상해서 장롱 속을 뒤지다가 남편이 숨겨놓은 거울을 발견하여 그 거울을 들여다보니, 거울 속에 웬 젊은 여자가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부인은 시어머니께 달려가서 울며불며 이렇게 하소연 했습니다. "어머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남편이 저 몰래, 어여쁜 한 계집을 숨겨놓고 밤마다 만나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며느리의 말을 들은 시어머니는 며느리로부터 거울을 받아들고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방을 나서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바보 같은 녀석, 다 늙어빠진 할망구를 데려다가 무얼 하겠다고."
무엇을 가르쳐 주고 이야기입니까? 무식하면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모르면 고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모르면, 우리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4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싫어하시는지를 알지 못하다보니, 그들은 하나님께 범죄 했습니다
. 헛된 우상을 섬겼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만을 골라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6장 3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범죄 하지 않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그러면 모세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 행하였지만, 왜 그가 이처럼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까요? 모세가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바로에게 갔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찌하여 더 힘든 상황이 주어졌을까요?
1) 크신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희한한 과정을 겪게 하셨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손쉽게 애굽에서 나왔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강한 손길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호주에 있을 때, 비자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비자 연장 때문에 고생하는 분들도 있고, 아예 비자기간을 넘겨 불법으로 체류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 C모라는 집사님은 이민 변호사를 통해 호주 영주권을 거의 2년 만에 취득했습니다
. 물론 수만 불의 돈을 이민 변호사에게 지불했습니다만, 그래도 그 분은 영주권을 손쉽게 취득한 케이스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구역 식구 중에 K모 여자 집사님은 다릅니다. 그 분은 제가 알기로 당시에 거의 8년 가깝게 영주권 없이 살던 분이셨습니다. 불법 체류자들을 구제해주는 사면령을 기다리면서 살다보니 그렇게 오랫동안 남편과 떨어져 살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은 호주 사람들의 집을 청소해주는 <홈 크리닝>을 하면서 정말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린 대로 시드니순복음교회 사무실을 통해서 영주권을 신청했는데, 그렇게 고대하던 영주권이 나왔습니다
. 전혀 영주권이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영주권이 나온 것입니다. 저는 14~5년이 지났지만, 영주권을 받았을 때의 C모 집사님과 K모 집사님의 반응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똑같이 영주권이 없어 고통을 받다가 영주권을 얻었는데 두 분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C모 집사님은 영주권의 소중함을 별로 몰랐습니다. 돈을 들였기 때문에 영주권을 얻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K모 집사님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셔서 영주권을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얻은 영주권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 모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만약 일이 손쉽게 진행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우연하게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본문에서도 만약 모세가 “바로 왕이여, 우리 민족을 보내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바로 왕이 “그래, 알았다. 떠나거라.”라고 쉽게 허락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주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의 지도자 모세는 역시 훌륭해. 우리가 지도자 하나는 잘 뽑았어.”라고 모세를 칭송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바로 왕이 우리를 이렇게 순순히 내 보내주는 것을 보면, 역시 우리는 운 좋은 사람들이야.”라고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기는 커녕, 자기들 잘났다고 설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라고 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희한한 작전을 전개하신 것입니다. 다같이 출애굽기 6장 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손길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당신의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 그래서 이처럼 희한한 방법을 동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라마틱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우리들을 인도하실 때에도 이러한 방법을 동원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에게 닥쳐진 문제들이 풀리기는 커녕, 오히려 더 꼬여진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고통이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의 강한 손길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능력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이처럼 희한한 작전을 펼치십니다.
2) 신실하심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하심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러한 희한한 작전을 펼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능력만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당신의 신실하심을 알려주시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성품을 계시해주기 원하셨습니다.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이스라엘의 조상에게 여호와를 알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난해한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에 보면 이미 구약의 족장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알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미 족장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보다, ‘엘샤다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의미인 반면, ‘여호와’라는 이름은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은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을 베푸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알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노예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실 ‘구원자’임을 명확하게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이 사실을 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가 ‘언약’, ‘약속’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라는 당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시겠다는 약속을 꼭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과 다른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말을 하지만, 그 말대로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유머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문 밖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아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 도둑인가 봐." 남편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식, 들어오기만 해 봐라." 이윽고 도둑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사방을 두리번거립니다. 남편이 이불 속에서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자식, 뒤지기만 해봐라." 도둑이 장롱을 뒤져 돈과 금품을 꺼내더니, 그것을 가지고 유유히 문을 나갔습니다. 이불 밖으로 얼굴을 빼꼼이 내민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 "자식, 또 오기만 해보라." 이러한 남편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말만 앞세우는 남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약속한 것을 100% 지키기 매우 어렵습니다. 만약 약속한 것을 다 지킨다면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약속을 해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달리, 한번 약속하신 것을 기필코 이루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깜깜한 터널 속을 달리는 것 같이 앞길이 어둡습니까? 종국에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 있습니까? 식언치 않으시고 한번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3)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러한 희한한 작전을 펼치셨습니다. 6절부터 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여기 이 말씀을 우리가 한글 개역성경으로 읽었지만, NIV 영어 성경으로 읽어보면 반복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I will'이라는 문구입니다. 7번이나 반복되어 언급되어 있는데,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께서 직접 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만약 애굽에 대해 좋은 추억만 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그대로 머무르겠습니다.‘라고 하며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고통을 겪고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면 ’아, 여기가 우리가 살 곳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을 소망하고 그 길을 준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유에서 희한한 작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더 큰 고통과 역경을 겪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것은 똑같이 적용됩니다. 만약 우리가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앞날을 준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준비합니다.
넬슨 만델라 (Nelson Mandela)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미래를 준비함으로 나중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까지 오르고 1993년에는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인물입니다. 그는 백인 독재정권의 무서운 탄압 가운데 <민족의 창>이라는 무장 투쟁조직을 만들었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저 악명 높은 로빈슨 감옥의 돌 깨는 노역장에서 징역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만델라는 함께 구속된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운동을 했습니다. 그것은 60년대 남아공에서는 누가 봐도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들어오는 신세대 운동가들을 찾아가 끊임없이 토론을 하고, 감옥 안에 몰래 신문을 들여와 그것을 보면서 바깥 세계의 변화된 정보를 접했습니다. 만델라는 감옥 속에서 복수의 칼을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실력을 쌓아갔습니다. 그는 무려 27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결국 그 감옥에서 준비한 것 때문에 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퇴임 후인 지금도 전 세계를 다니면서 평화의 사도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조건 앉아서 기다린다고 해서 우리의 미래가 밝아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편기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어둡고 캄캄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준비하는 사람에게 찬란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고난 가운데에서도 미래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때때로 희한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아십니까?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을 아십니까? 여러분들의 삶이 믿음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습니까? 모세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했을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당했던 것처럼, 열심히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면 할수록 주변으로부터 공격을 더 받습니까?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했는데도 불구하고 환경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고통스럽습니까? 하나님은 아무 의미 없이 우리를 고난 속으로 인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고통을, 역경을 하나님의 더 큰 능력을 경험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 고통의 환경과 시간을 여러분들의 앞날을 준비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더 나쁜 환경을 만나면
출 5: 22 - 6: 9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되고, 믿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만사형통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믿음의 삶을 살아갈 동안 우리는 여전히 삶의 고통과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되는 것 같고, 예수 믿지 않았을 때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도 삶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째서 세월이 갈수록 아픈 일에 더 생깁니까? 어찌해서 내 삶은 이렇게 첩첩 산중입니까?”라고 심각한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어찌하여 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 보십시다.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도록 계획을 세운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일을 위해 모세를 부른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바로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말만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바로 앞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 달라’고 했을 때 바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학대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왕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전보다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바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바로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순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로는 화를 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혹독한 다루게 됩니다.
출5:6을 보면 “바로가 당일에 백성의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지푸라기도 주지 않고 벽돌 굽는 일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노동조건이 더 혹독해진 것이지요. 7절을 보면 “또 그들의 전에 만든 수효대로 그들로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자 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바로 앞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라고 말한 바로의 반응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주 나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모세가 직면한 어려움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에게 전하고 바로가 더 혹독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바로 왕을 찾아가서 호소합니다. 그러나 바로왕은 듣지 않았지요. 이스라엘의 패장들은 자기들에게 화가 미친 줄 그 때 알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왕 앞에서 나올 때 모세와 아론을 길에서 만나게 되자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모세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모세가 괜히 나서서 가만히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괴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패장들이 모세에게 따지고 대들고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기가막힐 일이지요. 모세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암초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모세는 “어찌하여”라고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그리고 “어찌하여”에 “더”를 붙여서 “어찌하여, 더 학대를 당하게...”라고 질문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세의 기도는 우리의 마음에 와 닿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 이런 상황을 만난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께 순종하려고 몸부림치는데... 그래도 잘 믿어보려고 애를 쓰는데... 그런데 왜 상황은 좋아지지 않고 더 나빠지고 있습니까? 모세는 “어찌하여”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였는데 어찌하여 더 상황이 빠집니까?”라고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작은 누님은 지금 교회에 다니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자형과 곧 주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작은 누님은 원래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교회에 열심히 봉사한 사람입니다. 자형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결혼하고 난 다음 어려운 중에서도 믿음은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 조카 민욱이가 8세가 되었을 때 병원에서 백혈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이 아이를 고치기 위해 좋다는 약을 다 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민욱이가 백혈병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부름을 받았습니다. 한동안 작은 누님은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만 교회를 떠나 버렸습니다. 물론 시골교회이기 때문에 양육이니 믿음의 훈련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 전혀 몰랐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부목사 생활을 하는 저로서는 전화로 믿음을 권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왜 작은 누님을 교회를 떠났는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안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럴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지금도 작은 누님은 자기는 하나님에게 상처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모세처럼 말한 것이지요. 나는 이렇게 노력했는데 하나님은 “어찌하여...?” “어찌하여 더” 어려운 상황을 주셨느냐는 것이지요.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 “어찌하여...?”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모세에게 대답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메시지를 주시기 원하십니까?
고통과 어려움은 인간의 실존입니다.
첫 번째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움은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고통은 인간에겐 실존적인 것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예수만 믿으면 만사형통할 것이다.’ 라고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어두움은 다 사라지고 오직 밝은 빛만 비칠 것이다. 어려움이나 고통은 한순간에 다 없어질 것이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순간 순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질병을 치료하시고 고통이 사라지게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곳은 여전히 문제투성이의 세상 한가운데 산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대로 활동하고 있고, 죄가 그대로 있는 세상에서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납니다. 겨우 돈을 좀 벌었다 싶은데 그만 병마가 찾아옵니다. 남편문제로 씨름하다가 겨우 가정이 행복한가 싶었는데 이번엔 자녀들이 속 썩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우환과 질고를 우리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에 가는 순간까지 이 땅에서의 삶은 고난과 어려움 투성입니다. 예수 믿어도 병들 수 있습니다.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삶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사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구원받았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분의 변화입니다. 이 말은 삶의 문제가 사라지고 갑자기 부자가 되고 병도 없고 고통도 사라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헛된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어떤 문제가 와도 그 문제를 극복하며 기쁨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구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과 어려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가 와도 끄덕 없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는 헛된 논쟁입니다. 삶에 문제는 늘 있어왔습니다. 문제없는 인생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문제가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삶의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고 응답받고, 더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 가는 것이요, 문제가 없으면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문제를 쳐다보게 하는 것은 악한 사단의 의도입니다. 믿음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요셉을 아시지요. 그는 형통한 사람입니다. 그가 하는 일이 형통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그는 형통한 사람, 존재자체가 바로 그런 형통한 사람입니다. 하는 일이 형통하다는 것과 형통한 사람이다 는 것은 다릅니다. 요셉은 아예 형통한 사람입니다. 어떤 문제도 그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에게 어려움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닥쳐와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생활도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감옥생활도 그를 실망시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형통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그에겐 문제나 고통이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핍박과 고통을 당하면서 감옥에 갇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고통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삶의 문제라고 고민하며 원망하며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그에겐 그런 핍박이나 삶의 고통들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그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나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지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이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라는 것입니다. 문제가 와도 상관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 되심을 믿은 자가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도 너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상관없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더 나쁜 상황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삶에 더해지는 고통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쳐오면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비로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출6:1의 말씀을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가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이스라엘이 더 큰 고통을 당하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을 바로왕과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줄 기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왕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야... 이제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먼저 “이제” 라는 단어를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이 단어는 아주 극적인 표현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어찌하여 더 어려워졌습니까?” 라고 절망 한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역사의 반전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그 능력의 손을 펴실 시간이 된 것입니다. 모세가 두 눈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여기에 보면 “강한 손을 더하므로”라는 말이 두 번씩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두 번씩이나 반복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바로에게 어떻게 하실 것임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지금 강한 손을 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숨통을 조이고 다급하게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과 다름없이 벽돌을 구워야 하는데 이제는 짚까지 주어야 합니다. 이 절대적인 명령을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바로 왕 보다 더 큰 손을 펴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리 누르는 것보다 그 이상으로 누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더 이상 바로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출애굽기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들이 나타납니다. 바로왕의 거역할 때마다 재앙이 애굽 땅에 임하기 시작합니다. 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 쟁앙이 임하고 이 재앙, 파리재앙... 나중에는 온 애굽 땅에 죽음의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전 애굽 땅에 나타났습니다.
계속해서 출6:6-8에 보면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I will...”이라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일곱 가지 선언입니다. 첫 번째가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입니다. 두 번째는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세 번째는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네 번째는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다섯 번째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알지라” 여섯 번째는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리고 일곱 번째는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곱 가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약속이고 주권적인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실 일을 모세에게 보여주신 것이지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라고 했을 때 바로가 선뜻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주었다면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는 ‘참 바로왕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야’ 라고 하면서 바로 왕을 칭찬했겠지요.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모세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한번 가서 책상을 치면서 말하니까 바로 왕이 겁먹고 우리를 보내잖아! 역시 모세야’ 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무슨 일을 만나면 모세부터 찾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신격과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우상화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은 드디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은 ‘어찌하여 더 이스라엘이 학대를 당하게 하십니까?’ 라고 묻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모세야 네가 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할 것이다 너는 두려워하지 마, 내가 이제부터 애굽 땅에 능력을 보일 때니까 바로에게 어떻게 하는지 잘 보아라”
더 나쁜 상황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더 나쁜 상황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습니다. 병들었다가 치유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치유의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고 기도했더니 응답받았습니까? 그 때 우리는 응답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의 체험이 있는 자가 비로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11장에 보면 마리아 자매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두 자매는 사람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주님 내 오라버니가 병들었습니다. 와서 고쳐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고는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그만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마르다 마리아 자매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나사로는 죽었고 모든 장례절차를 끝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있는 것에 왔더니 나사로가 죽은지 벌써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가까이 오게 되자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와서 예수님에게 이렇게 원망하며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이제야 오십니까?” 여러분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왜 주님이 이제야 오셨습니까? 왜 주님이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요청에 침묵하셨고,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까? 여기엔 주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더 놀라운 계획은 바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깊이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자훈련 사역자반에서 이 말씀을 나누면서 얼마나 은혜를 체험했는지 모릅니다. 자 보십시오 마르다 자매의 요청처럼 예수님이 금방 오셨다면 나사로는 안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치료해주셨겠지요. 그러나 그랬다면 마르다 자매는 예수님을 그저 병을 치료하는 분 정도, 치료의 능력을 가지신 분정도로만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사로가 죽고 난 다음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은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은 마르다 자매에게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시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병만 고치는 분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이 사건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마르다 자매의 요청,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상황이 더 나빠진 것처럼 보인 이유입니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대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모세가 ‘어찌하여 더 어려워졌습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응답은 한 가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나는 여호와라”라는 말씀만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모세는 너무 답답해서 “어찌하여...”라고 질문을 했는데 하나님은 다섯 번이나 ‘나는 여호와라’ 라고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답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왜 ‘나는 여호와라’라는 말씀만 반복하셨을까요? 저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메시지를 듣고 싶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고난 중을 당할 때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강함은 하나님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는 힘은 바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대답을 주지 않고 “내가 너희의 여호와라”는 말씀만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해방시키는 이 극적인 사건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원합니다. 더 어려운 상황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을 찾아와 바로의 절대적인 권력을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이 심판하시고 여호와라는 이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조상들도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잘 몰랐습니다. 이 이름이 얼마나 위대하며 능력있는지는 잘 몰랐습니다.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는 것만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비로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면서 하나님의 여호와 되심을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여호와되심, 완전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사실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사실 삶의 고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의 다른 것에 관심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시간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주라고 고백은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삶의 풍성한 근원이 되시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필요는 그리스도로부터 채워집니다. 그 분은 성령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기를 바랍니다.
보십시오 교회가 세상의 세력 앞에 무력해져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말씀을 보내어 하나님에게 집중하게 하십니다. 교회가 영적인 힘을 잃어갈 때 하나님은 주의 종을 보내어 교회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로라”라고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발견해야 합니까? ‘삶이 왜 이렇게 힘드냐? 교회가 왜 부흥하지 않는가? 왜 이렇게 애를 쓰는 데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는가?’라는 환경을 보지 말고 그 모든 환경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얼만 크신 분이냐 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그 어떤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힘들수록 하나님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통이 아니라 고통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로 보는 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이 더운 여름날 덥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더 열심히 말씀과 기도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 가십시오. 더 어려운 환경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