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漢武帝에 쫓긴 흉노족 낙랑 거쳐 신라로 들어온 듯
한반도의 동남쪽 변방에서 나라를 일으킨 신라는 마침내 676년에 삼국통일 과업을 달성했다.
삼국통일 위업을 이룬 문무왕은 그 감동과 영광을 비에 새겨 후세에 전하게 했는데 그 비가 바로 ‘문무왕릉비’다.
그런데 그 비에는 ‘신라는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다’ 라는 기록이 나온다. 투후(秺侯)는 중국 한무제 때 벼슬을 한 흉노족 휴도왕(休屠王)의 태자 김일제(金日磾)를 말한다.
신라가 흉노족의 후예라고? 정서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 비문 내용은 수백 년 동안 역사학자들의 화두였다. 이와 관련된 역사서 기록이 거의 없고 역사적 맥락이나 사료적 인과관계가 너무 생뚱맞기 때문이다.
이 학설 외에도 ‘신라 기마민족설’ ‘신라 북방 민족설’ 같은 가설이 꾸준히 오르내렸지만 어디까지나 학계 일부 주장이었을 뿐 정통 학설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경북 고대사 산책’ 이번 회(回)에서는 ‘신라 흉노족 후예설’에 대해 다뤄보았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서 ‘신라는 흉노의 후예’=1954년 중국 서안(西安)에서 발견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도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김씨 부인은 재당(在唐) 신라인 김공량(金公亮)의 딸이자 김충의(金忠義)의 손녀.)
비문엔 ‘(김씨 부인의)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로 흉노 조정에 있다가 한(漢)에 투항해 벼슬했다, 무제가 그를 중용해 투후(秺侯)로 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비문의 등장으로 문무대왕비의 내용이 사실(신라는 흉노족의 후예)이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어서 학계의 충격은 더 컸다.
더욱이 ‘투후의 자손들이 요동(신라)에서 번성했다’는 기록까지 더해져 실체에 더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는 누구일까. BC 1~2세기 한 무제는 오랑캐 정벌을 위해 군대를 북방으로 보낸다. 이 전튜에서 무제는 흉노족 김일제 일파를 포로로 잡는다. 잡혀 온 김일제는 무제의 마부(馬夫)가 되었고 충성을 다한 끝에 그의 신임을 얻는다. 어느 날 무제는 암살 위험에 처하는데 일제가 극적으로 그를 구조하며 산동성 지역의 제후로 봉해진다. 이때 얻은 이름이 ‘투후’(秺侯)다.
산동성에 정착한 투후 후손들은 왕망을 도와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다. 하지만 한(漢) 왕조 세력들은 힘을 결집해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다시 왕조를 일으켜 후한(後漢)을 세웠다. 결국 신(新)의 멸망은 흉노족을 유랑으로 이끌었고 이 사건은 흉노가 신라와 인연을 맺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낙랑의 유적·유물에서 흉노의 ‘흔적’ 대거 발견=중국의 격변기 때 부침을 거듭했던 투후의 후손들은 언제 어떤 이유로 신라와 연결이 되었을까. 바로 그 시작은 한 왕조가 후한을 세우던 1세기 무렵이었다. 투후 후손들은 한나라에게 축출된 후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데 이 시기 흉노족들이 한반도로 대거 이동하게 된다.
역사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낙랑(樂浪)을 주목한다.(한사군(漢四郡) 중 하나였던 낙랑은 지금의 평양으로 비정된다.) 낙랑유적에서 유독 흉노시대 유물이 많이 눈에 뛰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누금(鏤金) 기법’이다. 흉노족의 전통 기법인 이 금 가공법은 금을 좁쌀 모양 으로 세공하는 것을 말한다. 이 기법은 금관이나 귀걸이 등에 많이 응용되는데 이런 흔적이 낙랑유적에서 많이 발견된다.
낙랑의 유물에서 동물 문양의 장신구가 많이 눈에 띄는 것과 북방민족의 독특한 무덤양식인 적석목곽분이 많이 발견되는 것도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이 낙랑도 313년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면서 이곳에 정착했던 흉노족들도 다시 한 번 유랑 길에 오르게 된다.
◆낙랑 멸망 후 흉노족들 신라로 대이동=낙랑이 멸망하면서 그 유민들이 대거 남하를 시작하면서 한반도에는 토기, 금속 제작 기술이 유입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에 낙랑유민과 흉노족들이 대거 신라로 이동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선진 문물을 소유했던 이 유민들은 경주의 토착민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거나, 우수한 문명을 앞세워 쉽게 토착 세력과 친화(親和) 과정을 밟아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뚜렷한 사료가 없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낙랑 멸망시기(313년)와 신라김씨 내물왕 즉위(353년)가 비슷한 시기에 일치해 이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내물왕 즉위 이전엔 박·석·김 세 성씨가 번갈아 왕위에 올랐지만 내물왕 이후 김 씨 단독 왕위 계승 체제가 정착되었다.
즉 김일제 후손이 ▶신나라 멸망 후 낙랑으로 유입 ▶낙랑 멸망 후 신라로 남하해 김씨계 왕조 내물왕을 세웠다는 가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문무왕릉비에 대입하면 느닷없이 등장한 ‘신라 흉노족 후예설’이 완벽하게 정리된다.
◆신라 유물에 나타나는 흉노족 전통=신라의 유적, 유물에 수없이 등장하는 흉노족 전통도 이런 학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앞서 언급한 북방민족 금가공법 중 하나인 누금기법과 적석목곽분도 그대로 신라에 계승되고 있다.
누금기법과 관련해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있다. 바로 신라의 찬란했던 ‘황금문화’다. 고분에서 신라 금관이 쏟아져 나올 때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신라를 ‘동방의 투탕카멘’이라고 지칭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황금문화를 화려하게 일군 문화권이 바로 흉노족이다. 누금기법 외 신라 금관의 장식품으로 등장하는 새 모양이나 장식품에 수없이 등장하는 동물 문양도 모두 북방민족 전통 양식이다.
적석목관분에서 발견된 기마형 인물토기와 동복(銅鍑)도 흉노와 신라를 이어주는 중요한 단서다. 농경국가였던 신라에 기마(騎馬)무사가 나온 점과 유목민들의 이동식 조리도구인 동복이 출토된 점은 쉽게 설명이 되지 않지만 ‘흉노 후예설’을 적용하면 역시 명쾌하게 설명이 된다.
그러나 ‘신라 흉노족 후예설’은 몇몇 비문과 사서에 편린으로 존재할 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엔 전혀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또 신라인의 조상과 관련한 학설에는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라는 설과 ‘가야 김수로왕의 조상도 흉노 김일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설도 있다.
정황상 신라가 북방민족 계열이라는 증거는 많다. 그러나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흉노=오랑캐’라는 인식 때문에 흉노족의 후예라는 사실에 정서적 거부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신라 건국 비밀을 담고 있는 문무왕릉비와 이로 인해 제기된 김씨 왕족의 뿌리에 대한 비밀은 앞으로 역사학계가 풀어 나가야할 과제가 아닌가한다.
1문무왕릉비 상단부와 하단부-출처 어이무사.
2대당고김씨부인묘명.
3김일제 석상. 출처 KBS
4신라 귀거리에 적용된 누금기법-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5기마 인물형 토기 출처 국립중앙박물관.